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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들에게 많이 맞고 자랐다. 60년대에 태어난 우리 세대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장교들이 권력을 잡은 나라에서 학교는 또 하나의 병영이 되어 ‘일사불란 총화단결’을 말단까지 관철했다. 교사들은 거대한 폭력체계의 끝자락에서 지극한 ‘사랑의 매’로 아직 솜털이 부성부성한 아이들의 맨살을 수시로 터지게 했다. 그날따라 기분이 몹시 안 좋았던 선생이라면 맨손으로 얼굴을 후려치는 것도 부족하여 대나무 뿌리, 슬리퍼로 아이들을 잡았다. 감히 말대꾸를 하면 그야말로 먼지 나게 맞았다. 그 무차별의 폭력 아래 부서져 내린 교실에서 우리는 김칫국물 흐르는 도시락을 까먹고, 교련 선생의 베트남 참전 야사를 무한반복으로 전해들으며 국민교육헌장을 다 외우지 못해 조바심을 쳤다. 그것을 바꿀 수 없는 세상의 질서로 알고 살았다. 천박한 자들에게 굴신해 온 우리들어디 학교뿐이었을까. 집집의 식단과 성생활, 불러야 할 노래, 두발과 치마의 길이까지 관여하는 ‘관’은 무소불위의 힘이었다. 김남주 시인이 “집안에 면서기 하나 순사 하나 산감 하나 나면 왠만한 바람엔들 문풍지가 울까부냐” 어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썼듯 공무원은 출세의 권력이었고 나라 자체와 같았다. 87년 6월항쟁은 일방통행이었던 국가권력에 수십 년 만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제6공화국에서 국민은 대통령을 제 손으로 선출하는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되찾았고 91년 지방자치선거를 거치면서 지방권력을 일부 제어하는 일도 가능해졌다. 아래로부터 교사조합이 시도되면서 학교 현장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87년 대선의 패배로 낡은 것을 제대로 한 번 청산할 기회를 놓치고 긴 우회를 거치면서 수구세력은 더 교묘하고 강건하게 살아남았다. 박근혜의 집권은 수구세력이 이제 시대정신까지 장악하며 완벽하게 복귀한 것만 같았다. 저들의 웃음소리가 권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모욕하는 집권자의 변설을 귀에 담자니 하루하루가 참으로 괴로운 나날들이었다. 그랬는데 기적처럼 구중궁궐의 권력이 자기 발에 걸려 넘어졌다. 오만과 무지가 만든 제 수렁에 빠진 것이다. 매일 더 추악한 민낯이 폭로되는 박근혜 세력을 보면서 이들이 사태를 명민하게 알아차리고 일찌감치 퇴진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행정부, 검찰 등의 공안기관, 언론 곳곳에 틀어박혀 있던 적폐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낼 수 있었다. 후안무치인 저들의 항변권을 법이 허용하는 데까지 보장하고 매우 답답하게 진행되는 탄핵 절차를 지켜가는 것도 ‘공화국’의 실체와 한계를 몸으로 겪어내는 소중한 시간이다. 마침내 공포 기술자 김기춘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 머리칼을 싹둑 자르고 슬리퍼로 모욕하며 몽둥이 찜질을 가했던 평범한 얼굴의 교사들, 경찰들, 지극한 냉소의 눈빛을 흐트러뜨리지 않던 검사와 판관들이 떠올랐다. 악몽이 참으로 길었다. 나는 지금도 그날의 선생들을 용서하지 못한다. 작은 김기춘들, 부역한다는 죄의식도 없이 완장을 찬 자들. 아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용서하지 못한 것은 저토록 천박한 자들에게 턱없이 굴신해온 우리들 자신일 것이다. 오랜 모욕의 시간, 확실하게 선 그어야다가오는 선거에서는 유신의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 50대가 캐스팅 보터라고 한다. 새로운 대통령을 선택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 이 오랜 모욕의 시간에 확실하게 선을 그을 사람. 오십의 나이가 자랑스러울 그 시간을 기다린다. △ 이재규 작가는 치유의 글쓰기워크숍 ‘작가의 방’기획자이고, 저서는〈시와 소설로 읽는 한국현대사〉 〈사람의 숲에서 길을 묻다〉 등을 썼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01-24 23:02

어느 선배 우체국장 이야기다. 야근하는데 택배 하나가 작업장을 마구 돌아다니더란다. 잔뜩 긴장하고 달려들어 붙잡았는데, 열어보니 살아있는 닭이었다. 닭발이 포장지 사이로 빠졌고, 놀란 닭이 상자를 둘러쓰고 마구 뛰어다녔다는 이야기다. 야근에 지친 나머지 헛것을 봤거나, 졸다가 꿈을 꾸었거나, 상상했거나……? 정말 닭이었을 거야. 그렇게 믿고 싶었다. 2017년 설을 앞두고 다이어트 하는 택배가 여럿 있음을 보게 된다. 아직 기간이 남아있어서 지켜봐야 하겠지만, 더 늘어날 것 같은 예감이다. 이들은 서로 말도 한다. “너는 어디서 왔니. 처음 보는데?”질문을 받은 택배가 답한다. “나이 먹더니 눈이 나빠졌구나. 내가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데 그걸 못 알아본다는 말이야?” “…….”인간은 아름다워지고 싶어 은유 쓴다우체국에서 오래도록 도어 투 도어(화물운송에서 물건이 있는 출하지부터 최종 목적지의 수하인에게까지 서비스하는 것을 말함)를 하다 보니 택배가 생명체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침 작업장에서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뛰고 있는 택배를 보고 있자면 온 세상이 다 그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경건해진다. 약속이라도 한 듯 매일 일정한 수량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 또한 신기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조절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익산우체국의 경우 평상시 하루 평균 4000여 건을 접수하고 4000여 건을 배달한다.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가 있다. 이탈리아어로 집배원을 뜻하는 이 영화에는 세계적인 명성의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귀양살이하는 집 전담 집배원 ‘마리오’가 나온다. 시인은 마리오에게 시 쓰기를 권하며 은유를 가르친다. ‘은유는 사람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 마술과 같아.’라며. ‘들판에서/ 밀의 귀들이 바람의 입속에서 울리고 있음을.’ 이렇게 아름다운 은유를 배운 마리오는 급기야 짝사랑하는 여인 ‘베아트리체’에게 ‘당신의 미소는 장미, 부서지는 은빛 파도.’라는 기막힌 은유를 써서 마음을 얻는다. 촌뜨기 총각의 은유는 섬 전체를 숨 쉬게 하는 마력을 발휘한다.다이어트 한 택배가 묻는다. “나 예뻐요?” 이렇게 답해준다. “앙증맞고 귀여워. 그러니 몸매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처음에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너만의 아름다움이 있어.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기품이지.” ‘백곰 효과’라는 게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웨그너’는 실험에서 사람들에게 북극의 백곰을 절대로 상상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들은 백곰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생각을 억누를수록 백곰 생각은 더욱 커졌다. 교수 연구팀은 백곰이 생각날 때마다 빨간색 폭스바겐을 떠올리라고 했다. 그랬더니 백곰을 생각하는 빈도가 훨씬 줄었다고 한다. 생각을 가둬놓고 키우는 '백곰효과'규율을 어기지 않는 것 보다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리라. 백곰과의 한판 승부도 같은 맥락의 고민 때문일 것이다. 갈등하는 설……. 답을 쉽게 찾자. 내 마음이 택배다. 머릿속에서 형상화 된 장면이 떠오르고 그것이 가슴을 흔드는 것이면 된다.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마리오. 택배가 세상에 나왔을 때 그것은 물건이라기보다 노래요, 이미지 아닐까. 지금부터 이들의 노래를 적어둬야 하겠다. △이승수 지부장은 익산우체국장으로 저서로는영화에세이 〈울면 지는거야〉, 영화치료 전문서 〈영화치료의 기초 : 이해와 활용〉 등이 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01-17 23:02

민주주의를 사수하려는 시민들의 힘은 위대하다. 영하의 추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촛불을 들고 전국의 거리를 메우고 있는 이들의 수가 백만 명을 훌쩍 넘는다.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외치는 시민들의 소리가 제야의 종소리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펴졌다. 새해에는 평화의 촛불시위가 승리하여 시민들의 힘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자리 잡게 되기를 소망한다. 대립의 구도로 몰아가려는 세력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에 기실은 걱정이 된다. 그러나 시민들의 목소리가 모여 만든 큰 함성의 힘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시민의 큰 함성 쉽게 사그라지지 않아시민혁명이 서양의 역사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서고 시민의식이 성장한 곳에서는 역사의 흐름을 바로잡기 위한 작은 힘들이 뭉쳐서 분연히 일어난다. 세계가 우리나라의 촛불집회를 보도하면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평화로운 시민투쟁의 과정과 그 결말에 대한 궁금함이 저변에 깔려있는 것이다. CNN, BBC, NHK, CCTV 등 세계 굴지의 뉴스 앵글이 부패문화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낸 시민들에게 향해 있다. 백만이 넘는 집회의 규모에 놀라워하거나 인산인해를 이룬 속에서도 평화로운 축제의 한마당을 벌리는 광경에만 놀라워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이 짧은 기간 내 경제발전을 이룩한 나라에 숨어 있는 수수께끼 같은 문화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비단 외국인들만 궁금한 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도 사실은 알고 싶은 부분이다. 정경유착의 뿌리깊은 관행과 부패의 문화 속에서 한국이 어떻게 성장했으며, 한국인들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이른 바 패거리문화라 하는 정치권과 재벌의 유착관계를 과연 쉽게 끊어 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생기기도 한다. 패거리 조직과 의식구조가 국가를 경영하는 가장 윗선뿐만 아니라 중간 허리들 그리고 시민들을 직접 상대하는 아래선 까지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과 부패의 ‘문화’가 만연했기에 ‘김영란법’도 등장하지 않았던가. 어느 국제 조사기관이 여러 나라들을 대상으로 국가이미지를 조사해 보았다. 국가의 청렴도를 물었는데, 가장 깨끗해 보이는 나라에게는 1점을 주고 부패의 정도를 숫자로 누적해 가는 방식이었다. 우리나라는 불명예스럽게도 37점을 받았다. 국가의 청렴도 이미지가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투명한 사회 시민들 힘으로 가능투명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몇 사람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 법만 가지고는 더 더욱 어렵다. 오로지 시민들의 힘 즉 문화를 만들고 바꾸어가는 사람들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이 지난한 과정이라는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가는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권력을 동원해서 금방 올라선 이들이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에 절망하기 쉽다. 이 어두움 속에서도 수천 명이나 되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들 그리고 촛불을 들고 결연히 일어서는 이들이 있어서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의 날카로운 필력이, 가슴을 울리는 소리가, 이상향을 그리는 화폭이 그리고 마침내는 촛불의 함성이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게 한다.△함한희 교수는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이며 무형문화연구원 원장이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01-03 23:02

개체는 차이 즉, 서로 다름이라는 다양성 가운데서 존재한다. 다양한 개체 속에서 균일하거나 유사한 개체 또는 집합체를 통해 양식이 만들어 지고 이에 맞게 다양한 개체들이 규격화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식화는 그 목적이 미적이거나 기능적일 수 있지만 규격화는 기능적인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특정 목적과 기능에 따라 규격화된 개체들은 다양한 속성, 즉 다양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예술에 있어 규격화는 늘 경계의 대상이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배척해야할 대상 또한 아니다. 이는 마치 갈등구조와도 같이 느껴진다. 다양성 그리고 양식화와 규격화... 규격화된 미의식을 추구하였던 고전주의와 이에 대한 파격을 통해 다양성의 본질적인 가치를 발견하고자 했던 낭만주의처럼 말이다.민요 규격화에 따른 장·단점우리나라 전통공연예술에서도 양식화와 규격화에 의해 다양성을 잃어버린 개체들이 있다. 삶의 현장에서 불리던 토속민요가 전문가들이 불러 지역의 구분 없이 향유되었던 통속민요의 양식에 맞춰 규격화 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악보화 될 때도 마찬가지로 통속민요의 어법으로 해석되어 서양의 오선보에 기록되다보니 토속민요의 다양성이 쉽게 규격화되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의 생활과 밀접해 현장성과 즉흥성이 생명인 민요가 공연예술화 과정에서 점점 더 규격화되고 있다. 이와 유사한 경우로 사물놀이를 생각해볼 수 있다. 사물놀이는 무대예술로 양식화된 대표적인 전통공연예술이다. 1978년 2월 서울 대학로의 ‘공간사랑’이라는 자그마한 무대에서 네 명의 연주자가 경기·충청지역의 ‘웃다리풍물’을 연주하였다. 풍물굿이 무대라는 정형화된 공간에서 연주된 것도 또 앉아서 연주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두 달 후 이곳에서 ‘사물놀이’라는 단체명으로 두 번째 공연을 한다(처음에 사물놀이는 단체의 이름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꽹과리, 장구, 북, 징 네 개의 악기로 연주하는 양식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때부터 김용배,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 네 명의 연주자들은 풍물굿을 무대 예술화 하여 관객과 새롭게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산업화와 서구화로 잊고 살았던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으며 전통의 소중함과 가치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한 때 전통문화하면 사물놀이를 연상할 정도의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하였는데 무엇보다 더 주목할 점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이미 잊힌 풍물굿을 사물놀이 통해 다시 찾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연희자와 참여자를 무대와 객석으로 엄격히 구분시켜 풍물굿의 대동적인 신명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춤과 노래, 재담, 재주, 연극적 요소인 잡색 등의 총체적 연희를 배제하여 종합예술적인 성격을 축소시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즉 풍물굿이 양식화되고 규격화되며 다양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대예술로 양식화된 개체를 즉, 목적과 기능에 따라 규격화된 개체를 원 속성의 개체와 동등하게 비교하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이다.양식화와 다양성의 갈등 구조무속음악과 관련이 있는 시나위, 시나위의 허튼 가락을 양식화한 산조 또 이들과 음악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은 판소리 그리고 이들 근간에 존재한 민요. 이 모든 음악들이 공연예술로 규격화되며 다양성을 잃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장성과 즉흥성 또한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성을 위해 규격화된 이들을 다시 해체하여 원래의 상태로 돌려보내야 할까? 아니면 공연예술로 양식화된 이들의 다양성을 최대한 담을 수 있는 규격을 고민해야 할까? 어렵다! 역시 다양성 그리고 양식화와 규격화 이들은 갈등 구조로 얽혀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6-12-13 23:02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다말고 어려워서 여러 번 덮어버렸다. 인터넷의 ‘책 읽어주는 여자’를 찾은 적도 있다. ‘그래비티’ ‘인터스텔라’ ‘마션’ 등 우주여행에 관한 영화를 여러 편 찾아서 보았다. 어떤 오기 같은 것이 작동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내셔날 지오그래픽에서 만들어놓은 ‘코스모스’ 동영상을 발견했다. 13부작을 다운받아서 일주일 넘게 집중해서 보았다. 역시 우주는 광대하고 나는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는 결론만을 확인했으나 시간만 소비한 것은 아니었다. 우주달력 속 인류는 티끌에 불과우주달력은 138억 년 전 우주가 탄생한 빅뱅을 1월 1일 0시로 하고, 지금 현재를 12월 31일 자정으로 가정하여 만들었다. 어마어마한 시간을 1년으로 축소해서 만든 압축달력이다. 한 달은 10억년이고, 하루는 4천만 년이다. 태양은 8분 전의 과거고, 달빛은 1초 전의 과거다. 여기까지는 감이 잘 오지 않는다.그러나 사람이야기가 나오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우리는 12월 31일 9시 45분에 직립보행을 시작했다. 시간으로 따지면 350만 년 전이다. 모세는 7초 전, 싯달타는 6초 전, 예수는 5초 전, 모하멧은 3초 전에 태어난다. 그 짧은 시간에 이들은 인류 정신의 한 축을 구축했다. 12월 31일 11시 59분 46초에 인간은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문자를 모르고 살던 인류의 모든 것이 멸실되는 것을 간신히 막을 수 있는 시간이다. 문자의 발명으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마련되었다. ‘코스모스’를 읽다보면 빛이 우리들과 가까이 있으면 ‘태양’이 되고 우리에게서 멀리 있으면 ‘별’이 된다는 구절이 있다. 우리가 그렇게 이름 지었을 뿐 그것들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위도 없고, 아래도 없고, 중심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는 우주 공간을 분별하기 위해 임의의 점 하나를 찍는다.(올해는 우주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참으로 민망한 시국이다). 이 임의의 점을 중심 혹은 정상이라고 믿으며 거기에 집착하고 그에 따른 온갖 힘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임의의 점은 언제든 쉽게 옮길 수 있다. 그리고 쉽게 지워버릴 수 있다. 우주의 무한함을 증명하기 위한 일시적인 장치이기 때문이다.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인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이기적인 유전자를 운반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사람도 생물이므로 유전자가 증식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말이다. ‘시간은 모든 것이고, 인간은 시간의 사체일 뿐이다’는 마르크스의 서늘한 말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것도, 사실은 드넓은 우주에 찍힌 아주 작은 임의의 점일 뿐이다.사람이라는 생물이 유전자를 보전하는 도구이고, 시간의 사체일 뿐이라는 말 앞에서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믿었던 자만심 내지는 교만함이 슬그머니 무너지게 된다.지금의 나는 자유로운가지금 나는, 삶의 본질에 대해 의연한가? 세상의 균형과 불균형을 똑같이 아름답게 바라보는가? 지금 나는, 임의의 점 하나에 집착하고 몰두했던 시간들을 내려놓고 자유로운가? 멸실되지 않을 역사와 정신을 위해 글을 쓰는가? 나의 글과 나의 행동은 서로에게 당당한가? 2016년이 저물어가는 12월에 이런 질문들이 나는 부끄럽다.

오피니언 | 기고 | 2016-12-06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