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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부귀 창렬사서 웅치전투 호국영령 추모제

민간 주도 (사)웅치전적지보존회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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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웅치전적지보존회가 주최하고 주관한 430주기 임진왜란 웅치전 순국선열 추모제가 지난 5일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덕봉마을 소재 제각 '창렬사'에서 보존회원과 기관사회단체장 등 100명가량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 사진촬영=진안 국승호 기자

민간 주도로 결성된 (사)웅치전적지보존회(이사장 손석기, 이하 보존회)는 지난 5일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덕봉마을 소재 제각인 창렬사에서 ‘웅치전투’ 430주기(1592년 음력 7월 8일) 추모제를 봉행했다. 

웅치전적지 보존회원 등 100명가량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이날 추모제에는 전춘성 군수, 이미옥 군의회 부의장과 다수 군의원, 원상석 7733부대장 등 각급 기관·사회단체 대표와 회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날 제례에서 초헌관은 전춘성 군수, 아헌관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불참한 김민규 의장 대신 손동규 군의원이, 종헌관은 원상석 7733부대장이 맡았다.

보존회 손석기 이사장은 “임진왜란 때 웅치전투가 없었다면 조선의 최후 보루인 호남을 빼앗겼을 것”이라며 “‘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말을 나오게 한 웅치전적지는 진작 국가사적으로 지정됐어야 함에도 아직 그러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보존회에 따르면, 임진왜란(1592년 4월 13일) 당시 왜군은 전쟁 발발 19일 만에 수도인 한양을, 2개월 만에 조선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전라도(호남)만은 예외였다.

웅치전투는 왜군이 전라감영(관찰사 집무실) 소재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진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다. 당시 전라도는 조선 최고 곡창지대이자 나라곳간 노릇을 하던 최후 보루였다.

이치와 함께 호남(전주)을 넘나드는 주요 관문 두 개 가운데 하나였던 웅치는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덕봉마을에서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두목마을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다. 

1592년 음력 7월 8일, 밀려오는 1만여 명의 왜군을 막기 위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김제군수 정담, 해남 현감 변응정 등이 이끌던 2000명가량의 조선군 민(의병)-관 연합 부대는 제1, 제2 방어선(이상 부귀면 세동리)과 제3방어선(웅치)에서 죽음으로 맞섰다. 하지만 방어선은 끝내 전부 뚫렸다. 

일본군은 진격을 계속했지만 웅치전에서의 타격이 워낙 커 오합지졸에 가까웠다. 전주성 4km 전방인 ‘안덕원’ 근처까지 진군하다 결국 점령의지를 상실하고 철수했다. 

웅치전은 ‘졌잘싸(졌지만 잘 싸운)’ 전투를 넘어서 ‘결국 승리한 전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왜군의 호남 점령 의지를 완전히 꺾었기 때문이다. 이후 호남은 계속해서 전쟁물자 조달지와 군사력 비축지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하며 국난극복의 뒷심이 됐다.

한편, 최근 전북도를 비롯해 진안군, 완주군 등 3개 광역 또는 기초 자치단체는 웅치전의 역사적 가치를 재정립하고 웅치전적지를 국가사적으로 지정하기 위한 공동 노력을 펼치고 있다.

그 결과, 2019년 웅치 고갯길 일대를 중심으로 웅치전적지에 대한 문화재 조사를 실시, 임진왜란 때로 추정되는 무덤과 성터 등을 확인했다. 지난해 8월에는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일원을 문화재구역으로 재설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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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웅치전적지보존회가 주최하고 주관한 430주기 임진왜란 웅치전 순국선열 추모제가 지난 5일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덕봉마을 소재 제각 '창렬사'에서 보존회원과 기관사회단체장 등 100명가량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 사진촬영=진안 국승호 기자

민간 주도로 결성된 (사)웅치전적지보존회(이사장 손석기, 이하 보존회)는 지난 5일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덕봉마을 소재 제각인 창렬사에서 ‘웅치전투’ 430주기(1592년 음력 7월 8일) 추모제를 봉행했다. 

웅치전적지 보존회원 등 100명가량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이날 추모제에는 전춘성 군수, 이미옥 군의회 부의장과 다수 군의원, 원상석 7733부대장 등 각급 기관·사회단체 대표와 회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날 제례에서 초헌관은 전춘성 군수, 아헌관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불참한 김민규 의장 대신 손동규 군의원이, 종헌관은 원상석 7733부대장이 맡았다.

보존회 손석기 이사장은 “임진왜란 때 웅치전투가 없었다면 조선의 최후 보루인 호남을 빼앗겼을 것”이라며 “‘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말을 나오게 한 웅치전적지는 진작 국가사적으로 지정됐어야 함에도 아직 그러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보존회에 따르면, 임진왜란(1592년 4월 13일) 당시 왜군은 전쟁 발발 19일 만에 수도인 한양을, 2개월 만에 조선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전라도(호남)만은 예외였다.

웅치전투는 왜군이 전라감영(관찰사 집무실) 소재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진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다. 당시 전라도는 조선 최고 곡창지대이자 나라곳간 노릇을 하던 최후 보루였다.

이치와 함께 호남(전주)을 넘나드는 주요 관문 두 개 가운데 하나였던 웅치는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덕봉마을에서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두목마을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다. 

1592년 음력 7월 8일, 밀려오는 1만여 명의 왜군을 막기 위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김제군수 정담, 해남 현감 변응정 등이 이끌던 2000명가량의 조선군 민(의병)-관 연합 부대는 제1, 제2 방어선(이상 부귀면 세동리)과 제3방어선(웅치)에서 죽음으로 맞섰다. 하지만 방어선은 끝내 전부 뚫렸다. 

일본군은 진격을 계속했지만 웅치전에서의 타격이 워낙 커 오합지졸에 가까웠다. 전주성 4km 전방인 ‘안덕원’ 근처까지 진군하다 결국 점령의지를 상실하고 철수했다. 

웅치전은 ‘졌잘싸(졌지만 잘 싸운)’ 전투를 넘어서 ‘결국 승리한 전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왜군의 호남 점령 의지를 완전히 꺾었기 때문이다. 이후 호남은 계속해서 전쟁물자 조달지와 군사력 비축지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하며 국난극복의 뒷심이 됐다.

한편, 최근 전북도를 비롯해 진안군, 완주군 등 3개 광역 또는 기초 자치단체는 웅치전의 역사적 가치를 재정립하고 웅치전적지를 국가사적으로 지정하기 위한 공동 노력을 펼치고 있다.

그 결과, 2019년 웅치 고갯길 일대를 중심으로 웅치전적지에 대한 문화재 조사를 실시, 임진왜란 때로 추정되는 무덤과 성터 등을 확인했다. 지난해 8월에는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일원을 문화재구역으로 재설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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