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18-09-22 16:50 (토)
청춘예찬 (451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인 부끄러움을 모르거나 기꺼이 포기한 괴물 같은 1%들 때문에 나머지 99%가 유례없는 국가적 수치심을 느끼는 요즘이다. 이토록 비정상적인 1%가 어떻게 한국사회를 이끄는 리더 집단이 되었을까. 1%의 사람들에 대한 99%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99%의 사람들은 1%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먹고사는데 급급해서호스텔 운영이라는 개인사업을 하면서 필자의 삶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생겼다. 첫째, 시간 통제가 잘 안 된다. 게스트가 이용한 객실 침대 시트를 교체하고 다양한 커피 메뉴를 익히고 매월 한 차례씩 진행하는 강연회를 준비하다 보면 그새 한 주가 지나가 버린다. 정신없는 일상이 정신없는 국가 상황을 압도한다. 둘째, 한 주에 한권씩 책을 읽던 습관도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책은 정기적으로 계속 구매하지만 반절 읽기도 전에 새로운 한 주를 맞는다. 이런 삶이 계속되다 보면 누가 어떤 정치를 하든지 사회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내 삶에 큰 영향이 없을 거 같은 착각마저도 든다. 무엇이 오랜 시간 지켜졌던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는지 진중하게 이유를 찾아 봤다. 먹고 사는 일이 이유였다. 먹고 사는 일이 일상에서 너무 비중이 커진 게 문제였던 것이다. 필자만 그런 게 아니라 대다수의 99%도 마찬가지다. 일이 좋아서 많이 하는 게 아니라 많이 해도 먹고 사는 일이 잘 해결이 안 된다. 공자는 인간은 배가 따뜻해야 인과 예를 안다고 했다.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되지 않은 이들에게 정치니 도덕이니 당파니 연대니 별 의미 없다. 경제적 가난은 생각의 가난으로 또 행동의 가난으로 이어져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적극 나설 수 없게 하는 큰 요인이다. 실마리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다시 교육이다. 아니 어쩌면 역사상 교육이 필요한 제일 중요한 시기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과는 다른 교육이어야 한다. 고작 1%만 획득하는 대학간판을 위해 99%가 고유의 적성과 능력을 포기해야 하는 교육이 아니다.먼저 금융교육이 필요 하다. 한국사회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혹은 의도적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99%에 대한 금융교육에 인색하다. 자본주의에 살게 하면서 ‘자본’에 대한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단지 열심히 살아 노동과 시간을 맞바꾸는 일만을 가르친다. 그런데 어디 부를 독점하는 1%가 99% 보다 더 열심히 노동해서 돈을 축적하는가? 99%가 먹고 사는 일에서 해방되지 못 하는 건 개인의 역량보다 교육 시스템의 구조 문제일 가능성이 더 크다. 금융·인문 교육에서 해결책을여기에 인문교육이 더해졌으면 좋겠다. 인문학이나 인문정신을 뜻하는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말은 로마에서 가장 위대한 연설가로 꼽히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만든 말이다. 키케로에 의하면 인문정신이란 공적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점잖고 충실한 사적 삶을 영위한 덕성이다. 공공영역에 적극 참여라는 공동체 구성원으로 건강한 시민의식을 갖추게 할 인문교육은 우리에게 왜 진행되지 않을까. 비판과 의심이 아닌 체제 순응에 맞춰진 교육에 너무도 오랜 시간 습성화 돼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회가 됐다. 짧게는 고교 3년, 길게는 초등학교부터 12년. 거기에 또 대학 4년. 길어도 너무 긴 교육과정 시간 동안 제대로 된 금융교육과 철학을 비롯한 인문교육이 한국 사회에만 없다는 건 정말 우연일까? 이러한 교육제도는 누가 만들고 있는가. 1%인가 99%인가.

오피니언 | 기고 | 2016-11-21 23:02

정확히 10년 전, 수능을 앞두고 대학 캠퍼스 생활과 이십대의 앞날을 그리던 시기.많은 친구들이 ‘인서울’을 목표로 열을 내던 날들이 있었다. 학창시절 제일가는 성공의 척도이자 우열을 가리던 의미의 그 말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을 뜻하기도 했다. 어떤 이에게는 학업에 대한 순수한 열망이었고, 또 어떤 이에게는 졸업 후 취업 성공에 한 발짝 다가가려는 선점과도 같은 걸음이었다. 하지만 아마 대부분은 십대의 불완전한 자유 속에서 벗어난 온전한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으리라. 지역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사람들. 그리고 젊음의 청춘들. 그곳을 향하는 저마다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청년과 농업 상생할 수 없을까사실 도내 청년 인구는 서울뿐 아니라 타 지역으로의 인구유출이 심각한 수준이다. 물론 전주만 그런 것은 아니고 타 지역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전주를 떠나는 청춘들은 곧, 지역을 떠나는 청춘들, 그리고 서울을 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확대할 수 있다. 차고 넘치는 곳임을 알고도 청춘들은 서울로 간다. 지역을 떠나 많은 청춘들이 중앙과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청년들이 그들의 지역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취업’이다. 특히 전북은 이렇다 할 대기업이 없는 열악한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북에서 청년 인구가 증가한 곳은 완주군이 유일한데, 이는 현대자동차나 KCC와 같은 대기업이 완주산단에 밀집돼있고, 혁신도시 조성으로 인한 인구 유입 때문일 것이다. 완주군을 제외한 도내 시군의 청년층의 인구유출은 꽤 심각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대기업 유치만이 지역의 청춘들의 발목을 잡아 둘 유일한 방법일까. 그렇지는 않다. 대기업으로 취업할 수 있는 청년의 수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것 이외의 다양한 분야에서의 일자리 창출이 이뤄져야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지역색’을 띠어도 무방하다고 보는데, 농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도내 현실을 반영한다면 청년과 농업이 함께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또한 기업이 일하기 좋은 전라북도에서 나아가 청년에게 젊음의 열정을 꿈꿀 수 있는 기회의 지역이 되어야 한다. 청년 창업이나, 청년 일자리 창출에 쏟는 재정과 시간적 호흡을 길게 가질 필요가 있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하는 숙제처럼 이루어지는 지원은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누가 그러고 싶겠냐만은 망하기 위해 창업하는 식의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야 한다. 또한 청년문제가 일자리 창출에 한정짓는 것이 아니라 문화, 복지차원에서도 탄탄히 이루어져야 한다. 벌어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건강한 시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역이 탄탄해야 건강한 나라얼마 전 필자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지역에서 성공하는 청년 예술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는데, 왜 꼭 지역인가?’ 나는 대답했다. ‘모두가 중앙을 향하는 시대, 조금 외진 곳이라도 삶의 터전에서 인정받고 꾸준히 활동하는 것. 그 자체로도 아직 칭찬받을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을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지역이 탄탄해야 전체가 건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고, 나는 지역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건강한 청년 예술인의 본보기가 되고 싶다.’ 나의 대답이 허황된 말뿐이 되지 않기 위해, 청년들 적극적인 자세와 사회의 협조적 구조가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오피니언 | 기고 | 2016-10-17 23:02

얼마 전 필자는 소리극 ‘시대를 노래하다’ 〈삼포가〉를 발표했다. 많은 이들이 제목 속에서 소설 ‘삼포로 가는 길’을 떠올렸다. 소설과는 전혀 무관한 내용의 〈삼포가〉는 청춘의 자화상과도 같다. 포기하며 사는 세대, 즉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판소리극이다. 젊은이들은 무엇에 행복을 느낄까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삼포세대’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에 인간관계와 집을 포기한 ‘오포세대’,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청춘의 모습을 ‘칠포세대’라고 한다. 신조어로 연애, 결혼, 출산, 취업, 주택, 인간관계, 희망, 건강, 학업, 노후, 이미지, 양심, 종교, 정치, 애국까지 포기한 ‘15포세대’ 까지 등장했다. 시대를 이야기하고 싶었고, 또 기록하고 싶었다. 역사적으로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그러하듯, 시대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두려움을 갖지 않고 시대를 비판할 수 있는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그러자니 내가 살고 있는 세대의 문화를 바라보는 객관적 시선이 필요했다. 과연 청춘은 무얼 얻고 또 무엇을 포기하며 사는가?작년 봄 쯤 책을 하나 읽었다. 〈절망의 나라 행복한 젊은이들〉 일본의 사회학자 후루이시 노리토치의 작품으로 20대 젊은이들이 겪는 일본 사회와 사토리 세대라 일컬어 지는 청춘의 모습을 담은 책이었다. 열악한 환경과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젊은이들은 행복하다 말하고 있다. 뭔가 모순적이면서도 아이러니한 제목에서 우리도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일본은 우리나라의 사회적 문제와 흡사한 면들을 미리 겪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모습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경제적 장기침체를 겪는 일본은 정규직 취업이 힘들고 계약직과 파견직이 태반이다. 그것마저도 힘들어 파트타임이나 편의점 알바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가난을 모르고 사는 청춘들 또한 허다하다, 고도의 경제성장을 경험한 부모님 아래서 소위 ‘캥거루족’이라 일컫는 삶을 살아간다. 아마 그들은 지금의 50~60대 부모를 자신들이 봉양해야 하는 10여년 후쯤에야 더 큰 경제적 어려움이 다가올 것이다. 우리나라 현재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모습이기도 하다.그 후 우리는 무엇을 포기하며 무엇에 행복을 느끼는가 궁금해졌다. 미래가 보이지는 않는 사회에서 그들은 꿈을 잃었을까? 혹은 현재 자신이 살아가는 지점에서 만족하는 것들이 주는 안이함에 익숙해졌을까? 아마 거시적 관점에서의 행복감은 아님이 분명하다. 당장 마실 수 있는 맥주 한 캔에 행복을 찾는 미시적 관점의 만족감이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그것이 삶의 행복지수로 이어졌으리라. 가진 것에 만족하고, 현실에 수긍하며 사는 삶에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젊은이들에게 그야말로 ‘미래’가 사라졌다. 작가가 말한 ‘끝나지 않은 일상’만 남았을 뿐이다. 전적으로 동감했다. 꿈을 잃었고, 하고 싶은 꿈보단 해야 하는 일에 길들여진 우리의 모습이었다. 한참 열렬히 반항적이고, 사회 모순에 저항하던 옛 청춘의 모습은 희미해졌다. 좁은 취업의 길속에서 기득권의 입맛대로 깎아지고 훈련되어진 젊은이들. 기성세대와 사회가 원하는 보기에 알맞은 순종적 청춘의 모습으로 선명해졌다.미래가 안 보인다고 꿈을 잃었을까요즘 우리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청춘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포기하며 사는 인생이라고 단정 짓는 어른들의 시선에 갇혀버린 청춘들이 때 이른 달관의 시간을 지내고 있다. ‘청춘’이라는 단어로도 가슴 뛰게 행복하고, 누군가의 부러움을 사는 특별함이 빛을 잃었다. 그러나 청춘 스스로 물어야 한다.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은 나인가, 사회인가? 왠지 불안하게 행복한 젊은이들이 살아가고 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6-09-19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