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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76건)

미인대회 당선자 이름이 ‘김마포’다. 이름이 특이하다는 사회자의 말에 그 아가씨, 환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마포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고 아버지가 그렇게 지어주셨답니다.” 그 말을 듣고 사회자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말죽거리 같은 데서 태어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겠다, 너는.’ 물론 실제로 벌어진 일은 아니다.우리나라 도처에는 공항이 있다. 김포국제공항, 인천국제공항, 청주국제공항, 광주국제공항, 무안국제공항, 김해국제공항, 제주국제공항…. 도시 이름에 ‘국제’만 갖다 붙였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별로 국제적인 것 같지 않은 공항까지 예외가 없다. 영락없이 앞서 언급했던 ‘김마포’다. 아니다. ‘김미인마포’다.나라 밖 뉴욕에는 JFK(John F Kennedy) 공항이 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 파리의 드골(De Gaulle) 공항이다. 몽골 가는 비행기를 타면 칭기즈칸 공항에 내려준다. 인디라 간디 공항이 어디에 있을지는 불문가지다. 모두 굵직한 자취를 남긴 그 나라의 역사적 인물에서 따온 이름들이다. 스페인에는 동화 속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피노키오 공항이 있다고 한다.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이 개장됐다. 내부에는 국내외 유명 미술가들의 작품이 상설 전시된다고 한다. 하긴 그래 봤자 ‘제2여객’일 뿐이다. 기왕 ‘아트포트 ‘(Art+ Airport=Artport)’를 표방할 거였으면 20세기 비디오아트 창시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우리 예술가 이름을 붙여서 ‘백남준터미널’ 같은 명칭을 쓸 수는 없었을까. 물론 다른 적절한 이름도 좋다.우리 지역 거점 국립대학에 가면 ‘인문관’이 있다. 그 옆에 한옥 양식을 접목해서 지은, 퍽이나 ‘간지’ 나는 건물 하나가 들어섰는데, 외벽을 보니 ‘인문사회관’이라고 적혀 있다. 과연 인문학과 사회학의 융복합인가? 우리 지역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시조부흥운동을 주도했던 그 분의 아호를 빌려다 ‘가람관’ 같은 명칭을 붙였으면 어땠을까. 물론 이 대목은 사족이다.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8-01-23 23:02

‘생각이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꾸 생각나니까 아예 생각을 안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말조차 우스갯소리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생각’을 무려 여덟 번이나 반복한 것이다. ‘생각은 깊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정도로 충분했다. 한마디로 모양이 같은 단어는 하나의 문장 안에 반복해서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 ‘새해 거창한 계획은 세우지 않더라도 소소한 계획은 세워야 할 것 같아요.’ 비교적 짧은 문장에 체언인 ‘계획’, 용언인 ‘세우다’를 각각 두 번씩 썼다. 문장의 기본 틀까지 무너진 건 아니므로 뭐가 문제일까 싶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새해에는 소소한 계획이라도 세워야 할 것 같아요.’와 같이 둘 중 하나는 얼마든지 생략할 수 있다. ‘두 사건 모두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는 어느 신문 기사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이 또한 마찬가지다. 체언인 ‘사건’을 두 번 썼기에 하는 말이다. ‘둘 다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나 ‘두 사건 모두 미제로 남았다.’가 훨씬 간결하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사람이나 만날 생각은 없다.’와 ‘아무 생각 없이 누구나 만나려는 건 아니다.’를 비교해 보라는 뜻이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당신의 소망은 무엇입니까?’처럼 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이 경우는 각각의 문장에 모양이 같은 단어를 두 번 이상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처럼 앞에 나온 단어를 다음 문장에서 반복하는 것도 좋은 습관은 아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 한 해 당신의 소망은 무엇입니까?’라고 변화를 줘서 쓸 줄 아는 센스가 필요하다. ‘고양이 먹이 주실 때 점포 밖에서 주세요.’는 어느 공공장소에서 발견했다. 용언인 ‘주다’를 두 번 썼지 않은가. ‘고양이 먹이는 점포 밖에서 주세요.’라고 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체언이든 용언이든 부사어든 모양이 같은 단어는 한 문장에 반복해서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 좋은 문장을 쓰려는 이들이 꼭 새겨두었으면 한다.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8-01-16 23:02

모르긴 해도 ‘사랑’을 가장 자주 써왔지 싶다. 대중가요 가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저마다의 사연을 담아내다 보니 그 속뜻까지 다양하게 물었던가 보다. 나훈아는 굵고 낮게 깔리는 특유의 저음으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불렀던가. 그 이름조차 정겨운 옥분이라는 이름의 가수는 음정을 다소 위태롭게 흔들면서 향기로운 꽃보다 진한 바보들의 이야기라고 노래했다.끊일 듯 말 듯 허스키한 음색과 어우러져 더욱 애절하게 들렸던 장은숙의 은 커터칼에 베인 듯 온몸이 다 쓰리고 아프다. ‘사랑은 머물지 않는 바람 무심의 바위인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어둠의 분신인가’를 묻다가 ‘세상에 다시 태어나 사랑이 찾아오면 가슴을 닫고 돌아서 오던 길로 가리라’고 어금니를 깨물며 다짐하고 있으니.이별은 그토록 아프기만 한 걸까. ‘리별은 美의創造입니다 / 리별의 美는 아츰의 바탕(質)업는 黃金과 밤의 올(絲)업는 검은비단과 죽엄업는 永遠의生命과 시들지안는 하늘의 푸른꼿에도 업습니다 / 님이어 리별이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엇다가 우슴에서 다시사러날 수가 업습니다 오오 리별이어 / 美는 리별의創造입니다’ 만해 한용운이 쓴 다.사랑 없는 이별이 어디 있으랴. 이별이 아픈 만큼 사랑도 깊었을 터,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뒤늦게 깨닫는 우리네 어리석음이라니. 사랑이 이별이고, 이별이 곧 사랑이다. 하여, 세상 어디에도 이별이 빚어내는 아름다움만한 게 없다는 만해의 역설에 공감한다.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 몫까지 사랑하겠어요.’ 어느 카페 벽에 걸린 글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10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났던 그 ‘바보’를 뜬금없이 떠올린다. 무릇 사랑이란 자식에게든 연인에게든 이웃에게든 내가 가진 것을 바보처럼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 사랑하다 헤어지면 다시 보고 싶고, 당신 없인 아무것도 이젠 할 수 없어서 사랑밖에 난 모른다고 했던 심수봉의 노래를 여럿이 함께 흥얼거리고 싶어지는 새해 아침이다.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8-01-09 23:02

작년 12월 28일 오전 11시쯤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에 50대 남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주민센터 뒤 공원 나무 밑에 상자가 있으니 가져가시고 어려운 소년소녀 가장을 위해 써주세요.” 상자 안에는 지폐 다발과 돼지저금통이 담겨 있었다. 세어보니 무려 5천만 원이 넘었다.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든 한해였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라는 선물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힌 A4 용지도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2000년부터 연말이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무려 17년째 이어져 온 일이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 써달라면서 거액을 내놓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끝끝내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동안 그가 ‘몰래’ 가져다 놓은 금액을 합하면 무려 5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또 그 후원금 덕택에 4,000여 불우한 가정을 보살필 수 있었다고 한다. 전주 시민들이 언젠가부터 그를 ‘얼굴없는 천사’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2009년에 그가 상자 안에 남겼던 메모도 시민들은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대한민국 모든 어머님들이 그러셨듯이 저희 어머님께서도 안 쓰시고 아끼시며 모으신 돈이랍니다. 어머님의 유지를 받들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여졌으면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늘에 계신 어머님께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그런 걸 보면 ‘천사’의 원조는 아무래도 그의 어머니였지 싶다.노송동주민센터를 지나다가 작은 비석을 보았다. ‘당신은/어둠 속의 촛불처럼/세상을 밝고 아름답게/만드는 참사람입니다/사랑합니다’ 상투적인 문구여서 하나도 시 같지 않은데 그 어떤 시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풍편에 듣자니 시에서는 적잖은 예산을 들여서 ‘천사의 길’을 조성해서 관광객 유치에 나서고, 철없는 언론사 기자들은 또 그의 얼굴을 기어이 밝혀내고야 말겠다면서 ‘잠복근무’까지 선 적도 있는 모양인데, ‘천사’가 그걸 과연 바랄지는 의문이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12-26 23:02

‘망년회’를 거쳐 정착된 ‘송년회’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의 연중행사다. 가까운 친구들 몇몇이 모여 정담을 나누거나, 직장이나 단체의 구성원들끼리 만나 함께 밥도 먹고 술도 마신다. 온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새해 소망을 묻기도 하는데, 그런 것도 송년회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나 혼자만의 송년회는 어떨까. 따뜻한 음악이 흐르는 조용한 카페에서도 좋고, 눈 덮인 겨울 산과 들판을 바라보면서도 제격이겠다. 한 해 동안 자신이 벌인 일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사무치도록 후회되는 일은 없었던가, 뿌듯하게 거둔 성과는 또 어떤 것이었는가를 되짚어보는 것이다. 새해에 반드시 이루고 싶은 일을 설계해보는 것도 좋겠다.어느 자치단체의 공공도서관 직원들은 송년회를 좀 특이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가만 보니 웬 현수막 시안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제목은 ‘2017 완주군립도서관 17대 뉴스’였다. 지난 한 해 동안 도서관 사업을 추진하면서 거둔 성과나 주요 실적을 중요도에 따라 글자의 크기와 순서를 조절해서 빼곡하게 배치했는데, 그걸 송년회장 한쪽 벽에 걸 거라는 것이었다.1. 제2회 대한민국 책읽는 지자체 대상 2년 연속 수상 2. ‘올해의 책’ 저자 김제동의 ‘그럴 때 있으시죠’ 휴먼 콘서트 개최 3. 둔산영어도서관 3층 증축으로 서비스 확대(어린이자료실 분리) 4. 차별화된 이서혁신 공공도서관 건립 추진 5. 전주완주 도서관 이용관련 업무협약 체결 6. 기부리딩 기부리더 캠페인 기증 증가(두배 모금, 1000권 기증) 등등.한 해 동안 추진해 온 여러 가지 사업에서 다양하고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으니 자체 뉴스를 열일곱 가지나 선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현수막을 걸어놓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새해를 다짐할 줄 아는 센스 만점 구성원들이 있는 한 이 조직은 지속적으로 발전할 거라는 믿음이 갔다. 그러다 문득, 속으로 빙긋 웃었다. 그럼 내년에는 열여덟 가지 뉴스?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12-19 23:02

부하 직원인 박 대리가 문자를 보냈다. ‘저한태 맛껴주시면 열씨미해보겟읍니다’라고 적어서. 이걸 읽은 ‘과장님’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일에 대한 그의 열정과 의욕을 높이 사서 기획서 작성을 선뜻 맡겨주겠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러기 어려울 것이다. ‘저한테 맡겨주시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라고 적어 보냈더라면 물론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각 신문사에서는 ‘신춘문예’라는 이름의 공모전을 연다. 시, 소설, 수필 등의 창작 활동에 뜻을 둔 많은 이들이 몇 날씩 밤을 밝혀 쓴 작품을 신문사에 보낸다. 그리고 당선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며 설레는 나날을 보낸다. 장르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응모작 수는 수백 편(혹은 천 편 이상)에 이르는 게 보통이다. 응모된 작품의 심사는 크게 예심과 본심 두 단계로 나누어 진행한다. 그 많은 작품들 가운데서 1차적으로 대략 5∼10편을 가려내는 게 예심이다. 본심에서는 그걸 꼼꼼하게 읽고, 각 작품들의 장단점을 비교해서 당선작 한 편을 최종적으로 선정한다. 그런데 응모된 대부분의 글은 심사위원들이 끝까지 읽어주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소설이나 수필의 경우 처음 한두 문장에만 눈길을 주고는 준비된 박스 속에 가차 없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길어야 한 단락 정도 읽어주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글의 첫머리에 구사한 문장에서 앞서 박 대리가 보낸 문자처럼 맞춤법에 어긋나는 단어가 몇 개 보이는 순간 그 글은 끝장이라고 보면 된다. 심사위원들은 기본적인 단어나 문장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응모자가 쓴 글이라면 그 내용 또한 안 봐도 비디오일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단어를 모아 문장을 쓰고, 그것들을 모아 한 편의 글을 완성한다.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서도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말 맞춤법에 맞는 단어야말로 좋은 문장을 쓰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12-12 23:02

치킨이 국민 야식으로 자리를 잡은 지 오래다. 닭도리탕 또한 백숙과 더불어 우리의 전통적 닭요리 중 하나다. 토막 낸 닭고기에 고추장, 파, 마늘, 간장, 설탕 따위의 양념과 물을 넣고 끓인 음식이 닭도리탕인데, 그 이름이 속수무책으로 탄압받고 있다.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할 때 가장 널리 쓰이는 한컴오피스 프로그램에서도 ‘닭도리탕’을 두드리면 대번에 붉은 밑줄이 그어진다. 표준말이 아니니 당장 ‘닭볶음탕’으로 바꿔 쓰라는 것이다.고스톱 판 용어로 ‘고도리’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다섯 마리 새’다. ‘닭도리탕’이 괄시당하는 까닭은 혹시 그 말 때문인 건 아닐까. ‘닭도리탕’에 든 ‘도리’가 ‘새’의 뜻을 가진 일본말인 것 같아 껄쩍지근헝게 절대로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억지소리일까? 천만에다. 그것 말고는 ‘닭도리탕’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까닭을 제대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도리’를 순우리말 ‘도리다’에서 따온 것으로 풀이하면 안 될까. ‘닭의 살을 도려서 끓인 탕’으로 보자는 것이다. 설령 ‘닭도리탕’의 ‘도리’가 일본말이라고 치자.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민족적 자존심을 들먹일 것인가. ‘닭새탕’이어서 이상하다는 건가. ‘처갓집’은 표준말로 인정하고 있지 않는데? 그런 점에서라면 ‘새’ 대신 ‘볶음’을 굳이 집어넣은 것도 오십 보 백 보다. ‘볶음’과 ‘탕’은 조리 방법이 크게 다르지 않은가. 둘은 하나의 음식 이름으로 나란히 어울려 쓸 수 없다. ‘김치찌개튀김’, ‘고등어조림무침’ 같은 이름을 들어봤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일제로부터 오랜 식민 지배를 받은 탓에 우리 생활 속에 일본말 흔적이 넘쳐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걸 우리말로 순화시키자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 해도 모두에게 익숙한 ‘닥도리탕’을 패대기치고, 발음도 복잡한 ‘닥뽀끔탕’을 굳이 써야겠는가. ‘가락국수’라는 좋은 우리말 두고 일본말인 ‘우동’은 와리바시로 잘도 집어 드시지들 않는가. 정작 없애야 할 친일의 잔재가 수도 없이 많은데 애꿎은 ‘닭도리탕’만 갖고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12-05 23:02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장인들 중에 포스트잇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학생들도 마찬가지다. 하루에도 대여섯 장씩 거기에 뭔가를 적어서 책갈피나 책상 바닥, 컴퓨터 모니터 등에 붙이곤 한다.사실 ‘포스트잇(Post-it)’은 3M이라는 회사에서 생산하는 사무용품 중 하나다. 고유명사가 보통명사로 변한 경우다. 포스트잇은 붙였다 떼었다를 여러 차례 반복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오늘날 메모지의 대명사로 위상을 굳혔다.포스트잇에는 전화번호를 적기도 하고, 그날 반드시 처리해야 할 중요한 업무를 기록하기도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그걸 잊지 않으려고 몇 개 단어로 요약해서 적어두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은밀히 전달할 때도 요긴하게 쓰인다. ‘박 팀장이 있어서 항상 든든하네∼.’ 아침에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려는데 부장님 글씨가 틀림없는 이런 메모가 적힌 포스트잇이 모니터 한가운데 붙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오전의 그 일, 고마웠습니다. 아주아주 많이요…^^’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왔더니 사무실 책상에 캔 커피 하나가 놓여 있는데 거기에 이런 메모가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건 또 어떤가.살다 보면 가까운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일이 종종 생길 것이다. 번거로운 일을 도와준 후배나 친구도 한둘이 아닐 것이다.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해준 상사 덕택에 회사 생활을 성공적으로 해나갈 수 있는 기반을 튼실하게 닦기도 할 것이다. 그게 고마워서 캔 음료 같은 걸로 마음을 전할 때가 있다.캔 커피 하나를 사는 데 드는 비용이 1,000원이라고 가정하자. 그걸 그대로 전하면 액면가대로 1,000원어치 마음밖에 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포스트잇에 짧은 몇 마디 말을 적어서 붙인 캔 커피는 그 몇 배 혹은 몇십 배의 가치를 발휘하지 않을까. 일상에서 흔히 쓰는 포스트잇은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훌륭한 엽서이기도 한 것이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11-28 23:02

‘바람의 아들’을 모르는 야구팬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프로야구 해태와 기아타이거즈에서 활약했던 ‘야구천재’ 이종범의 별명이다. 선수시절 그는 뛰어난 타격 솜씨를 보여주었다. 유격수로서 수비 능력도 발군이었다. 게다가 한 시즌 도루 최다 신기록까지 갖고 있다. 운동선수에게 붙여진 별명 중 이처럼 시적인 게 또 있을까 싶다.기아타이거즈의 정규리그와 한국시리즈 통합우승으로 막을 내린 2017시즌 KBO리그에서 기자들과 팬들의 애정어린 관심을 받았던 선수가 있다. 고졸 신인이 그 어렵다는 전 경기 출장에 최다안타 기록까지 갈아치웠으니 그럴만도 했다. 아버지의 별명에 빗대어 사람들은 그 어린 야구선수를 ‘바람의 손자’라고 불렀다. 넥센히어로즈 소속 이정후 선수 얘기다. ‘이정후(19·넥센)이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넥센을 울렸다.’는 인터넷 신문기사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우리 문장에 쓰이는 괄호는 소괄호( ), 중괄호{}, 대괄호[ ]가 있다. 이중 중괄호는 문장 안에 직접 쓰지 않는다. 가장 흔한 건 기사처럼 소괄호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그 쓰임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한글맞춤법에 따르면 소괄호는 언어, 연대, 주석, 설명 등을 넣을 적에 쓴다고 되어 있다. ‘기호식품(嗜好食品)인 커피(coffee)’, ‘5·18민주화운동(1980년)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 ‘스티브 잡스(애플 창업자)가 세상에 던진 메시지’와 같은 어구가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기사에서는 물론 소괄호를 올바로 썼다. 하지만 이어 쓴 조사 ‘∼이’는 그렇지 않다.앞서의 기사를 보면 ‘이정후’라는 이름 다음에 ‘19·넥센’을 작은 괄호 안에 적어 넣었다. 참고하라는 뜻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괄호 안에 든 말은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일 뿐이다. 그 소리에 맞춰 주격조사 ‘은/는’이나 ‘이/가’를 써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이정후(19·넥센)이’가 아니고 ‘이정후(19·넥센)가’라고 써야 옳다는 뜻이다.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11-21 23:02

‘공짜 치즈는 쥐덫에만 있다’라는 러시아 속담이 있다고 한다. 우리 속담에도 그 비슷한 속담이 몇 개 있다.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된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가 그것들이다. 모두 공짜를 경계하는 말들이다.대머리가 되거나, 쥐약이 묻어 있으니 먹으면 죽을지 모른다는데도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공짜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걸까. 전문가들은 불공정한 사회구조를 그 원인 중 하나로 꼽는다. 평범한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해도 원하는 결과를 내기 어려운데 지난겨울의 ‘그녀’처럼 돈 있고 빽이 든든한 부모를 둔 이는 명문대학도 쉽게 가고, 수십억짜리 말도 탄다는 것이다. ‘재능기부’라는 말도 일종의 공짜를 바라는 심리에서 나온 거 아닐까 싶다. 개인이 오랜 시간 혼신의 노력을 투자해서 성취한 재능을 대가를 치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쓰겠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재능기부는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열정 페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0대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재능 중 하나는 열정일 것이다. 그걸 헐값에 쓰겠다고 사탕 바른 말이 ‘열정 페이’ 아닌가 해서 하는 말이다. 편의점 점주들이 알바비를 놓고 ‘꺾기’를 일삼는 것도 다를 게 하나도 없다.젊은이들의 열정을 한순간에 식혀서 의욕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열정 페이’라는 이름의 ‘공짜’ 심리다. 날로 먹겠다고 덤비는 어른들의 몹쓸 심보다. 이건 어른들뿐 아니라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들 모두 반드시 경계해야 할 태도이기도 하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짜를 경계하는 말이 참 많다. 그걸 하나로 묶으면 이거 아닐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11-14 23:02

얼굴이든 몸매든 외모에 신경을 참 많이들 쓴다. 젊은층에서 더욱 그렇다. ‘쌍수’에 앞트임과 옆트임으로 눈알을 왕방울만하게 만드는 건 기본이다. 코를 높이고, 입술도 까뒤집는다. 섹시해 보인대나 어쩐대나. 멀쩡한 다리뼈에 보형물을 넣어서 ‘롱다리’까지 만든다는 얘기도 들었다. 외모지상주의가 고착화된 사회 분위기 탓이라는 걸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다.물론 여기저기 도드라지는 까만 점 몇 개를 레이저로 지져내거나 여드름을 관리하는 것까지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 그 둘만 해결해도 얼굴이 한결 환해진다. 그런데 몰라서 그렇지 메이크업의 기본은 미소이고, 최고의 성형은 다이어트라는 말이 있다. 밝게 웃고, 꾸준히 절제하면서 살면 나만의 개성 있는 모습을 얼마든지 가꾸어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나를 만났을 때에도 얘기를 하지 않았다.’, ‘요즘 누리는 즐거움 중에 하나다.’, ‘그에게 사과를 해야지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문장을 흔히들 쓴다. 어떤가. 혹시 얼굴의 까만 점이나 여드름 자국 같은 게 보이지 않는가. ‘만났을 때에도’, ‘즐거움 중에’, ‘사과를 해야지만이’를 ‘만났을 때도’, ‘즐거움 중’, ‘사과를 해야’라고 쓰자는 말이다. ‘I am Ready 나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어느 포스터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뭣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했던가. 슬그머니 시비 내지는 딴지를 걸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군인 제복을 입은 젊은 여성 모델의 비현실적인 모습까지는 이해했다. 그런데 문법을 무시하면서까지 굳이 덧댄 영어 표기( ‘ready’라고 써야 할 걸)와, 여드름 같은 군더더기 단어는 별로였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의 ‘나만이’에서 ‘나만’에 붙은 보조사 ‘∼이’는 꼭 필요한 걸까. 그냥 ‘나만’을 써도 뜻을 전달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짧은 영어 문장으로 다시 눈이 간다. 남의 나라 말처럼 간결하게 쓰면 좀 좋을까. ‘나만의 선택’ 같은 식으로…. 새겨둘 일이다. 얼굴의 까만 점이나 여드름 자국 같은 군더더기를 빼내야 좋은 문장을 쓸 수 있다는 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11-07 23:02

긍게 어쩌라고…? 신호대기를 하다가 앞차 유리창 한쪽에 적힌 ‘까칠한 아기가 타고 있어요!’를 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꼬마 공주들이 타고 있어요!!’라고 적힌 것도 있었다. 이건 숫제 한술 더 뜨지 않았는가. 저한테나 귀한 딸이지, 남들한테도 공주일까. 조금 빈정거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랬다.그런 문구는 ‘초보운전’에서 비롯되었지 싶다. 그건 초보 운전자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게 진화를 거듭하다 보니 나온 게 ‘어제 면허 땄어요’,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당∼’, ‘sorry 장롱면허’ 따위일 것이다. 거기까지는 애교로 보아줄 수 있었다. 그런데 ‘까칠한 아기’니 ‘공주’ 따위를 적어 붙이면 그걸 바라보는 다른 운전자는 어쩌라는 건가. ‘꽃미녀 타고 있음 예쁘게 봐주세용∼’은 한술 더 떴다. 하긴 ‘절세미녀가 타고 있어요!’도 보았으니 그만하면 말 다했다. 지가 저더러 꽃미녀라네? 절세미녀라고? 예쁘면 뭐든 다 용서된다는 해괴망측한 말까지 떠오른 적도 있다. 시속 120km로 달리는 차를 F1 경주대회처럼 지그재그로 추월해서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어르신께서 운전하고 계심’은 또 어떻게 설명할까.배배 꼬인 눈동자에서 힘을 좀 빼보기로 했다. 다 받아들이기 나름이라지 않았던가. 까칠한 아기든 꼬마 공주든 더없이 귀엽고 소중한 아이들을 자주 태우고 운행하는 차겠지. 이 순간에도 그런 아이들이 뒷자리에서 젖병을 물고 있을지도 몰라. 젊은 엄마나 아빠가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 뭐. 돈 드는 일도 아니잖아? 그런 상상을 하면서 빙긋 웃다 보니 신호대기하는 잠깐의 무료함을 덜 수 있었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가 내게 건넨 말을 못마땅하게 여기기 앞서 그 속뜻을 먼저 헤아리는 것이다. ‘역지사지’야말로 세상살이의 금과옥조다. ‘내가 타고 있지롱∼ 운전은 안 하니까 걱정하지마’ 옆에 그려진 젖병과 기저귀 찬 아기, 귀엽지 않은가.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10-31 23:02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성철 스님께서 남긴 말씀이다. 천지간 삼라만상이 저마다 존재 의미를 갖고 있으니 산을 물이라 우기지 말고, 물 또한 산이라고 억지를 쓰지 말라는 뜻이 그 안에 담겨 있다. 한마디로 욕심을 버리고 순리에 따라 살아가라는 것인데, 그분의 깊은 뜻이야 헤아려 처신하되 문장만은 이런 식으로 쓰지 말 일이다.그림 속의 ‘이 프로그램은 모든 연령이 시청할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는 대부분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문장이다. 우리나라 TV 방송사에서는 새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직전에 이런 걸 먼저 보여준다. 프로그램 내용에 따라 봐도 무방한 연령대를 미리 지정해서 안내해 주자는 뜻일 게다. 그런데 공영방송에서 문장을 이런 식으로 써도 되는지는 의문이다.문장에는 주어와 서술어가 있다. 이 둘은 문장의 뼈대를 이룬다. 그 종류는 크게 세 가지다. 무엇이 어찌한다(나는 사랑한다), 무엇이 어떠하다(누나는 예쁘다), 무엇은 무엇이다(이것은 책이다)가 그것이다. 이걸 확장시켜서 ‘나는 그녀를 몹시 사랑하고 있다’, ‘누나는 코하고 입술이 특히 예쁘다’, ‘이것은 할아버지께서 내게 물려주신 책이다’와 같이 쓴다.그림 속 문장의 경우 세 번째 틀에 해당된다. 이 문장의 주어는 ‘이 프로그램은’이다. 물론 서술어는 ‘프로그램입니다’이다. 그런데 주어와 서술어에 ‘프로그램’을 반복해서 썼다. 매우 좋지 않은 글쓰기 습관이다. ‘이 노래는 가왕 조용필이 작사 작곡해서 부른 노래다’, ‘그의 모습은 내 모습 같다’와 같은 식으로 쓰지 말라는 것이다.앞서 보았던 ‘이 프로그램은 모든 연령이 시청할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는 ‘이 프로그램은 모든 연령이 시청할 수 있습니다’라고 ‘프로그램’ 하나를 빼고 써야 옳다. 물론 거기 크게 적힌 순우리말 ‘누구나’를 살려서 ‘이 프로그램은 누구나 시청할 수 있습니다’라고 쓰면 더 좋겠지만….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10-24 23:02

방송국 아나운서들 있잖아요? 아, 대왕께서는 ‘방송국’이나 ‘아나운서’를 잘 모르시겠구나. 아무튼요, 그 사람들 말이죠, 걸핏하면 뉴스 시간에 ‘달(達)한다’를 입에 달고 살거든요? ‘참석자가 100여 명에 달한다’, 뭐 이런 식으로요. 그 ‘달한다’를 순우리말 ‘이른다’라고 바꿔 써주면 좀 좋을까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제 말이 맞죠?지난겨울에도 그랬어요. 못된 작자들 때문에 엄청 많은 시민들이 광장에서 추위에 떨었거든요. 그 사람들도요, 기자들이 녹음기를 들이댈 때마다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臨)하겠습니다’라고 그러더라고요? 사실은 ‘그녀’도 그랬거든요. 그런 말버릇도 고쳐야 해요. 앞으로는 ‘검찰 조사를 성실히 받겠습니다’라고 쓰지 않으면 혼쭐을 내겠다고 해주세요. ‘앞으로는’을 쓰고 보니 생각나는데요, 다들 ‘앞으로’라고 쓰면 될 걸 굳이 ‘향후(向後)’라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들도 회초리로 종아리에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때까지 때려주세요. ‘조식(朝食)’, ‘중식(中食), ‘석식(夕食)’을 알리는 행사 진행자들이나 음식점 주인들한테도 기껏 한 글자 차이니까 ‘아침밥’, ‘점심밥’, ‘저녁밥’으로 고치라고 타일러주세요.참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가까운’이라고 쓰면 될 것을 굳이 ‘인접(隣接)한’이라고 쓰는 걸까요. 어느 식당에 갔더니요, ‘조리시간은 약 30분 정도 소요(所要)됩니다’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소요’되다니요. 하긴 다들 그렇게 써요. ‘서울까지 소요시간’처럼요. 이러다가 순우리말 ‘걸립니다’는 사라지지 않을까요? ‘종료(終了)되었다’라는 말도 그래요. ‘끝났다’가 있거든요.나랏말씀이 중국 것(한자)하고 달라서 한글을 맹갈으셨다고 하셨잖아요. ‘어린 백셩’들을 위해서요. 제가 떠오르는 대로 몇 가지만 말씀드렸는데요, 그 ‘어린 백셩’들이 한자말을 하도 많이 써서 순우리말은 씨가 말라가고 있다는 거 혹시 아세요? 아, 그림의 ‘셈하는 곳’은 뭐냐고요? 조선족이 모여 사는 중국 어느 도시의 음식점에서 발견한 거랍니다. 얼마나 정겹던지요.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10-10 23:02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리포트는 원고지에 펜으로 써서 작성했다. 쓰다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쓰기도 부지기수였다. 작성한 리포트는 까만색 철끈으로 묶어서 담당 교수의 연구실로 갖고 갔다. 교수가 부재중일 때는 다시 방문하는 번거로움도 기꺼이 감수했다.대학생 K는 리포트를 들고 담당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간다. 노크 따위는 생략하고 문을 벌컥 연다. 마침 교수가 책상에 앉아 있다. K군은 화난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문 채 성큼성큼 걸어가서 과제물을 책상에 던져놓는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없이 연구실을 유유히 걸어 나온다.이런 일이 가능할까. 누군가의 방에 들어갈 때 노크는 상식일 것이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서 교수와 눈이 마주치면 리포트를 제출하러 왔다고 말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내키지 않아도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 한마디쯤은 건네고 연구실을 나와야 하는 거 아닐까.그런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그렇긴 한데 리포트를 작성하는 방법이나 전달하는 양상이 과거와 달라지면서 앞서 봤던 K군 같은 이들이 적지 않다.요즘은 대부분의 리포트를 PC로 작성한다. 그걸 프린트해서 제출한다. 담당 교수에게 이메일로 전송하는 게 일상화되어가는 추세이기도 하다. 직장의 동료나 선후배들 사이에도 ‘파일첨부’ 기능을 활용해서 문건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들 중에는 K군과 같은 이들이 의외로 많다. 달랑 파일만 첨부해서 보내면 그걸로 끝이다. 이메일로 리포트를 전송하면 담당 교수의 ‘받은 편지함’에 보낸 사람 이름이나 아이디와 함께 제목도 뜨게 되어 있다. 그런데 달랑 ‘제목 없음’이다. 심지어는 이걸 누가 보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어떤 문건을 전송할 때 짧은 인사말을 몇 마디라도 곁들이면 좀 좋을까. ‘선배님, 지난번에 말씀하신 자료를 이제야 찾았네요. 도움이 많이 되었으면 해요. 조만간 한번 뵐게요.’와 같은 식으로…. 이런 정도로만 써도 서로 소통하는 즐거움을 나눌 수 있겠다 싶어서 하는 말이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09-26 23:02

놋그릇이나 놋숟가락이 귀한 시절이 있었다. 값싼 양은이나 스테인리스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기(鍮器) 제품은 집안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 우리 밥상에는 방짜 유기가 제격이다. 놋그릇은 깨진 기왓장을 잘게 빻은 가루를 묻혀 짚수세미로 쓱쓱 닦았다. … 하얀 광목천으로 마른 행주질을 하면 놋그릇의 표면에 거무튀튀한 이끼처럼 끼었던 녹이 어디로 가버리고 햇살 아래 찬연한 광채가 빛나곤 했다. 그럴 때면 햇살이 놋숟가락에서 튕겨 나와 내 눈썹 사이를 만지작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귀한 놋숟가락이 어떤 사연으로 누룽지를 긁는 데 사용하는 허드레 물건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윗대로부터 대대로 써내려오다가 숟가락으로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질 즈음에 가마솥 바닥의 누룽지를 득득 긁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무나 감자 껍질을 벗길 때에도 한 귀퉁이가 닳은 놋숟가락만한 게 없었다. 붕어 같은 물고기 배를 딸 때도 요긴하게 쓰였다. 게다가 놋숟가락은 살균 효과가 탁월하고 독성 있는 음식에 닿으면 까맣게 변해버린다고 한다. 이 총명하고 아름다운 놋숟가락을 본 지 오래되었다. 그것은 손잡이가 달린 예쁜 반달이었다.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이다.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은 산문도 맛깔스럽게 쓰는가 보다. ‘햇살이 놋숟가락에서 튕겨 나와 내 눈썹 사이를 만지작거리는 것 같았다.’와 같은 문장은 그만이 쓸 수 있는 표현이지 싶다. ‘손잡이가 달린 예쁜 반달’도 마찬가지다.이 짧은 글에 쓰인 단어 하나가 유독 눈에 띈다. 두 번째 문단 첫머리의 ‘그런데’다. 우리는 글을 쓸 때 ‘그러나’, ‘따라서’, ‘즉’ 따위의 접속부사를 자주 끌어들이곤 한다. 문장과 문장을 매끄럽게 연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가끔은 그걸 생략하는 게 오히려 글 읽는 맛을 더해주기도 한다. 그 까닭이 궁금하면 의 ‘그런데’를 빼고 다시 읽어 보라.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9-19 23:02

행복하려면 당연히 건강해야 한다. 안정적인 직업과 소득도 필수적이다. 취미처럼 즐겁게 일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한껏 발현하는 가운데 고소득까지 얻을 수 있다면 물론 금상첨화다.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기쁨과 고통을 기꺼이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도 있어야 한다. 행복의 조건은 그 수를 헤아리기가 한도 끝도 없지 싶다.행복을 추구하는 모양은 저마다 다르다. 돈이나 명예를 우선순위에 두는 이들이 참 많다. 사랑이 첫 번째 조건이라고 믿는 이들도 적지 않다. 누가 뭐라 해도 ‘신간’ 편한 게 제일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언필칭 ‘무욕’과 ‘무소유’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축에 드는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우리보다 훨씬 높게 나오는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 ‘행복 바이러스’에도 3단계 영향 규칙이 있다고 한다. 친구가 행복하면 내가 행복해질 확률이 15% 올라간다는 것이다. 친구의 친구가 행복하면 10%, 그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도 6%다. 부모의 형제의 자제인 사촌이 논을 샀다는 소식을 들으면 축하의 박수를 보내면서 행복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배가 아픈 건 6%를 뺀 나머지 94% 때문일까.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순전히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 걸 보면 행복은 상대적 개념인 것 같다. 너를 디뎌야 내가 올라설 수 있다고 가르쳐 온 우리의 경쟁교육 시스템이 어릴 적부터 그런 의식을 뿌리내리게 만들었을까. 요즘 세상에 ‘안분지족(安分知足)’을 강조하는 건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라는 걸 모르고 하는 말은 물론 아니다.좀 손해 볼 줄 아는 사람, 지위는 높지 않아도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가운데 뿌듯한 보람을 찾을 줄 아는 사람, 더 가진 걸 내세우는 대신 자신보다 덜 가진 이웃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을 친구로 곁에 두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으로 읽었다. 어느 카페 벽에 걸린 ‘행복한 사람을 친구로 사귀렴’을….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9-12 23:02

어느 치킨집 벽을 보니 ‘닭이 방금 있었던 일을 망각하는데 걸리는 시간 7초’라고 적혀 있었다. 웃자고 썼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닭의 지능이 그렇게 낮았나? 하긴 ‘닭대가리’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망각하는데’는 올바르게 띄어 쓴 걸까. 가려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망각하는데’의 ‘데’를 띄어서 ‘망각하는 데’라고 써야 한다. ‘형은 공부하는데 너는 뭐해?’와 ‘형이 공부하는 데는 어디지?’에 쓰인 ‘데’를 비교해보면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어미로 쓰이는 ‘∼데’는 앞 문장처럼 붙여 쓴다. 하지만 ‘거기’, ‘곳’과 같은 뜻의 장소를 나타내는 ‘데’는 의존명사이므로 앞말에 반드시 띄어 써야 한다. 덧붙이자면 ‘지’와 ‘만’도 흔히들 잘못 띄어 쓰는 말이다. ‘재활훈련을 시작한지 6개월만에 완투승을 따냈다.’를 보자. 이 문장에서는 ‘시작한지’의 ‘∼지’와 ‘6개월만에’의 ‘∼만’을 앞말에 띄어서 ‘시작한 지’, ‘6개월 만에’라고 써야 한다. 둘 다 일정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의존명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난 지 100일째’,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써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정도는 붙이거나 띄어 쓰거나 뜻은 다 통하니까 무방한 것 아니냐고? 과연 그럴까.어느 신문기사의 제목을 보니 ‘광주FC 새 감독 확정, 1년만 컴백’이라고 적혀 있었다. 무슨 뜻일까. 두 가지다. 하나는, 감독 생활을 더도 말고 1년 이상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너만 가도록 해라.’의 ‘∼만’과 쓰임이 같다. 다른 하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감독 생활 쉰 기간이 1년이라는 뜻이다. 제목대로라면 첫 번째가 맞다. 그런데 기사 내용은 후자 쪽이다. 그럴 때는 ‘1년 만 컴백’이라고 ‘만’을 띄어 써야 한다. 물론 ‘1년 만에’라고 써주면 더 정확해진다.그간의 복잡한 일을 정리하고 앞으로는 선수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쓰러지는 그날까지 의욕적으로 일하려고 마음먹은 그 감독이 ‘1년만 컴백’이라는 제목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오피니언 | 기고 | 2017-09-05 23:02

“자, 다들 밥값은 걱정 말고 각자 먹고 싶은 걸로 맘껏 시켜들….” 모처럼 한턱 쏘겠다면서 부하직원들을 데리고 중국집에 도착한 사장님께서 그렇게 호기를 부리는가 싶더니 다들 메뉴판을 들여다볼 틈도 안 주고 한마디 덧붙인다. “난 짜장!”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하직원들,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속으로 이렇게 투덜거리겠지. “아∼놔!”요즘 말로 일종의 ‘갑질’ 행태 중 하나를 빗댄 이야기일 터, 문제는 ‘자장면’이다. 짜장면의 본디 이름은 ‘작장면(炸醬麵)’이다. 중국식으로 소리 내면 ‘자지앙미엔’ 혹은 ‘짜지앙미엔’이다. 그걸 줄여서 부른 게 ‘자장면’하고 ‘짜장면’이다. 굳이 따지면 둘 다 우리말이 아니다. 하긴 그 넓은 중국 땅 어디를 가도 우리가 먹는 것과 똑같은 짜장면은 찾기 어렵다.우리 식으로 개량해서 즐겨 먹어 왔고, 또 범국민적 사랑까지 받고 있으니 짜장면도 이제는 우리 음식이라고 할만하다. 이름도 마찬가지다. ‘자장면’이든 ‘짜장면’이든 한자로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 이미 우리말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한동안 ‘자장면’만 표준어로 인정해 왔다. 표준발음규정을 공정하게 적용하다 보니 그리되었다는 국립국어원 쪽의 설명이다.오랫동안 탄압받았던 ‘짜장면’이 비로소 햇빛을 보기 시작한 게 2011년 8월부터다. ‘짜장면’도 ‘자장면’처럼 표준어로 인정한 것이다. 둘 다 표준어니 여태도 ‘자장면’을 고집하는 이들을 탓할 생각은 물론 없다. 그들은 혹시 ‘짜장면’이 품격 떨어지는 소리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어느 정치 집단처럼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모르고 있거나….철가방 전문 동네 중국집일수록 ‘짜장면’을 적극 선호한다. 까닭은 하나다. ‘자장면’은 입맛이 별로이기 때문이다. “2017년 9월부터 자장면은 완전히 버리고 짜장면만 표준어로 인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의 서민들 절대다수에게 친근한 이름이니, 국립국어원에서 이참에 두 눈 딱 감고 그런 발표나 한번 해주었으면 싶을 때가 가끔 있다.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8-29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