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가야의 비밀, 아이언 로드] ④ 군산 어청도 - 제철기술 갖고 어청도 건너온 제나라 전횡은 '마을의 수호신'

2018-09-06     김보현

최근 전북 가야사 복원 작업이 탄력을 받은 가운데 장수에서 다수의 제출 유적이 발굴돼 관심이 집중됐다. 선진 기술이자 문물인 철기는 강력한 국력. 장수가야 제철기술의 독자성과 선진성을 증명한다면 당시 삼국(고구려·백제·신라) 못지 않은 중심축으로 떠오른다. 그렇다면 장수가야의 제철기술은 어디에서 전파됐을까.

중국에서 바닷길을 통해 군산으로 유입돼 풍부한 철 산지인 장수까지 전파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일명 ‘아이언 로드(iron road)’다.

‘아이언 로드’는 기원전 2세기 중국 산둥성 일대에 있던 제나라 왕의 동생 전횡이 군산 어청도로 망명길에 오르면서 루트가 시작된다. 어청도를 통해 한반도에 도달한 전횡의 후예들과 철기 문물은 내륙인 전주·완주(오늘날 전북혁신도시 일대)로 이동한다. 이미 전주·완주 일대에서 뛰어난 청동 주물 기술을 갖고 있던 토착세력과 만나 화려한 청동기·철기 문화를 꽃피운다.

이들 세력 일부는 1세기 후 풍부한 철광석(철기 원재료)을 찾아 이동한다. 정착한 곳이 바로 장수·무주·진안에 걸친 진안고원 일대, 그 중 특히 장수지역이다. 그리고 이곳을 기반으로 한 선진집단은 장수가야로 발전했다.

전북일보는 장수가야 제철기술의 뿌리를 찾기 위해 6차례에 걸쳐 ‘아이언 로드’를 거슬러 올라가며 쫓고 있다. 장수가야 제철유적 현장에서는 찬란했던 테크노밸리의 영광을 돌아봤고 전주·완주(오늘날 전북 혁신도시)에서는 이곳 잡단세력과 장수가야 세력의 연결고리를 찾았다. 세 번째 아이언 로드 거점은 바로 군산 어청도다.

기원전 2세기 전횡은 중국 산둥성 치박시에 수도를 두고 제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 유방이 천하를 통일했고 제나라도 위협했다. 제나라의 왕제 전횡은 군사 500여 명을 이끌고 망명길에 올랐다. 산둥반도를 지나 바다를 건넌 전횡 세력은 중국을 떠난 지 3개월 만에 한 섬을 발견한다. 바로 중국과 가장 가까운 서해바다의 섬, 군산 어청도다.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2시간 30분 이동하면 U자형 어청도항이 나타난다. 물색이 맑고 푸르러서 어청도(於靑島)인가 싶지만, 지명의 유래도 전횡과 관련돼 있다.

기원전 2세기 전횡이 군사들과 바닷길로 망명에 올랐을 때 안개 낀 바다 위에서 푸른 산 하나가 우뚝 나타났다고 한다. 이들은 그 섬을 푸른 청(靑)자를 붙인 어청도라고 이름 짓고, 정착했다.

전설 같은 이야기는 실제 마을 곳곳에서 드러나는 전횡 세력의 흔적을 통해 현실로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섬에서 조류의 흐름을 이용, 해적선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를 통해 섬의 안전을 지켜주고 이익을 얻었다. 섬 주민 사이에서는 이곳이 지금의 ‘불탄여’라고 전해진다. 어청도 내 불탄여 구역은 지금도 조류의 흐름이 좋아 낚시하기 좋은 포인트로 많은 사람이 찾는다. 남서풍이나 파도 높은 날에는 오르는 것을 삼가야 할 정도다.

더 중요한 것은 전횡을 모시는 전횡사당(치동묘)이 존재한다. 풍어와 해상 안전을 지켜주는 당신으로 모시며 매년 당제를 지낸다. 1960~70년대 고래잡이가 활발할 때까지만 해도 풍성하고 화려하게 제사를 지냈다. 고래잡이가 금지되면서 매우 약소해지긴 했지만 지금도 매년 이어지고 있다.

작은 섬인 어청도에서는 주민들이 대부분 항구 근처에 모여 산다. 배에서 내려 주택 골목길 안으로 5분가량 걸어 들어가자 전횡사당(치동묘)이 모습을 드러냈다. 굳게 닫힌 대문을 열자 잡초가 무성한 마당과 사당이 보였다.

이제는 사람이 잘 찾지 않는 사당은 먼지가 두텁게 내려앉았다. 벽면은 군데군데 벗겨져 깨져 있었다. 그나마 수년 전 군산시청에서 부분 보수를 해 기둥이나 단청, 창호지는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사당 문을 여니 덩그러니 놓여 있는 전횡의 초상화. 문을 열면 정면으로 마주치는 얼굴이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초상화 앞에 놓인 막걸리와 소주 한 병, 말라비틀어진 곶감 다섯 덩이, 유통기한이 반년은 지난 주전부리 등이 감정을 달랬다.

고평국 어청도 주민자치위원장(69)은 “가끔 전횡사당을 조사하거나 취재하러 오는 사람들이 두고 간다”고 말했다.

기자도 간식으로 챙겨온 과자 두 봉지를 올려놓았다. 전횡대감에게 만선으로 돌아오길 빌던 주민의 마음이 이랬을까.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땐 풍어제가 대단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전횡대감이라고 불렀죠. 치동묘에 포경선이 맨 처음 잡은 고래를 바쳤어요. 농악대는 사물놀이를 하며 온 마을을 휘젓고, 배 모양으로 만든 그릇에 고래 고기와 각종 음식을 담아 전횡대감에게 올리고 바다로 띄웠어요.”

고 씨가 사당 한켠에서 제기를 꺼내 보여줬다.

스물 둘에 어청도로 시집왔다는 고영아(72) 씨도 젊었을 적 기억을 떠올렸다.

“시어머니도, 마을 사람들 모두 ‘전횡대감’에게 고마워했어요. 바다를 건너온 대감이 예부터 마을 주민들이 배 타러 가면 안전하게 다녀오도록 도와줬다고 전해내려 왔고 주민들은 그렇게 믿었죠. 다들 전횡대감을 마을 수호신처럼 여겼습니다.”

당시 중국 산둥반도에서 한반도 서해까지 바다를 건너는 것이 정말 가능했을까.

고평국 위원장은 “중국 어선이 충분히 올 수 있는 거리”라며 “여름엔 태풍으로 풍랑이 심하지만 가을엔 돛단배로도 한두 달 만에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