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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591건)

작년 말에 파리에서 세드릭 빌라니 교수를 만났다. 2010년 필즈상을 수상한 석학이고 앙리 푸앵카레 수학연구소장이다. 항상 나비넥타이 정장차림에 자신만의 거미 브로치를 단다. 깊이 있는 수학 논문과 베스트셀러 대중서를 동시에 써내며 학자의 스테레오타입을 거부하는 이단아다.그를 만난 곳은 실험 음악가 파트리스 물레의 작업실이었다. 영화 매드맥스 세트장 같은 느낌의 커다란 지하 공간에서 물레는 신개념 악기를 설계하고 만들며 연주하는 작업을 한다. 음악에 대한 학습이나 훈련 없이도 자기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표다. 이 작업실에서의 연주는 좋은 소리를 내는 것 보다는 멋진 그림을 그리는 것에 가깝다.수학자가 음악작업실에 간 까닭은자폐증이나 신체적 부자유가 있는 아이들이 이런 악기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경험을 하고 치료받는 현상이 관찰되는 바람에 새로운 활력을 뛰게 됐다. 작업실에는 정신과 의사인 여성 인지과학자도 방문 중이었다. 음악가와 수학자 그리고 인지과학자가 무슨 공통의 관심이 있을까. 시각적 정보를 음악으로 전환하는 비법을 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치유의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까지 동원된 것이다. 자폐증 아이들이 지하실을 방문하는 것이 민망한 빌라니는 작업실의 지상 이전을 위해 기금을 모으는 중이다. 이럴 때는 필즈상 수상자라는 허명도 도움이 된다나.살바도르 달리는 초현실주의 화가다. 그의 1955년 대표작인 ‘최후의 만찬’에 나타나는 여러 직선들의 길이는 황금비를 이루고, 배경에는 큼지막한 정십이면체가 보인다. 똑같은 모양의 펜타곤 12개를 이어 붙여서 만든 각진 축구공이 예수님 뒤에 보이다니. 도대체 이게 다 무슨 뜻인가.얘기는 고대 아테네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은 모순과 오류투성이의 현세 너머에 무결한 피안의 세계가 있다고 여겼다. 피안을 들여다보는 열쇠를 기하학에서 찾고는, ‘기하학은 진리로 가는 영혼을 이끌며, 철학의 정신을 창조한다’고 가르쳤다. 아테네에서 제자들을 키우던 아카데미 입구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써놓았다. 이 엄포에 주눅 들지 않은 용감한 사람들 덕에, 플라톤 아카데미는 나중에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서도 계속되어 장장 900년 동안 존속했다. 그래서 ‘플라톤적’이라는 표현은 ‘이상주의적’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지적 사랑의 의미로 쓰이는 ‘플라토닉 러브’가 한 예다. ‘플라톤적 입체(Platonic Solids)’도 비슷한데, 혼탁한 이 세상에 숨어있는 고귀한 입체 다섯 개를 이르는 말이다. 각 면이 정삼각형인 피라미드를 연상해보라. 바닥까지 쳐서 총 4개의 면을 갖는 정사면체다. 주사위를 연상해보라. 각 면은 똑같은 정사각형이고 총 6개의 면을 갖는 정육면체다. 각 면이 똑같은 정다면체는, 놀랍게도 우주를 통틀어서 이 두 개 외에,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밖에 없다. 이 사실은 수학적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됐고, 신비한 다섯 개의 입체는 플라톤 학파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플라톤의 4원소론 에서는 우주를 이루는 기본 원소인 불, 흙, 공기, 물이 각각 4개의 정다면체에 해당한다. 여기 정십이면체가 빠졌는데, 후대 사람들은 이를 미지의 제 5원소로 불렀다. 플라톤은 신이 우주의 별자리를 배치하는 데 정십이면체를 사용했을 거라 했고,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걸 에테르라고 불렀다. 음악·미술에도 영감을 주는 수학살바도르 달리는 예수님과 열두제자가 함께 하는 마지막 만찬의 성스러움을 신의 섭리를 상징하는 제5원소로 표현했고, 황금비를 도처에 배치해서 미적 완결성을 담아내려 한 것이다. 이런 실험정신으로 가득한 예술가는 도처에 출몰한다. 간딘스키와 초기 피카소의 작품에서도 구조와 명징성의 연계와 실험이 확연하다. 드뷔시는 높낮이가 황금비를 이루는 음들을 배치하는 작곡 실험을 했다. 수학은 초중등 교육체계에서 합리적 생각의 능력을 연습시키는 도구이지만, 분야를 넘나드는 음악가의 치유실험과 미술가의 상징실험에 영감을 주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오피니언 | 기타 | 2016-09-02 23:02

폭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종편 방송도 포털 사이트도 눈만 뜨면 각종 유명인(주로 연예인)들의 사생활 관련 정보들을 쏟아낸다. 국민이 낸 세금을 대신 집행하거나 이를 감시하는 사회적 공인들의 공적 활동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그저 직업의 특성상 대중에게 얼굴과 이름이 알려져 있을 뿐인 사람들의 사적 삶에 대한 정보다. 미담(美談)도 아니고 대부분 추문(醜聞)인데, 사실로 확인된 것과 단지 추정일 뿐인 것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다. 보지 않으면 그만이겠으나 쉽지가 않다. 폭격 수준으로 쏟아지니 자꾸 눈에 띄고, 인간 본성의 결함 때문인지 자꾸 유혹에 지고 만다. 덕분에 우리는 시간을 날리고, 관련 업체와 매체는 수익을 거두며, 성찰과 토론이 필요한 공적 사안들은 뒤로 밀린다. 남의 불행 통해 느끼는 나의 행복이와 같은 정보와 그런 정보를 주고받는 행위를 ‘가십(gossip)’이라고 한다. ‘잡담’이라 하면 뜻이 약해지고 ‘폄론(貶論)’이라 하면 어려우니 ‘쑥덕공론’ 정도로 옮기면 무난하겠다. 가십은 정말 인간 본성에 속하는 것일까. 1993년 인류학자 로빈 던바(Robin Dunbar)는 인간의 언어가 발달한 이유는 ‘물리적’ 환경에 대한 정보(예컨대 사냥을 위한 팁)가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 대한 정보(예컨대 타인에 대한 평가)를 공유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을 폈다. 집단생활을 하려면 누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데,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 일일이 만나 판단할 수 없으므로 가십을 참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특정 성향을 생존과 번식을 위한 진화의 산물로 간주하는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가십은 진화적 이득이 있어 발달돼 온 것이 된다. 그런데 가십은 왜 타인에 대한 긍정적 정보가 아니라 부정적 정보를 우대하는 것일까.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독일어가 있다. ‘남의 불행(Shaden)을 통해 느끼는 나의 행복(Freude)’을 뜻하는 이 말을 한국어로는 한 단어로 번역할 수가 없다. 데이비드 버스의 ‘진화심리학’(1999)에 소개된 한 실험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의 사회적 추락에 샤덴프로이데를 느끼는데, 타인의 지위가 높을수록, 그의 성공이 부당하다 여겨질수록, 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그 기쁨의 강도가 세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십이 타인의 긍정적 정보가 아니라 부정적 정보에 몰두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 정보가 타인의 추락을 예감하게 하고, 그로 인해 나에게 제공될지 모를 반사이익을 (무)의식적으로 기대하게 하며, 그 기대가 결국 나에게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영국 월간지 ‘사이칼러지즈(Psychologies)’(2011년 12월)의 한 기사는 가십에 따르는 부수적 이익 하나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비방이 떳떳하지 못한 일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을 일삼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A가 B에게 제3자인 C에 대한 부정적 정보를 말하면 B가 A를 나쁜 사람이라 판단할 수 있으므로 비방을 먼저 시도하는 일은 꽤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B가 A에게 동조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A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A가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B는 판단하게 된다는 것. 이를 통해 A와 B 사이에는 강한 결속 관계가 성립된다. ‘빨리 친해지고 싶은가? 제3자를 함께 헐뜯으라.’ 공정한 경쟁의 장 아니라는 증거가십의 사회심리학을 소략하나마 소개한 것은 그것에 탐닉하는 우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그렇다고 가십을 멀리하고 공적 의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공허한 결론을 부르짖기 위해서도 아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왜 가십의 양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언론매체가 난립해 경쟁이 과열되면서 가십 생산 자체가 늘어났고 통신수단의 발달로 가십 유통도 더 원활해졌다는 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을까. 가십이 타인의 추락을 예감하는 쾌감을 제공하고 그 쾌감을 공유하는 이들을 결속시킨다는 설명이 옳다면, 가십의 폭증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공정한 경쟁의 장을 제공하여 구성원 각자가 크든 작든 저마다의 성취와 보람을 누리도록 하는 데 무능하다는 증거인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마르크스 식으로 말해 ‘가십은 인민의 아편’인 것일까.

오피니언 | 기타 | 2016-07-29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