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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의 노장적 생각 (20건)

장자라는 중국 고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한테는 바다에 대해서 말해줘도 소용없다. 그 이유는 그가 우물이라는 좁은 세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여름벌레한테는 얼음을 말해줄 수 없다. 여름이라는 시간만 살다가기 때문이다. 함량이 작은 사람에게 도(道)를 말해봐야 아무 소 용없는 것은 그가 자신만의 좁다란 진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인간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 체계나 시간적 경험 혹은 공간적 제약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대개는 자신의 믿음 체계나 시공간적 제약으로 빚어진 함량만큼만 살다가는 것이다. 일반적인 소시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학자나 종교인이나 정치인 등을 망라하여 누구나 그러하기 쉽다. 그래서 철없는 어른도 있고, 신도들의 이해 안에서 겨우 연명해나갈 수밖에 없게 된 성직자도 있으며, 제자들의 아량에 기대 살게 되는 교수도 있고, 시대의 버림을 받게 된 큰 정치인이 생기는 것이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한테는 자기가 사는 우물이 자기 경험과 인식의 전체다. 그런데 인간은 개구리와 다르다. 진화를 선택한 동물과 달리 인간은 문화를 선택하였다. 문화는 진화에 비해 시공간적 또는 질적이고 양적인 면에서 모두 확장성이 훨씬 더 크다. 진화는 ‘필요’가 만들지만, 문화는 지금 당장 필요치 않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무모함에 기대는 바가 크다. 인식의 범위 밖으로 나가 보려는 무모한 상상력이 문화의 핵심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을 자신의 전 세계로 알고 살다 가지만, 인간은 가본 적도 없는 자신의 우물 밖을 꿈꾸는 것이다. 결국 무모한 꿈을 꾼 한 사람에 의해 인간은 우물 밖의 세계를 자신의 영토로 갖는다. 당연히 문화의 확장성은 한계 밖을 향해 무모하게 덤비는 상상력이 결정한다. 상상력 즉 자신의 제한성을 넘어서려는 무모함이 있으면 문화적 활동을 크게 할 수 있고, 그것이 없으면 문화적 활동을 작은 테두리에서 따라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의 크기가 큰 문명을 살 것인지 아니면 작은 문명을 살 것인지를 결정한다. 결국 상상력은 익숙함에 갇히지 않고 생경한 곳으로 나를 끌고 가서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한다.문제는 이 제한성을 넘어서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작은 문명은 일정한 파라다임 안에서는 계속 작게 유지되고, 큰 문명은 일정한 파라다임 안에서는 계속 크게 유지된다. 후진국 형 국가에서는 후진국 형 일이 일어나고, 선진국 형 국가에서는 선진국 형의 일이 일어난다. 우리나라에 후진국 형 재난이 끊이질 않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다. 후진국적 제한성 혹은 후진국적 시선을 극복하고 한 단계 더 높고 큰 시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단계에서나 시선의 제한성에 갇혀 있으면, 다시 말해 익숙한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 단계를 세계 전체로 여기며 살 수 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을 비판적인 언사로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하는 것이다.더 단순화해서 말하면 우물 안 개구리 형 인간은 자신만의 익숙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간이다.우물 안에서 우물 밖을 꿈꾸는 상상력이 발동될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지적 활동이 바로 ‘질문’이다. 반면에, 자신이 머무는 우물 안으로만 시선이 향해 있을 때 작동되는 지적 활동이 ‘대답’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는 ‘대답’의 기능으로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이미 도달해버렸기 때문에, 그 다음을 노려야 하는데, 계속 우물 안에만 머물려 하거나 우물 안에 머물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대답’하던 습관을 ‘질문’하는 습관으로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다. 우물 안 개구리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우물 밖을 향해 튀어나가는 도전을 할 것이냐 하는 점이라고 말해도 되겠다.대답이란 무엇인가. 이미 있는 지식과 이론을 그대로 먹은 후, 누가 요구할 때 토해내는 것이다. 이때 승부는 누가 더 빨리 뱉어내는가, 누가 더 많이 뱉어내는가, 누가 더 원래 모양 그대로 뱉어내는가에 따라 갈린다. 여기서 인간의 성장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원래 모양’그대로 뱉어내는 일이다. 대답이라는 기능을 하면 할수록 자기도 모르게 ‘원래 모양’을 중시하고 거기에 집착한다. 그런데 ‘원래 모양’을 시제로 따져보면, 그것은 미래적이라기보다는 과거적이다. 그래서 ‘원래 모양’을 중시하는 데 익숙해지면 과거를 따지는 일을 중시하게 되고 과거를 분명히 하는 일을 제대로 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이 채우는 사회의 논쟁은 거의 대부분이 과거 논쟁으로 흘러 버린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선적인 사명은 과거를 지키고 밝히거나 과거의 횃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데에 있지 미래를 여는 일에 있지 않다. 오히려 미래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우선 분명히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를 내버려 두고 뜬구름이나 잡으려 하는 사람으로 치부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가까이에 있는 현실의 기능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집중하지,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꿈을 꾸거나 비전을 세우는 일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비전이나 꿈을 현실성 없는 한가한 소리로 치부하기 쉽다. 그래서 일상에서도 고등학생들에게 꿈을 꾸는 일보다 우선은 대학 합격이 더 중요하니, 꿈은 대학에 가서나 꾸라고 말해주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청춘들은 점점 고갈되어 간다. 나라도 마찬가지다.또 ‘원래 모양’은 바탕이나 근거가 되거나 모범적인 모습을 표현하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기준으로 사용하는데, 기준이라는 것은 언제나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기준이 없이 구분은 일어나지 않고, 구분을 하지 않는 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 구분 가운데 가장 분명한 것은 시비와 선악의 기준이다. 자기가 가진 기준에 맞으면 옳거나 선이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르거나 악이 된다. 이런 연유로 ‘원래 모양’을 중시하는 ‘대답’이라는 기능을 잘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은 진위나 선악을 따지는 일에 쉽게 빠진다. 그러다가 결국은 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 옳고 그름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사용하고, 선과 악의 윤리적 기준을 적용하는 것을 철저한 삶의 모습으로 믿게 된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로 채워진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논쟁이 진위 논쟁이나 선악 논쟁으로 빠진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위나 선악을 넘어서거나 혹은 비켜서서 새로운 길을 내려는 사람들은 종종 사이비나 회색분자 혹은 변절자로 취급되어 가혹한 냉대를 당하고 배척된다. 변절이나 변화나 제3의 길은 회색분자의 길로 치부되기 때문에 이런 사회에서는 종종 기준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뭉치게 된다. 바로 진영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제 모든 활동이나 논의는 진영의 논리로 귀결된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리는 진영에 있지 세계에 있지 않다. 나에게도 있지 않다. 나는 진리의 입법자가 아니라 진영의 진리를 대행하는 대리인으로만 존재한다. 능동적이거나 독립적인 주체가 아니라 바로 종속적 주체로 전락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종속성을 스스로는 의식하지도 못하고, 또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평생 종속성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종속성은 종속성 그 자체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종속성으로 채워진 주체들이나 또 그런 주체들이 이루는 사회나 국가가 종속성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큰 불행이다. 한 번 종속성에 갇히면 종속성을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운명 앞에 던져져 버리는 것, 이것이 비극인 것이다. 그래서 진영에 갇힌 사람은 대부분이 근본주의자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다 근본주의자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을 넘보는 무모함 자체를 죄악시 할 수 있다. 우물 안은 이미 진영이 되었고, 그 진영을 벗어나는 일은 옳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다. 진영에서 공유한 논리와 맞지 않은 것은 다 나쁘고 악하다. 그래서 모든 일들은 진영 안에서만 유효하다. 변화도 진영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당연히 작은 변화에 만족하고 큰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다. 우물의 왼쪽에 있다가 오른 쪽으로 옮기고 또 오른 쪽에 있다가 왼쪽으로 옮기는 것을 큰 변화나 생명력으로 착각한다. 왼쪽과 오른쪽을 바꾸는 것을 스스로는 새 세상을 연 것으로 착각한다. 이 착각은 자신도 우물 속에 가두고 사회도 우물을 벗어날 수 없게 붙잡는다. 그래서 한 번도 미래를 실현하지 못하고 평생 과거만을 살다간다. 전술적 차원에만 머물다 전략적 차원으로 건너가지 못한다.우물 안에서 볼 때 우물 밖은 다른 곳이거나 없는 곳이거나 불가능한 곳이거나 위험한 곳이다. 상상력은 다른 곳을 꿈꾸는 무모한 행사다. 다른 곳을 적대시하지 않는 포용력이 없이는 우물 안 개구리의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우물 안에서 왼쪽 오른 쪽은 ‘다른 곳’이 아니라 ‘같은 곳’이다. 우물 안에서 왼쪽과 오른 쪽을 바꾸는 것은 변화가 아니다. 조삼모사일 뿐이다. ‘대답’으로만 훈련된 사람들끼리 하는 진영의 교체를 우물 밖으로 나간 것이라고 우기거나 새로운 우물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 진영의 교체를 새 세상으로 착각하면 착각할수록 넓은 세상의 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물 안의 한 쪽만 지키다가 속절없이 작아진다. 그래도 말할 것이다. 작아진 것이 패배가 아니라, 진정한 승리라고 말이다. 이런 우물 안 개구리들을 중국의 루쉰(魯迅)은 ‘아큐’(阿Q)라고 하면서 중국인의 종속성을 비판하고, 중국이 우물 안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과거에 갇힌 우물 안의 중국에서 왼쪽 오른쪽의 교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중국’을 꿈꿨던 것이다. 아직 ‘아큐’(阿Q)의 속성을 탈각하지 못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만 해 왔던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기획 | 기고 | 2018-02-13 23:02

한사람의 삶은 전적으로 그 사람이 가진 시선의 높이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선의 높이까지만 살다간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문명은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된다. 가장 아래층은 구체적인 물건들로 채워진다. 둘째 층은 구체와 추상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제도다. 가장 높은 층은 추상적인 형태를 띠는 철학이나 윤리나 문화 같은 것이다. 제도는 인간이 사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물건들이 생산되고 삶이 영위된다. 풍요롭고 정의로운 삶은 그런 것들이 보장되는 길(제도)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제도는 또 철학이나 문화적 지향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이런 식의 길을 내고, 저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저런 식의 길을 낸다.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런 꿈을 꾸는 사람은 저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치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의 생각(철학)이 길을 내고 또 그 길을 따라 물산(物産)의 질과 양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명’은 ‘사람’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결과다. 높은 생각은 높은 문명을 만들고, 낮은 생각은 낮은 문명을 만든다. 앞선 생각은 선진 문명을 만들고, 뒤따라가는 생각은 후진 문명을 만든다. 이런 이유로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라 고 말하는 것이다.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가장 구체적인 물건들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물건 가운데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이 몇 개나 되는가. 거의 없다. 다른 나라에서 누군가가 최초로 만든 것들을 들여와서 살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먼저 생각하거나, 먼저 불편을 느끼고 해소해보려 했거나, 먼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 해보려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물건들은 다 발상이나 불편함이나 문제를 해결한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도도 그렇다. 우리가 사용하는 제도도 대부분 외부에서 온 것들이다. 총체적으로 볼 때, 우리는 ‘따라 하기’의 문명을 살아왔다. 다른 사람이 생각해서 낸 길을 따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물건들을 누리며 산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유롭지도 독립적이지도 주체적이지도 않고 아직까지는 다만 종속적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속적인 문명이 닿을 수 있는 최고의 높이에 도달했다. 중진국 상위 레벨에 이미 도달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중진국을 넘어서 선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계, 즉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주체적인 단계로 넘어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창의가 일어나는 사회를 열 수 있느냐 없느냐 라고 할 수도 있고, 대답하는 기능에 머물지 않고 질문이 감행되는 사회를 이룰 수 있느냐고 할 수도 있고, 전술적인 높이를 넘어 전략적인 단계에 이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고, 분열을 넘어 통합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하게 발휘하였던 시선을 한 단계 더 높이 상승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종속적인 단계의 특징은 스스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해 놓은 생각의 결과나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이념을 수용하고 키우며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산다. 그러므로 나라 전체나 대국을 보기보다는 기준이나 이념의 공유체인 진영을 중심으로 해서 사고하는 습성을 갖는 다. 세계의 진실에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진영의 진실을 세계에 부과하려 애쓴다. 또 기준이 분명하므로 그 기준에 맞으면 참이고 맞지 않으면 거짓이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기준을 중심으로 하는 진위 논쟁에 힘을 쓴다. 또 이 진위는 과학적으로 확인된 진위가 아니라 특정한 가치관에 싸인 정치적인 판단이 하는 진위로서 쉽게 선악이라는 가치판단으로 연결된다. 보통 과학적 판단보다는 정서적인 판단에 빠진다.사회를 움직이는 엔진은 크게 두 개다. 정치와 교육. 사실 우리 정치는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박제되어 있다.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능에 갇힌 것이다. 진영의 정치는 기능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적대적 공생 관계로 유지된다. 기능과 진영의 논리는 분열을 낳는다. 현대 한국 정치의 큰 특징은 누가 뭐래도 ‘배타성’을 위주로 하는 ‘분열’이다. 그러다가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호 아래 “두 국민 국가”라는 침울한 풍경만 남았다. 한국의 정치사를 단순화 해보자. 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는 이승만과 김구의 대결 구도 그대로다. 이승만/김구, 친미/반미, 반북/친북, 보수꼴통/친북좌빨, 박정희/김대중, 국가/민족으로 양분된 대립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아마 이런 대결에는 조선시대 영남학파/기호학파, 이언적/서경덕의 구도가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체결한 FTA에 대해서도 정권이 다른 진영으로 바뀌면 바로 반대로 돌아선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결정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도 정권이 다른 진영으로 넘어가면 격렬한 반대론자로 바뀐다. 미군이 낸 사고에는 격렬한 저항 투쟁을 하지만, 중국 해적에게 우리 해경이 맞아죽어도 그 흔한 데모 한 번이 없다. ‘독립’이라는 높은 시선에서 태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영’이라는 낮은 기능에 갇혀 있기 때문에 유사한 사안에 대해서 미국에 대하는 태도와 중국에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국익’이라는 전략적인 높이가 아니라 ‘진영’의 논리로 문제를 다루면 같은 사안을 놓고도 이 정권에서는 이렇게 행동하고 저 정권에서는 저렇게 행동하는 기능적 태도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정치가 기능에 갇히듯이, 정해진 지식을 지키고 전파하는 지식 기사들은 넘쳐나도 세계를 응시하며 그 시대에 맞는 지적 해결책, 즉 지식을 생산하는 지식인이 귀해졌다. 타도하는 자리에 올라앉으려는 반항아는 많아도, 국가의 명(命)과 틀과 비전을 바꾸는 일에 헌신하는 혁명가는 사라졌다. 반항만 넘치고 혁명은 씨가 말랐다.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일은 ‘명’(命)이 바뀌는 일이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혁명이다. 동일한 단계 내에서 의자 싸움하는 일은 반항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기능적 반항을 넘어서는 혁명 역랑이 있기나 한가. 이제 우리에게는 기능에 갇혀 내뱉는 순결한 사자후가 아니라 전략적 단계로 올라서려는 굵고 거친 발걸음이 필요할 것이다.교육에서 기능인을 양산하기 때문에 정치가 기능적이다. 우리 교육은 내용을 정해놓고 그것을 숙지하는 것으로 이뤄져왔다. 자신 안에서는 숙지해야 하는 내용이 주도권을 갖지 실제 자신은 그 내용들이 들락거리는 통로나 중간 역으로만 존재한다. 자신의 의식이나 사유에서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한다. ‘생각’하는 인재가 아니라 기준을 적용만 하는 ‘판단’ 주체로 길러진다. ‘문제’나 ‘불편함’을 발견한 후, 그것을 해결하려고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정답을 찾는 사람으로만 길러지는 것이다. 독립적 주체가 아니라 종속적 주체다. 이렇게 배양된 인재들은 이미 숙지한 내용을 기준으로 쓰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에 빠지기 쉽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전쟁’이라고 하면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 해서는 안 될 것으로서, 악한 것으로 정해놓고 대화를 시작한다. 내가 미국이나 일본 학생들과의 대화를 통해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전쟁’을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놓지 않고 질문을 했다. 즉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지 등을 묻는 것이다. 전쟁을 피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놓은 문명과 전쟁을 통제하고 제어하며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개방적 태도가 일구는 문명은 크게 차이가 난다. 세계에서 마주치는 대상이나 사건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을 쉽게 하는 인재들은 숙고하고 사고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세계의 진보는 이미 굳건히 자리 잡은 기준이나 가치관으로 하는 ‘판단’에 의존하기보다는 개방적으로 진행되는 ‘사유’에 더 크게 의존한다. ‘판단’에만 빠진 채 ‘사유’ 능력을 기르지 못하면, ‘판단’이 제공할 수 있는 문명만 누리지 ‘사유’하는 능력이 제공하는 더 높은 문명은 누릴 수 없다.새해 첫날, 새해의 희망을 담은 성스러운 기원을 하려고 일출을 보러 온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경포119안전센터 앞, 소방차를 세워야 할 곳에 주차를 해 놓았다. 소방관들이 일일이 전화를 해서 차를 빼는 데에만 40분이 걸렸다 한다. 경포119안전센터 관계자는 “대부분이 해돋이를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계도 차원에서 과태료를 부과하진 않았다”고 한다. 얼마 전 KTX를 타고 가는데, 딸 둘을 데리고 젊은 부부가 나와 같은 칸에 탔다. 딸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내내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였다. 보다 못한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역무원에게 전화 좀 통로로 나가서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역무원은 그냥 지나친 후, 방송으로 기차 안에서의 예절에 대해서 간단히 방송하는 것으로 끝냈다. 여기 두 풍경에서 소방차 세울 자리에 주차를 한 사람들이나 기차 안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편리한 기능을 좇느라 시민으로서의 책임성이나 존엄성을 포기하였다. 이런 부모들 앞에서 어떤 교육이 이뤄지겠는가. 그리고 공적 기관의 책임자들도 당연히 행사해야 할 ‘강제력’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 모두 당시의 불편함이나 정서적 갈등을 피하는 등과 같이 기능적으로 편하려고만 했지, 누구 하나 독립적이고 공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 못하다. 모두 기능에 빠져 있다.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도달했다. 지금 정도의 시민의식, 지금과 같은 인재 배양 방식, 지금과 같은 정치 수준으로 도달할 수 있는 높이로는 여기가 가장 높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할 일은 이미 다 해버린 민족인지 모른다. 이제는 어떤 주장도 어떤 정책도 새롭거나 참신하지 않다. 모두 전에 들어봤던 얘기들이다. 알고 있는 것이나 익숙한 것을 넘어선 “다음”을 말 할 수 있는 것이 지혜다. 이제 우리는 한 층 높은 단계의 지혜로 재무장하여, 이 한계를 돌파하려는 용기가 절실하다. 아인슈타인이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바보는 다른 결과를 기대하면서 같은 방법을 계속 쓰는 사람.”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이 다시 들린다.

기획 | 기고 | 2018-01-10 23:02

유전자로만 본다면 인간과 원숭이 사이에는 약 2%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100분의 2만 다르다. 인간과 동물로 구별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가깝다. 심지어는 아메바와도 차이가 14%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숫자로 본다면 인간과 아메바 사이도 뭐 그리 멀겠는가. 하지만 14%라는 차이만으로도 아메바는 맘먹고 관심을 표하기 전에는 인간에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인간과 원숭이 사이는 더 하다. 겨우 2%다. 그것도 커봐야 그렇다. 사실은 2%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원숭이는 동물원에 갇히고 인간은 유유자적 구경한다. 신분이나 계급적으로는 98% 이상의 차이가 난다. 이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다. 미미한 유전자적 차이를 거대한 신분의 차이로 바꿔버리는 요인은 무엇인가. 문화다.동물이나 식물은 자신의 진보를 전적으로 진화에 의존하지만 인간은 문화에 더 의존한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문화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은 문화적 활동에 철저한 사람이다. 문화(文化)는 글자 그대로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혹은 그려서(文) 변화를 야기(化)하는 일이다. 변화를 야기하는 인간이 더 인간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인간으로는 상급이라는 말이다. 변화를 야기하는 동력을 흔히 창의력이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창의력은 가장 문화적이며 인간적인 활동력이다. 창의력을 통해 인간은 변화를 야기한다. 변화를 야기하려고 시도하는 인간에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주체적이라고 말해준다. 그렇지 않고 누군가 야기해놓은 변화를 수용하거나 답습하기만 하면 종속적이다.그렇다면, 변화를 야기하고 수용하는 일은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어디서 출발하는가. 과거 아프리카의 타조 사냥은 이렇게도 했다고 한다. 타조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쫓는다. 타조와 쫓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유지되는 일정한 간격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존재하게 되는데, 쫓고 쫓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쫓기는 쪽의 긴장감은 커지기만 한다. 타조가 쫓기고 쫓기다가 긴장감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지면 도망가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대가리를 뜨거운 모래땅에 처박는다. 사람들은 그냥 가서 꼼짝 않고 머리를 박고 있는 타조를 잡아오면 되었다. 타조들은 다 그래왔다. 그리고 또 다른 타조들도 그렇게 잡혀죽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그런 집단적으로 속성화 된 습관에 갇혀서 함께 어울리던 타조 가운데 어느 한 타조가 자폐증을 앓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다른 타조들을 따라서 머리를 처박지 않고 무리에서 이탈하여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쫓아오는 사람들을 노려보는 일을 저질렀다. DNA에 박혀 있는 일정한 방향을 지키다가 돌발적으로 선회(旋回)하여 습관적이고 집단적으로 공유하던 방향을 혼자서 바꾼 것이다. 모든 타조들과 공유하던 언어와 문법들에서 이탈하여 친구 하나 없는 곳으로 스스로 던져진다. 세계는 인간에게 항상 무엇인가 반응을 강요한다. 우리 삶은 모두 그 강요에 대한 나름대로의 반응일 뿐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타조고, 타조를 쫓아가는 사람들은 인간에게 반응을 강요하는 세계 전체로 비유된다. 내내 쫓기기만 해왔던 무리에서 이탈한 어떤 한 타조가 뒤를 돌아보고 갑자기 이전에는 있어 본 적이 없는 전혀 다른 반응을 시도했다면, 이것이 바로 새로운 도전이다. 일단 뒤돌아보면 그 이전의 관행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시도될 것이고 그것은 세계에다가 이전에 있어본 적이 없는 어떤 무늬를 그리게 될 것이다. 문화적 활동의 결과를 수용하던 타조가 주도적으로 문화적 활동을 하는 타조로 변했다. 창의적인 타조다.타조가 한 미증유의 창의적 도전은 어디서 출발하는가? 집단적으로 함께 내달리던 정해진 방향에서 급선회하던 바로 그 지점이다. 대가리를 처박도록 길이 잡힌 방향을 향해 앞으로만 달리던 타조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뒤로 돌았다. 전진(前進)하다 역진(逆進)하는 타조는 두 방향을 다 경험하지만, 이 경험의 여정에는 전진과 역진이 교차하는 신비한 지점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여기가 바로 문화적이고 창의적이며 인간적인 활동의 자궁이다. 이 신비한 지점에서는 세계에 내몰리느라 떼를 지어 달리면서 나누던 수없이 많고 부산스러운 말들이 갑자기 끊긴다. 익숙한 모든 행위와 언어가 갑자기 사라지며 정적에 휩싸이는 순간이 있다. 언어의 길이 끊기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지경이며 어떤 문자나 표지판도 더 이상의 쓸모가 사라져버리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상태다. 언어의 길이 끊기는 바로 거기서 새로운 언어가 태어나서 새 길이 난다. 그러니 새 길은 당연히 언어가 끊기던 바로 그 찰나에 뿌리를 둔다. 무너진 표지판 곁에 새 표지판은 아직 서지 않고, 어떤 말도 의미를 담지 못한 미숙의 상태, 어떤 숫자도 얹혀있지 않은 좌표답지 못한 좌표, 방향을 잃은 아둔한 의식, 이것을 우리는 침묵(沈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전진의 문법과 역진의 언어가 사멸과 탄생으로 운명을 달리 하며 서로 등을 대는 바로 그 교차점이다. 여기는 새 언어가 태어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철지난 언어가 사라지는 곳이 아니던가. 언어가 끊긴 곳에서는 유령처럼 침묵만이 태어난다. 모든 방향의 선회는 침묵을 지나간다.건명원(建明苑)을 열어 새 시대를 여는 창의 전사를 양성하고 있다. 역진(逆進)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강한 기운을 갖게 해주고 싶다. 반역의 기운이다. 그런 충동적 기운을 배양할 목적으로 구성된 프로그램 가운데 ‘걷기명상’이 있다. 모든 원생(苑生)들이 함께 5시간 정도를 걷는다. 핵심은 1시간 정도를 빼서 ‘묵언)’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걷는다. ‘침묵’을 지나가보라는 것이다. 뜨거운 모래 바닥에 머리를 처박도록만 훈련된 사람들에게는 함께 어울려 부산스러운 잡담을 나누는 일이 더 익숙하고, ‘침묵’은 큰 곰을 어깨에 앉혀놓고 걷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나 한 번 ‘침묵’을 내면 깊숙한 곳까지 끌고 가 본 사람은 - 전진과 역진 사이의 교차점에 서 본 사람은 - 그 ‘신비한 유령’을 피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법의 양탄자’ 같아서 ‘침묵’을 경험한 그 사람을 새로운 어딘가로 반드시 데려간다. 그 사람은 가는 내내 알 수 없는 힘을 발휘하며 새 길을 낸다. 이것이 침묵의 힘이다. 원래 있었던 것이라도 이제는 더 이상 원래의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재탄생하여 현현한다. 잡담과 부산스러움을 극복하고 원래 있었던 것의 감춰진 진실을 등장시킨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저 멀리 산이 있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 산을 고압선을 놓을 자리로도 보고, 돌을 캘 곳으로도 보고, 산삼을 감추고 있는 곳으로도 보고, 전원주택을 지을 곳으로도 본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산의 진실이 아니다. 그렇게 보는 그 사람의 진실일 뿐이다. 조작된 것이다. 잡다하고 폭력적인 ‘소유’적 발상일 뿐이다. 산의 진실은 고압선이나 돌이나 산삼이나 전원주택으로 보는 시각이 끊긴 곳에서 드러나는 그 무엇일 뿐이다. 그런 잡다한 시각이 끊긴 곳에서 ‘침묵’이 유령처럼 등장한다. 그 침묵의 유령만이 감춰진 산의 진실을 영접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산을 어떤 특정한 소유적 시각으로 제한하지 않고 그저 한마디 할 뿐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의 진실은 우리가 정하지 않고 산이 스스로 드러낸다. 드러나는 그것은 산을 산이게 하는 것으로서 산에만 있는 성스러움이다. 이 성스러움은 침묵의 간이역에만 등장한다. 당연히 침묵은 또 외부의 성스러움을 영접할 수 있는 준비다. 그런데 침묵으로 외부의 성스러움을 받아들여본 사람은 또 자신의 성스러움을 깨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이태리 가서 메디치 가문을 보고 온 부자들이 많다. 메디치 가문에 대해서는 이태리 사람보다도 더 많이 알기도 한다. 세 번을 보고 왔다는 사람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메디치 가문을 보고 이해하는 대열 속에서 계속 경쟁적으로 ‘전진’한다. 그런데 메디치 가문을 세 번이나 보고 와서 그 사람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메디치 가문에 대한 지식이 증가한 것 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메디치 가문을 구경하는 ‘전진’만 있었지 ‘역진’으로 선회할 ‘침묵’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침묵’을 경험하면 ‘역진’으로 선회하여 내가 내 나라에서 할 수 있는 메디치 가문 같은 역할은 무엇일까를 고민한다. 이 반성만이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그가 다시 태어나면서 그가 속한 사회도 비로소 달라진다. ‘전진’하던 사람끼리 공유하는 문법과 언어의 잡다한 수다를 끊고, 스스로 무리에서 이탈하여 고독 속으로 자폐하는 것이다. 그 자폐의 통증을 동력삼아 ‘역진’하여 그는 아직 열리지 않은 새 세상의 문고리를 잡는다. ‘역진’의 기운이 꿈틀대는 ‘침묵’ 속에서 삶이 확장성을 회복한다. 자신의 감춰진 성스러움이 서서히 현현한다. 이제 무엇인가를 그려서 변화를 야기하는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힘은 인간에게는 성스러움 그 자체다. 그러니, 인간은 ‘침묵’의 간이역에서만 성스러워질 수 있다. ‘침묵’은 스스로를 성스럽게 하는 힘이자 외부의 성스러움을 영접하는 장치다.장자는 말한다. “참된 인간(眞人), 즉 무엇인가 그려서 변화를 야기하는 인간, 창의적 인간, 모험하고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은 고요하다. 외부 세계를 소유적 시각으로 제한하지 않으니 어디에 갇혀있는지 알 수가 없다.”(是之謂眞人. 其容寂....與物有宜, 而莫知其極. 『莊子·大宗師』) 참된 인간은 고요하게 침묵을 지나간다. 침묵은 자신의 성스러움을 드러내며, 외부의 성스러움을 영접한다. 여기서 위대함이 자란다. 새 세상을 꿈꾸는 자, 우선 침묵하라.·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기획 | 기고 | 2017-12-05 23:02

몇 마디 말을 나눠보지도 않았지만, 괜히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 많은 말을 나누고도 뭔가 허전한 느낌만 남기는 사람이 있다. 여럿이 모여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마지막 매듭을 짓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꼭 있다. 강의를 듣고 나서 강의 내용을 물고 늘어져 자기 멋대로 다음 이야기를 구성해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의 내용을 기억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듣고 나서 죄다 흘려보내버리는 사람도 있다.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들어도 사람마다 반응은 모두 다르다. 같은 내용에 각자 다른 반응을 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같은 일에 각기 다른 깊이로 반응하는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근거, 즉 그 사람만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일에 분개하면서 정작 자신도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 버리는 일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봉지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서는 사람도 있다. 기차를 탔을 때 전화가 오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로 나가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하무인격으로 앉은 자리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의 글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날을 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묵묵히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밖에서는 민주를 외치지만, 집에 오면 독재자로 변하는 사람도 있다. 책을 읽을 때 질문이 마구 샘솟듯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 내용을 수용하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환경 보존을 외치면서 일회용 컵이나 접시들을 마구 쓰는 사람이 있는 있는가 하면 철저히 자제하는 사람도 있다. 주장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각각이 따로 있는 사람도 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달라지는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근거, 즉 그 사람만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다.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끌고 온 차들 때문에 주변 도로의 교통 상황은 엉망이 된다. 도로 양쪽에 모두 불법주차를 하는 바람에 상당한 거리의 차도가 극심하게 좁혀져서 오가는 데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교회에 나와 모두 이웃 사랑에 관한 설교를 듣고 결심하고 다짐하는 일을 하느라 이웃에 큰 폐를 끼친다. 이웃을 사랑하는 그 다짐과 이웃에 폐를 끼치는 일 사이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제대로 사는 일. 힘들고 불편하다. 쓰레기 함부로 버리는 일을 비판하기는 쉽고, 자신이 직접 그것들을 줍는 일은 힘들다. 이웃은 아랑곳하지 않고 편리를 위해 차를 끌고 오는 것은 쉽고,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오면 불편하다. 이웃 사랑을 말하기는 쉽다. 그것을 실천하려면 반드시 일정 분량의 불편과 노고를 감당해야 한다. 일회용 물건을 쓰기는 쉽고, 그것들을 안 쓰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컵을 가지고 다니는 등의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기능적인 일은 쉽다. 사람의 본바탕이 작동하는 일은 어렵고 불편하다. 대답은 기능적 활동이고 질문은 그 사람에게만 있는 내면의 호기심이 발동하는 일이라 인격적 활동에 속한다. 당연히 질문은 어렵고 대답은 쉽다. ‘따라 하기’는 쉽고 창의가 어려운 이치다. 우리는 쉬운 쪽으로 쉽게 기울게 되어 있어 질적인 상승이 더디다. 그래서 제대로 사는 일은 언제나 어렵기만 하다. 간단히 정리하면, 인간으로서 제대로 사는 일은 스스로 불편을 자초하는 일과 같기도 하다. 불편의 최고 단계인 ‘장애’의 지경으로까지 끌고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다양한 수행의 모든 과정은 사실 ‘불편’한 것들로 짜여 있다. ‘장애’를 내면화하여 그것과 일치되는 경험을 유도한다. 불편과 장애와 한 몸이 되는 단계에서 인간의 본바탕이 구출되곤 한다. 편하고 자극적인 기능에 갇히지 않고 ‘장애’의 상태를 자초하면서 성숙은 시작된다.아주 오래전 중국 노(魯)나라에 형벌을 받아 발 하나를 잘린 왕태(王?)라는 사람이 있었다. 덕망이 높아서 따르는 제자가 공자만큼이나 많을 정도였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상계(常季)가 공자에게 묻는다. “왕태는 외발이 장애자입니다. 그런데도 따르는 제자 수가 선생님만큼이나 많습니다. 그는 가르치는 것도 없고 토론도 하지 않는데, 빈 마음으로 찾아갔다가 무언가를 가득 얻고 돌아간다고들 합니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가 답한다. “그분은 성인이시다. 나도 찾아뵈려했지만 꾸물대다가 아직 뵙지 못했을 뿐이다. 나도 그분을 스승으로 삼으려 하는데, 나만 못한 사람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느냐. 노나라 사람뿐이 아니라 온 천하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가서 그를 따르려 한다.” 장애인인데도 모두 그를 따르려 한다면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진 것인지를 상계가 묻자 공자는 ‘근본’을 지키고 있다고 말해준다. 왕태는 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본마음을 터득한 것이다. 이에 상계가 또 묻는다. “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본마음을 터득했을 뿐인데 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지요?” 그러자 공자가 답한다. “사람은 흐르는 물을 거울삼지 않고 잔잔하게 가라앉은 물을 거울삼는다. 올바른 본심은 뭇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장자·덕충부』) 도가에서는 이런 본마음, 즉 존재의 근본 상태를 ‘덕’(德)이라고 표현한다. 덕이 있는 사람은 타인을 압도하는 힘을 갖는다. 타인들은 이 사람을 추종하고 싶어 한다. 중후함이 경박함을 흡수하는 이치다.기능적인 활동에 갇힌 사람은 편한 것을 추구하며 가벼운 잡담과 비교 욕망에 빠져서 자신의 본바탕을 놓치고 가볍게 흔들린다. 하이데거는 이런 상태를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고 말한다. 가벼운 기능과 비교와 잡담에 빠져 인간으로서 가져야하는 성스러운 어떤 본바탕을 상실하였다고 비판한 것이다. ‘장애’의 상태를 자초하여 불편을 감수하면서 ‘덕’이라고 불리는 본바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을 키우는 일이다. 이 ‘덕’의 유지가 바로 인간을 기능적 활동에서 벗어나 본래적인 인간으로 서게 만든다. 기차 안에서도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는 기능에 빠지지 않고 인간으로서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통로로 걸어 나가는 불편을 감수한다. 교회에 갈 때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차를 몰고 가지 않는 불편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아는 것에 매몰되지 않고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불편한 몸부림을 친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질량이 커지고 또 커져서 다른 가벼운 것들을 제압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매력이고, 존경을 유발하는 요소다. 장애인 왕태가 존경을 받고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이유다.또 아주 오래 전 중국 고대의 위(衛)나라에 애태타(哀??)라는 추남이 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지낸 남자들은 그 곁에서 떠나지 않으려 하고, 그를 본 여자들은 다른 이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그의 첩이 되겠다고 한다. 그는 자기 의견을 내 세우지도 않고 늘 다른 이에게 동조할 뿐이었다. 군주의 자리에 있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준 것도 아니고, 쌓아둔 재산으로 남의 배를 채워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흉한 몰골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다. 지식도 사방 먼 곳까지 미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남녀가 그를 따르려 모여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장자는 이것을 온전한 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드러나게 하지 않는[德不形] 깊은 내공 때문이라고 한다.(『장자·덕충부』) ‘덕’을 갖추고 있음에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비유하여 말하면 물이 잔잔하게 멈추어 수평을 이룬 상태다. 안에 깊은 고요를 간직하고 출렁이지 않는다. 덕이 출렁출렁하게 드러나지 않을 정도가 되면 사람들은 거기에 이끌려 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외적으로 출렁이는 모습은 기능에 갇혀 경박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말한다. 쓰레기를 버린다는 비판을 하면서도 자신 역시 버리는 이중적 가벼움 같은 것이다. 아는 것을 지키기만 하지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는 지적 부지런함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눈앞의 편리함을 위해 공공의 책임감을 포기하거나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경박함이다. 이런 경박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감당하며 인간으로서 품격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가 덕이 있는 자다. 여기서 매력과 존경이 생길 뿐 아니라 비범하고 특별하며 위대한 일들도 덩달아 일어난다.하이데거의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는 문장에서 ‘존재’는 바로 존재자의 고향이자 ‘덕’이 활동하는 곳이다. 가볍고 번잡한 기능들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비밀스런 곳이자 일상 속의 다양한 이중성 속에서 인간으로서 더 나은 선택을 하는 힘이 드러나는 곳이다. 창의적이고 비범하며 특별한 일들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래서 ‘존재’, 즉 ‘덕’의 활동은 성스러운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사는 사람을 우리는 인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 즉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왕태나 애태타는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잘 지킨 사람들이다. ‘불편’, 심지어는 ‘장애’적 상황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감수한 사람들이다. 경박하지 않고 성스러운 삶은 스스로 ‘불편’과 ‘장애’를 자초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시민으로 사는 일도 마찬가지다. 불편을 자초하며 경박함을 벗어나면서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을 우리는 시민의식이라 하지만, 사실은 인간으로서의 성스러움을 지키려는 태도다. 성스러운 삶은 불편을 감수하거나 자초한다.

기획 | 기고 | 2017-11-07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