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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의 노장적 생각 (4건)

장자라는 중국 고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한테는 바다에 대해서 말해줘도 소용없다. 그 이유는 그가 우물이라는 좁은 세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여름벌레한테는 얼음을 말해줄 수 없다. 여름이라는 시간만 살다가기 때문이다. 함량이 작은 사람에게 도(道)를 말해봐야 아무 소 용없는 것은 그가 자신만의 좁다란 진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인간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 체계나 시간적 경험 혹은 공간적 제약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대개는 자신의 믿음 체계나 시공간적 제약으로 빚어진 함량만큼만 살다가는 것이다. 일반적인 소시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학자나 종교인이나 정치인 등을 망라하여 누구나 그러하기 쉽다. 그래서 철없는 어른도 있고, 신도들의 이해 안에서 겨우 연명해나갈 수밖에 없게 된 성직자도 있으며, 제자들의 아량에 기대 살게 되는 교수도 있고, 시대의 버림을 받게 된 큰 정치인이 생기는 것이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한테는 자기가 사는 우물이 자기 경험과 인식의 전체다. 그런데 인간은 개구리와 다르다. 진화를 선택한 동물과 달리 인간은 문화를 선택하였다. 문화는 진화에 비해 시공간적 또는 질적이고 양적인 면에서 모두 확장성이 훨씬 더 크다. 진화는 ‘필요’가 만들지만, 문화는 지금 당장 필요치 않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무모함에 기대는 바가 크다. 인식의 범위 밖으로 나가 보려는 무모한 상상력이 문화의 핵심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을 자신의 전 세계로 알고 살다 가지만, 인간은 가본 적도 없는 자신의 우물 밖을 꿈꾸는 것이다. 결국 무모한 꿈을 꾼 한 사람에 의해 인간은 우물 밖의 세계를 자신의 영토로 갖는다. 당연히 문화의 확장성은 한계 밖을 향해 무모하게 덤비는 상상력이 결정한다. 상상력 즉 자신의 제한성을 넘어서려는 무모함이 있으면 문화적 활동을 크게 할 수 있고, 그것이 없으면 문화적 활동을 작은 테두리에서 따라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의 크기가 큰 문명을 살 것인지 아니면 작은 문명을 살 것인지를 결정한다. 결국 상상력은 익숙함에 갇히지 않고 생경한 곳으로 나를 끌고 가서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한다.문제는 이 제한성을 넘어서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작은 문명은 일정한 파라다임 안에서는 계속 작게 유지되고, 큰 문명은 일정한 파라다임 안에서는 계속 크게 유지된다. 후진국 형 국가에서는 후진국 형 일이 일어나고, 선진국 형 국가에서는 선진국 형의 일이 일어난다. 우리나라에 후진국 형 재난이 끊이질 않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다. 후진국적 제한성 혹은 후진국적 시선을 극복하고 한 단계 더 높고 큰 시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단계에서나 시선의 제한성에 갇혀 있으면, 다시 말해 익숙한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 단계를 세계 전체로 여기며 살 수 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을 비판적인 언사로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하는 것이다.더 단순화해서 말하면 우물 안 개구리 형 인간은 자신만의 익숙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간이다.우물 안에서 우물 밖을 꿈꾸는 상상력이 발동될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지적 활동이 바로 ‘질문’이다. 반면에, 자신이 머무는 우물 안으로만 시선이 향해 있을 때 작동되는 지적 활동이 ‘대답’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는 ‘대답’의 기능으로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이미 도달해버렸기 때문에, 그 다음을 노려야 하는데, 계속 우물 안에만 머물려 하거나 우물 안에 머물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대답’하던 습관을 ‘질문’하는 습관으로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다. 우물 안 개구리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우물 밖을 향해 튀어나가는 도전을 할 것이냐 하는 점이라고 말해도 되겠다.대답이란 무엇인가. 이미 있는 지식과 이론을 그대로 먹은 후, 누가 요구할 때 토해내는 것이다. 이때 승부는 누가 더 빨리 뱉어내는가, 누가 더 많이 뱉어내는가, 누가 더 원래 모양 그대로 뱉어내는가에 따라 갈린다. 여기서 인간의 성장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원래 모양’그대로 뱉어내는 일이다. 대답이라는 기능을 하면 할수록 자기도 모르게 ‘원래 모양’을 중시하고 거기에 집착한다. 그런데 ‘원래 모양’을 시제로 따져보면, 그것은 미래적이라기보다는 과거적이다. 그래서 ‘원래 모양’을 중시하는 데 익숙해지면 과거를 따지는 일을 중시하게 되고 과거를 분명히 하는 일을 제대로 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이 채우는 사회의 논쟁은 거의 대부분이 과거 논쟁으로 흘러 버린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선적인 사명은 과거를 지키고 밝히거나 과거의 횃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데에 있지 미래를 여는 일에 있지 않다. 오히려 미래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우선 분명히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를 내버려 두고 뜬구름이나 잡으려 하는 사람으로 치부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가까이에 있는 현실의 기능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집중하지,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꿈을 꾸거나 비전을 세우는 일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비전이나 꿈을 현실성 없는 한가한 소리로 치부하기 쉽다. 그래서 일상에서도 고등학생들에게 꿈을 꾸는 일보다 우선은 대학 합격이 더 중요하니, 꿈은 대학에 가서나 꾸라고 말해주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청춘들은 점점 고갈되어 간다. 나라도 마찬가지다.또 ‘원래 모양’은 바탕이나 근거가 되거나 모범적인 모습을 표현하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기준으로 사용하는데, 기준이라는 것은 언제나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기준이 없이 구분은 일어나지 않고, 구분을 하지 않는 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 구분 가운데 가장 분명한 것은 시비와 선악의 기준이다. 자기가 가진 기준에 맞으면 옳거나 선이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르거나 악이 된다. 이런 연유로 ‘원래 모양’을 중시하는 ‘대답’이라는 기능을 잘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은 진위나 선악을 따지는 일에 쉽게 빠진다. 그러다가 결국은 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 옳고 그름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사용하고, 선과 악의 윤리적 기준을 적용하는 것을 철저한 삶의 모습으로 믿게 된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로 채워진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논쟁이 진위 논쟁이나 선악 논쟁으로 빠진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위나 선악을 넘어서거나 혹은 비켜서서 새로운 길을 내려는 사람들은 종종 사이비나 회색분자 혹은 변절자로 취급되어 가혹한 냉대를 당하고 배척된다. 변절이나 변화나 제3의 길은 회색분자의 길로 치부되기 때문에 이런 사회에서는 종종 기준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뭉치게 된다. 바로 진영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제 모든 활동이나 논의는 진영의 논리로 귀결된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리는 진영에 있지 세계에 있지 않다. 나에게도 있지 않다. 나는 진리의 입법자가 아니라 진영의 진리를 대행하는 대리인으로만 존재한다. 능동적이거나 독립적인 주체가 아니라 바로 종속적 주체로 전락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종속성을 스스로는 의식하지도 못하고, 또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평생 종속성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종속성은 종속성 그 자체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종속성으로 채워진 주체들이나 또 그런 주체들이 이루는 사회나 국가가 종속성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큰 불행이다. 한 번 종속성에 갇히면 종속성을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운명 앞에 던져져 버리는 것, 이것이 비극인 것이다. 그래서 진영에 갇힌 사람은 대부분이 근본주의자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다 근본주의자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을 넘보는 무모함 자체를 죄악시 할 수 있다. 우물 안은 이미 진영이 되었고, 그 진영을 벗어나는 일은 옳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다. 진영에서 공유한 논리와 맞지 않은 것은 다 나쁘고 악하다. 그래서 모든 일들은 진영 안에서만 유효하다. 변화도 진영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당연히 작은 변화에 만족하고 큰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다. 우물의 왼쪽에 있다가 오른 쪽으로 옮기고 또 오른 쪽에 있다가 왼쪽으로 옮기는 것을 큰 변화나 생명력으로 착각한다. 왼쪽과 오른쪽을 바꾸는 것을 스스로는 새 세상을 연 것으로 착각한다. 이 착각은 자신도 우물 속에 가두고 사회도 우물을 벗어날 수 없게 붙잡는다. 그래서 한 번도 미래를 실현하지 못하고 평생 과거만을 살다간다. 전술적 차원에만 머물다 전략적 차원으로 건너가지 못한다.우물 안에서 볼 때 우물 밖은 다른 곳이거나 없는 곳이거나 불가능한 곳이거나 위험한 곳이다. 상상력은 다른 곳을 꿈꾸는 무모한 행사다. 다른 곳을 적대시하지 않는 포용력이 없이는 우물 안 개구리의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우물 안에서 왼쪽 오른 쪽은 ‘다른 곳’이 아니라 ‘같은 곳’이다. 우물 안에서 왼쪽과 오른 쪽을 바꾸는 것은 변화가 아니다. 조삼모사일 뿐이다. ‘대답’으로만 훈련된 사람들끼리 하는 진영의 교체를 우물 밖으로 나간 것이라고 우기거나 새로운 우물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 진영의 교체를 새 세상으로 착각하면 착각할수록 넓은 세상의 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물 안의 한 쪽만 지키다가 속절없이 작아진다. 그래도 말할 것이다. 작아진 것이 패배가 아니라, 진정한 승리라고 말이다. 이런 우물 안 개구리들을 중국의 루쉰(魯迅)은 ‘아큐’(阿Q)라고 하면서 중국인의 종속성을 비판하고, 중국이 우물 안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과거에 갇힌 우물 안의 중국에서 왼쪽 오른쪽의 교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중국’을 꿈꿨던 것이다. 아직 ‘아큐’(阿Q)의 속성을 탈각하지 못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만 해 왔던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기획 | 기고 | 2018-02-13 23:02

한사람의 삶은 전적으로 그 사람이 가진 시선의 높이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선의 높이까지만 살다간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문명은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된다. 가장 아래층은 구체적인 물건들로 채워진다. 둘째 층은 구체와 추상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제도다. 가장 높은 층은 추상적인 형태를 띠는 철학이나 윤리나 문화 같은 것이다. 제도는 인간이 사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물건들이 생산되고 삶이 영위된다. 풍요롭고 정의로운 삶은 그런 것들이 보장되는 길(제도)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제도는 또 철학이나 문화적 지향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이런 식의 길을 내고, 저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저런 식의 길을 낸다.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런 꿈을 꾸는 사람은 저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치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의 생각(철학)이 길을 내고 또 그 길을 따라 물산(物産)의 질과 양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명’은 ‘사람’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결과다. 높은 생각은 높은 문명을 만들고, 낮은 생각은 낮은 문명을 만든다. 앞선 생각은 선진 문명을 만들고, 뒤따라가는 생각은 후진 문명을 만든다. 이런 이유로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라 고 말하는 것이다.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가장 구체적인 물건들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물건 가운데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이 몇 개나 되는가. 거의 없다. 다른 나라에서 누군가가 최초로 만든 것들을 들여와서 살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먼저 생각하거나, 먼저 불편을 느끼고 해소해보려 했거나, 먼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 해보려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물건들은 다 발상이나 불편함이나 문제를 해결한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도도 그렇다. 우리가 사용하는 제도도 대부분 외부에서 온 것들이다. 총체적으로 볼 때, 우리는 ‘따라 하기’의 문명을 살아왔다. 다른 사람이 생각해서 낸 길을 따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물건들을 누리며 산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유롭지도 독립적이지도 주체적이지도 않고 아직까지는 다만 종속적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속적인 문명이 닿을 수 있는 최고의 높이에 도달했다. 중진국 상위 레벨에 이미 도달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중진국을 넘어서 선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계, 즉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주체적인 단계로 넘어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창의가 일어나는 사회를 열 수 있느냐 없느냐 라고 할 수도 있고, 대답하는 기능에 머물지 않고 질문이 감행되는 사회를 이룰 수 있느냐고 할 수도 있고, 전술적인 높이를 넘어 전략적인 단계에 이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고, 분열을 넘어 통합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하게 발휘하였던 시선을 한 단계 더 높이 상승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종속적인 단계의 특징은 스스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해 놓은 생각의 결과나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이념을 수용하고 키우며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산다. 그러므로 나라 전체나 대국을 보기보다는 기준이나 이념의 공유체인 진영을 중심으로 해서 사고하는 습성을 갖는 다. 세계의 진실에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진영의 진실을 세계에 부과하려 애쓴다. 또 기준이 분명하므로 그 기준에 맞으면 참이고 맞지 않으면 거짓이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기준을 중심으로 하는 진위 논쟁에 힘을 쓴다. 또 이 진위는 과학적으로 확인된 진위가 아니라 특정한 가치관에 싸인 정치적인 판단이 하는 진위로서 쉽게 선악이라는 가치판단으로 연결된다. 보통 과학적 판단보다는 정서적인 판단에 빠진다.사회를 움직이는 엔진은 크게 두 개다. 정치와 교육. 사실 우리 정치는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박제되어 있다.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능에 갇힌 것이다. 진영의 정치는 기능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적대적 공생 관계로 유지된다. 기능과 진영의 논리는 분열을 낳는다. 현대 한국 정치의 큰 특징은 누가 뭐래도 ‘배타성’을 위주로 하는 ‘분열’이다. 그러다가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호 아래 “두 국민 국가”라는 침울한 풍경만 남았다. 한국의 정치사를 단순화 해보자. 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는 이승만과 김구의 대결 구도 그대로다. 이승만/김구, 친미/반미, 반북/친북, 보수꼴통/친북좌빨, 박정희/김대중, 국가/민족으로 양분된 대립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아마 이런 대결에는 조선시대 영남학파/기호학파, 이언적/서경덕의 구도가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체결한 FTA에 대해서도 정권이 다른 진영으로 바뀌면 바로 반대로 돌아선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결정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도 정권이 다른 진영으로 넘어가면 격렬한 반대론자로 바뀐다. 미군이 낸 사고에는 격렬한 저항 투쟁을 하지만, 중국 해적에게 우리 해경이 맞아죽어도 그 흔한 데모 한 번이 없다. ‘독립’이라는 높은 시선에서 태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영’이라는 낮은 기능에 갇혀 있기 때문에 유사한 사안에 대해서 미국에 대하는 태도와 중국에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국익’이라는 전략적인 높이가 아니라 ‘진영’의 논리로 문제를 다루면 같은 사안을 놓고도 이 정권에서는 이렇게 행동하고 저 정권에서는 저렇게 행동하는 기능적 태도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정치가 기능에 갇히듯이, 정해진 지식을 지키고 전파하는 지식 기사들은 넘쳐나도 세계를 응시하며 그 시대에 맞는 지적 해결책, 즉 지식을 생산하는 지식인이 귀해졌다. 타도하는 자리에 올라앉으려는 반항아는 많아도, 국가의 명(命)과 틀과 비전을 바꾸는 일에 헌신하는 혁명가는 사라졌다. 반항만 넘치고 혁명은 씨가 말랐다.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일은 ‘명’(命)이 바뀌는 일이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혁명이다. 동일한 단계 내에서 의자 싸움하는 일은 반항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기능적 반항을 넘어서는 혁명 역랑이 있기나 한가. 이제 우리에게는 기능에 갇혀 내뱉는 순결한 사자후가 아니라 전략적 단계로 올라서려는 굵고 거친 발걸음이 필요할 것이다.교육에서 기능인을 양산하기 때문에 정치가 기능적이다. 우리 교육은 내용을 정해놓고 그것을 숙지하는 것으로 이뤄져왔다. 자신 안에서는 숙지해야 하는 내용이 주도권을 갖지 실제 자신은 그 내용들이 들락거리는 통로나 중간 역으로만 존재한다. 자신의 의식이나 사유에서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한다. ‘생각’하는 인재가 아니라 기준을 적용만 하는 ‘판단’ 주체로 길러진다. ‘문제’나 ‘불편함’을 발견한 후, 그것을 해결하려고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정답을 찾는 사람으로만 길러지는 것이다. 독립적 주체가 아니라 종속적 주체다. 이렇게 배양된 인재들은 이미 숙지한 내용을 기준으로 쓰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에 빠지기 쉽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전쟁’이라고 하면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 해서는 안 될 것으로서, 악한 것으로 정해놓고 대화를 시작한다. 내가 미국이나 일본 학생들과의 대화를 통해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전쟁’을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놓지 않고 질문을 했다. 즉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지 등을 묻는 것이다. 전쟁을 피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놓은 문명과 전쟁을 통제하고 제어하며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개방적 태도가 일구는 문명은 크게 차이가 난다. 세계에서 마주치는 대상이나 사건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을 쉽게 하는 인재들은 숙고하고 사고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세계의 진보는 이미 굳건히 자리 잡은 기준이나 가치관으로 하는 ‘판단’에 의존하기보다는 개방적으로 진행되는 ‘사유’에 더 크게 의존한다. ‘판단’에만 빠진 채 ‘사유’ 능력을 기르지 못하면, ‘판단’이 제공할 수 있는 문명만 누리지 ‘사유’하는 능력이 제공하는 더 높은 문명은 누릴 수 없다.새해 첫날, 새해의 희망을 담은 성스러운 기원을 하려고 일출을 보러 온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경포119안전센터 앞, 소방차를 세워야 할 곳에 주차를 해 놓았다. 소방관들이 일일이 전화를 해서 차를 빼는 데에만 40분이 걸렸다 한다. 경포119안전센터 관계자는 “대부분이 해돋이를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계도 차원에서 과태료를 부과하진 않았다”고 한다. 얼마 전 KTX를 타고 가는데, 딸 둘을 데리고 젊은 부부가 나와 같은 칸에 탔다. 딸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내내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였다. 보다 못한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역무원에게 전화 좀 통로로 나가서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역무원은 그냥 지나친 후, 방송으로 기차 안에서의 예절에 대해서 간단히 방송하는 것으로 끝냈다. 여기 두 풍경에서 소방차 세울 자리에 주차를 한 사람들이나 기차 안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편리한 기능을 좇느라 시민으로서의 책임성이나 존엄성을 포기하였다. 이런 부모들 앞에서 어떤 교육이 이뤄지겠는가. 그리고 공적 기관의 책임자들도 당연히 행사해야 할 ‘강제력’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 모두 당시의 불편함이나 정서적 갈등을 피하는 등과 같이 기능적으로 편하려고만 했지, 누구 하나 독립적이고 공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 못하다. 모두 기능에 빠져 있다.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도달했다. 지금 정도의 시민의식, 지금과 같은 인재 배양 방식, 지금과 같은 정치 수준으로 도달할 수 있는 높이로는 여기가 가장 높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할 일은 이미 다 해버린 민족인지 모른다. 이제는 어떤 주장도 어떤 정책도 새롭거나 참신하지 않다. 모두 전에 들어봤던 얘기들이다. 알고 있는 것이나 익숙한 것을 넘어선 “다음”을 말 할 수 있는 것이 지혜다. 이제 우리는 한 층 높은 단계의 지혜로 재무장하여, 이 한계를 돌파하려는 용기가 절실하다. 아인슈타인이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바보는 다른 결과를 기대하면서 같은 방법을 계속 쓰는 사람.”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이 다시 들린다.

기획 | 기고 | 2018-01-10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