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공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고려 상감청자 비색 구현의 중요성-천년 고려 사라진 ‘비색(翡色)’을 찾아서

2018-09-12     기고

“고려 비색(翡色)이 천하제일의 청자다.”

중국 송나라 태평노인이 명품을 기록한 책 <수중금(袖中錦)>에서 한 말이다. 즉‘소매 속에 간직할 귀한 것’이 고려 비색이라는 얘기다. 이 말이 나왔을 당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고 자부하는 북송의 여관요(汝官窯) 청자 비색이 절정에 달했을 때이다. 그런데 태평노인은 다른 곳에서는 모방하려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다 할 만큼 고려 비색청자를 으뜸으로 여긴 것이다.

최근 대형 건물지가 발굴되어 세간을 뜨겁게 한 부안 유천리 요지 사적 12호에서 나오는 비색청자는, 무늬가 섬세할 뿐만 아니라 색이 유달리 정교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작공정이 워낙 까다로운 탓에 그마저도 13세기 후반 즈음에서부터는 명맥이 끊겨 있다. 당시에도 끊임없이 비색을 연구하고 실험한 흔적이 드물게 남아 있지만, 비색은 이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비의 색이 되고 만 것이다. 간혹 누군가 고려청자 비색을 재현해 냈다고 얘기하는 경우도 있으나, 사실상 아직까지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비온 뒤 맑게 갠 가을하늘과도 같은 비색’은 나오지 않고 있다.

다행인 것은, 부안청자박물관과 부안청자협회에서 사라진 비색을 재현하고자 온 힘을 쏟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비색을 만드는 유약의 투명도나 형태, 무늬에 있어 70% 정도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물론 고려 비색청자가 나오는 데에는 나무와 온도, 흙과 유약의 차이에 따라 상당부분 달라질 수 있다. 자기는 무척이나 민감하기 때문에 온도 조절에 조금만 차이가 나도 앞면은 비색이나 뒷면은 녹색으로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오느냐 앞에서 부느냐 등의 상황에 따라 숱한 변수가 생기기도 한다. 7할은 사람이 만들지만, 나머지 3할은 불의 조화요 자연의 조화로 나오는 것이 비색청자인 것이다.

부안청자협회 소속 도예가 이종창 씨는 비색 재현을 위해 2년 동안 천연 유약 개발 실험하는 데만 200여 차례나 거듭하고 있다. 심지어 유약 만들 때 쓰는 잿물을 만들기 위해 재가 될 만한 갖가지 나무나 풀을 태워보기도 한다. 숯가마에서 나오는 재는 재색이 아닌 검은색이라 쓸 수가 없다고 한다. 신비의 청자 비색이 세계 도자사상 100% 똑같이 재현이 안 되는 유일한 도자기라고 하나, 힘이 들어도 오로지 전통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사실 세계에서 자토로 만든 그릇에 유리질의 유약을 입혀 고온으로 구워낸 ‘자기’를 최초로 창조해낸 나라는 중국이다. 그리고 10세기경 중국 오월국의 국가 기밀이었던 자기 제작기술을 전수받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기를 만드는 데 성공한 나라가 고려였다. 다른 나라는 17세기까지도 낮은 온도에서 구워낸 토기 즉 질그릇만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 상상도 못할 기술에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태국이나 베트남의 자기들도 1600년 이후에나 만들어진 것들이다.
 

고려청자는 발생부터가 중국 청자와 많은 유사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지만, 고려 중기인 12세기 후반 경에는 우리만의 독자적인 비색 상감청자가 개발되었다. 중요한 점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청자빛을 만든 이유와 색깔의 선택이 확연히 달랐다는 것. 중국은 옥빛을 흠모하여 유약을 두껍게 바른 반면, 고려청자는 최대한 유약을 얇게 입혀 테토 색과 무늬가 얇은 유약 아래로 은은하고 섬세하게 비쳐들게 했다.

유약의 이름도 달랐다. 중국의 유약이 옥을 가리키는‘비색(秘色)’이라면, 고려청자에 쓰인 유약은 ‘물총새 비(翡)’자를 딴‘비색(翡色)’인 것이다. 물총새 깃털이 푸른색을 띠고 있어 청자색과 흡사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산예출향 역시 비색(翡色)인데, …(생략)… 여러 기물들 가운데 이 물건만이 가장 정절(精絶)하고, 그 나머지는 월주(越州)의 고비색(古秘色)이나 여주(汝州)의 신요기(新窯器)와 대체로 유사하다.’

고려 인종 1년(1123), 송나라 휘종(徽宗)이 파견한 사신의 수행원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이 약 1개월간 개경에 다녀간 적이 있다. 이 때 그 경과와 견문을 그림을 곁들여 엮은 사행보고서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나온 말이다.

다시 말해 중국은 옥 대체품으로서 청자와 백자를 만들었지만, 차 문화를 중시한 고려는 찻잔을 만들기 위해 도자기를 만들었다. 고려에 불교와 선종이 유행하면서 차 마시는 일과 좌선을 하는 행위가 같다고 본 까닭이다. 한낱 물(物)적인 것에 대한 집착보다는 심신을 다스리며 선(仙)의 경지를 지향하는 정신의 고매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현대에 이르러 고려청자의 비색을 구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 활용도가 적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부안청자박물관에서는 실용성을 더해 청자로 된 향수병, 참외모양 디퓨저 용기, 향초 용기는 물론 찻잔이며 차도구 세트 등의 제품을 만들어 상품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지원이 열악한 환경에서 다양한 상감무늬를 수작업으로 장식한 품격 높은 상품으로 부안 고려청자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이제 막 첫걸음을 시도했다. 국가적 차원에서 보다 지속적인 콘텐츠 개발과 활용이 필요하겠지만, 천 년 고려 상감청자의 메카인 부안지역의 도자문화 부활은 한국 도자기의 세계 경쟁력 우위 확보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궁하면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할 것이며, 통하면 오래 갈 것이다. 소매에 간직하고 싶을 만큼 귀하디귀한 부안지역 고려 상감청자의 비색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서서히 세계를 향해 열리고 있음이 느껴지는 즈음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