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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315건)

몇 년 전 여름 전주의 불볕더위가 대구 분지를 앞지르며 연일 전국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 도시의 난개발 공사로 숲이 훼손되고 아파트 난립으로 바람길이 막혀서 그렇다며 시민들의 불만이 높았다. 더욱이 상대적으로 낙후되다 보니 다른 도시로의 인구 유출도 막아내지 못한 채 재정 자립도가 전국 최하위를 면치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도시, 그리고 정겹고 아름다운 내 고향 전주를 사랑한다.태어나서 자라고 배운 내 고향 전주는 멋과 맛으로 이름난 예향의 도시다. 이름에 걸맞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다정다감하고 유순하였으며 학자와 양반의 풍모를 지녀 어린 시절만 해도 이름난 교육도시였다. 그리고 그 규모로도 전국 5대 도시에 들었었다.그런데 언제부턴가 산업화 바람으로 도시들은 공장이 들어서 검은 연기를 내뿜고 빌딩들이 치솟기 시작했으며 몰려드는 인구를 소화하기 위해서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리하다 보니 도시들이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전주의 규모는 후순위로 밀려났지만 나는 별로 부럽지 않았다. 오히려 발전은 좀 더디지만, 비교적 맑은 공기와 적당한 문화 공간이 있고, 체계적이고 부족함 없는 의료시설과 편리한 교통 등은 내 정신적, 육체적 삶을 전혀 불편 없는 전주가 좋았다. 도시가 아담하여 길거리를 나가면 정겨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도시 풍경도 소박해서 아름다웠다.사변 뒤의 어린 시절은 나무들이 주 연료여서 산의 나무들은 물론 심지어 풀조차 남아나지 못했다. 중학교 때 선생님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우리나라 민둥산의 사진과 부강한 나라의 울창한 숲을 비교하여 보여주며 우리나라 산에 나무를 심기를 역설하시곤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크게 실감하지 못하고 먼 나라 그림으로만 받아들였다.하기야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때도 까맣게 물들인 군복 하나 입고 어깨에 힘주던 시절,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청춘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산사태를 연례행사처럼 받아들이기만 했지 잘 먹고 잘사는 일이 무엇이며 ‘참살이’가 무엇인지 알 리가 없었다. 당시는 한 뼘의 빈 땅이라도 있으면 화초보다 채소 한 포기 심는 일을 더 중히 여겼다. 푸른 산이 국력이라며 학창 시절부터 직장인이 되어서까지 꾸준했던 나무 심기는 그나마 애국심으로 뭉쳐진 선각자들의 산림정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마다 식목일 즈음이면 소나무와 잣나무 묘목을 들고 나무 심기 행사에 나섰던 내 등 뒤로 따사롭게 내리던 봄 햇살이 학창시절의 그리움으로 되살아난다.그런데 이제는 어디서고 녹음 짙은 울창한 숲이 나를 반긴다. 푸른 숲에 들어서서 적당한 숨을 몰아쉬면 빈 의자는 넉넉한 마음으로 내게 쉴 자리를 내어준다. 햇살을 품은 초록과 연두 잎은 영롱한 빛으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 내게 다가오며 평화를 준다. 내 몸 안의 모든 찌꺼기가 다 빠져나가는 청량감을 준다.요즘 들어서는 삭막했던 길거리에 푸른 숲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구간마다 융단처럼 돋아난 새파란 잔디에 내 눈의 피로를 씻는다. 많은 이들의 노력이 내 고향 전주를 아름답게 바꿔가고 있다. 전주, 바로 이곳이 ‘참살이 생활’을 추구하는 진정한 우리네의 삶터다. 여름 불볕을 사정없이 되쏘는 포장길에서 강렬한 태양으로 헉헉거리며 뜨거운 숨을 잠시 쉬어갈 도심의 가로수 길은 사막의 오아시스요, 생명수다.△김덕남 씨은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했다. ‘에세이스트’로 등단했고 아람수필문학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물사랑 공모전 은상, 글벗문학회 동상을 수상했다. 수필집으로 가 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8-01-26 23:02

산책은 몸과 마음을 한결 가뿐하고 개운케 한다. 나는 가끔 황방산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산책을 한다. 그런데 매일 같이 다니면서 가끔 산의 모습이 다른 걸 느끼게도 한다. 여느 날과 달리 발걸음을 재촉하며 하산하는 산모롱이에서 서녘 하늘의 노을 지는 풍경을 만났다. 우연히 마주친 일몰의 풍광. 발걸음이 멎었고 내 가슴은 벅차올랐다.서해의 낙조도, 망해사의 일몰도 아니지만 참으로 아름답다. 오늘 하루의 시름을 안고 산 너머로 떨어지는 또렷한 윤곽의 붉은 해,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모습이 아닌가. 지는 해가 가슴에 불을 놓는 듯하여 오늘 하루도 무사함을 감사하며 완전히 기울 때까지 바라보았다. 화가라면 한 폭의 그림으로, 시인이라면 한 편의 시를 남길 수 있을 텐데…. 노을에 사로잡힌 마음을 추스르며 내려오니 대지의 미물들은 귀가를 서두르라고 덩그런 조명들을 켜 준다.일몰에 취한 나는 마음까지 노을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일몰인가, 일출인가 분간할 수가 없다. 절정에 달한 붉은 일몰을 보노라니 일출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우연히 볼 수 있는 일몰에 비해 일출은 기다림이 따른다는 것 외에 거의 같았다.너무도 아름답게 내리는 낙조의 찬란함은 밝음의 끝이고, 어둠의 시작이다. 내일을 열기 위해 고요를 꿈꾸며 사라지려는 찰나다. 한 폭의 거대한 그림이 덮인다. 장편의 시를 읽은 것 같다. 이 순간을 홀로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구름밭 같기도 하고 해면 같기도 한 산 능선 너머로, 주황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노을 속으로 태양이 미끄러지듯 잠겨 버린다. 순간 서서히 어두운 빛이 내리기 시작하고 허정 무심한 마음이 된다. 산의 정적을 뒤로하고 차들이 숨 가쁘게 달리는 신작로로 내려왔다. 차들의 소음과 전조등이 얽히고설키는 대로를 향해 나왔다. 귀가를 서두르는 차들의 불빛 행렬과 아파트 빌딩 사이로 스러져 가는 노을빛이 번득인다.인생의 황혼도 저처럼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풍경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새삼스레 내 인생의 황혼빛은 어떤 색깔일까. 생각해 보며 그저 꿈에 그리던 고고 지순한 삶이 어른거린다. 삶은 연습이 아니다. 정말 내 인생의 황혼에 서서 당당하게, 후회 없이, 아름답게 살았노라 말할 수 있을까.어느 여름날, 후배의 시집 출간 기념 모임이 있었다. 뒤풀이로, 청운사 하소백련지에 다녀오는 길에 선생님의 노모를 뵈러 갔다. 가지고 간 시집을 드렸더니 책표지의 소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 “이건 그냥 노송이 아니다.”고 말문을 여셨다. 노송의 등걸과 가지마다 한 여자의 일생이 살아 숨 쉬는 게 보이시는 듯 “자식은 여자가 가르치는 거지. 노송 한 그루에 길이 있고, 자식이 있지. 어머니의 마음 씀씀이를 보면 자식들의 사람 됨됨을 알 수 있는 거야.” 소곤소곤 속삭이듯, 소나무 등걸을 마디마디 짚으신다. 그 모습이 꼭 친정어머니 같았다. 그림은 글을 쓰듯 그리고, 글을 그림 그리듯 쓰라는 말같이 책 표지만 보시고도 한 편의 수필을 줄줄 읊으신다.요즘 노인들을 볼 때마다 ‘저게 바로 내 자화상이지’하고 생각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 느끼는 그 많은 자화상을 보며 스스로를 반추해 본다. 향기롭게 늙어 가는 선생님의 노모. 그 모습이 먼 훗날 내 모습이라면 좋겠다. 그러면 열심히, 멋지게 살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노을에 묻혀 집을 향해 걷는 동안 노을 덕분에 노년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김연주 씨는 교직에서 퇴직한 수필가·아동문학가다. 소년문학 신인상과 작촌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전북문인협회, 색동어머니 동화구연가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8-01-12 23:02

덤의 사전적 의미는 제값 외에 조금 더 얹어 주고받는 것을 말한다. 본디의 물건이나 일에 딸린 것으로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무방하다. 그런데 이 덤이 사람 사이에도 존재하여 때로는 각박한 삶에 온기를 감돌게 한다.나는 덤을 좋아한다. 우선 공짜라는 게 마음에 든다. 세상에 공짜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내가 덤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정 때문이다. 그런데 주는 이가 알아서 얹어주는 덤은 마음에 정이 얹혀 그 의미를 배가시키지만, 받는 이가 빼앗듯이 받은 덤이나 상술에 의한 덤은 변질된 덤이라 받고도 불쾌한 경우가 있다.가을이면 들녘에서는 여문 곡식들을 거두어들이느라 바쁘다. 풍성한 수확 뿐만 아니라 기쁨도 따라 들어온다. 요즘에는 농기계가 척척 알아서 거두어주는데 예전에는 농부들의 발걸음은 멈칫거릴 새가 없었다. 어린 시절의 가을 들녘이 떠오른다. 오직 손과 땀만으로 거두어야 했던 그 시절 어른들은 허리춤 한 번 추켜올릴 겨를이 없었다. 오죽하면 부엌에 있던 부지깽이도 뛰어나오는 때라고 했을까. 아직도 그 시절 농부들의 등짐 행렬이 눈에 선하다.마지막 볏단이 마당에 들어올 무렵이면 저녁상을 챙기는 어머니의 손길도 빨라졌다. 하루 일을 마친 농부의 밥상에 놓일 밥그릇을 채우는 과정은 작은 의식처럼 보였다. 밥을 꽉꽉 눌러 담는 것도 모자라 덤을 얹고 또 얹었다. 그 위에 정성이라는 덤까지 한 겹 더 얹음으로써 완성된 것이 고봉밥이었다. 정량보다 넘치게 담아 올린 덤은 마음의 증표였다. 덤 위에 주는 사람의 마음이 실리는데 크기나 양의 많고 적음이 무슨 상관이랴. 추억 속에 남아 있는 고봉밥의 덤은 내가 겪어온 덤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일하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덤을 만날 수도 있다. 그것은 그냥 얻어걸린 작은 부산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덤이 내 마음속까지 이르러 따뜻한 여운으로 남는다면 그것은 영양 만점의 덤일 될 것이다.내가 수필을 쓰기 시작하였던 과정도 그렇다. 나는 평소 관심이 많았던 수필 쓰기를 제대로 배워보려는 목표로 평생교원원에서 수필 쓰기 과정을 차근차근 밟으면서 늦었지만, 반드시 해내리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다녔다. 그런데 과정을 마치기도 전에 슬슬 덤이 붙기 시작했다. 강의 시작 전에 차를 마시며 나누는 일상 이야기들은 그날 수업의 워밍업 역할을 해 주어 교수님의 맛깔 나는 강의에 절로 빠져들게 된다. 작지만 소중한 칭찬 거리를 주고받다 보면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는 것을 실감한다.한 수강생이 나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50여 년 전의 학창시절을 반추해보기도 한다. 등단 축하 케이크를 한 입 먹으며 나도 언젠가는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다짐도 해본다. 이것이 내가 얻은 소중한 덤들이었다. 애당초 덤까지 생각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덤은 점점 쌓여갔다. 때로는 이러다간 덤이 본체보다 더 커지지 않을까 하는 유쾌한 걱정도 했다.요즘도 인정 많은 사람들 사이에는 덤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 나에겐 좀 더딘 걸음으로 왔으면 하는 덤이 하나 있다. 김광림 시인은 ‘덤’이라는 시에서 나이 예순이면 살 만큼 살았다고 썼다. 나머지 인생은 덤이라는 것이다. 지금 덤으로 살고 있는 나는 그 덤이 얼마나 될까?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덤이 좀 더디게 오기를 바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문경근 수필가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했다.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해 전북문인협회와 정읍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학교 잘 다녀왔습니다〉가 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12-29 23:02

TV를 보는데 골목에 들어서는 여자 운전자의 백미러에 고의로 팔을 부딪치며 교통사고라고 떼를 쓰는 사기꾼의 모습이 꼭 초보 운전 시절 내 모습 같았다. 여자가 운전을 하면 곧 사고로 이어진다는 남편의 편견 때문에 한참 후에야 장롱면허증을 꺼내 운전을 시작했다. 차 뒤 유리창에 ‘초보운전’이라는 딱지를 훈장처럼 붙이고 다니면서 모든 사람이 나를 배려해주리라 믿었다.도심을 빠져나와 시골길을 지나 약 1시간 이상을 달려야만 내가 근무하는 학교가 나왔다. 아직 미숙해서 시간은 조금 걸리지만,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길은 기쁨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났을 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그 사고가 났다. 동생을 태우고 관통로를 지나 명동사우나를 향해 서서히 우회전했다. 시속 5㎞도 안 되게 서행을 하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동생이 갑자기 사고가 났다며 소리를 쳤다. 내 눈에는 사고 차량이 보이지도 않아 무슨 차가 사고 났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사고를 낸 차는 바로 우리고 했다. 그러고 보니 덜커덕 소리가 났던 것도 같았다. 그래서 차 밖으로 나가보니 어떤 남자가 발을 절룩이며 소리를 치고 있었다.“아이고, 사람을 쳤네! 사람을 쳤어!”죽는소리를 하기에 놀라서 병원으로 가자고 하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6명이나 되는 남자들이 떼거리로 나를 둘러싸고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을 해댔다. 그 사이에서 갑자기 뚱뚱한 여자가 나타나서 “무슨 운전을 그따위로 하느냐?”고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으며 나를 밀쳐댔다.그런데 차에 치였다는 그 남자는 까만 봉지에 막걸리병까지 들고 비틀거리면서 발등이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다. 세상에, 자기가 부딪쳐 놓고 발등이 아프다니 이게 무슨 억지인가? 그래도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하는데 저희끼리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가버렸다.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한참 뒤에 나타나더니 마치 나를 범죄자처럼 을러대며 사고 조사를 했다. 그래서 자초지종 사고 경위를 말하자 그 사람들이 서신병원에 가서 교통사고환자 처리가 안 되자 효자동 병원으로 갔단다. 자기들에게 8시까지 병원으로 오라고 했으니 나도 가보라고 했다. 접수하러 온 경찰이 어떻게 그런 사정을 미리 다 알고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병원으로 가보니 낮에 으르렁대던 그 치기배들이 모여 술에 취해서 떠드는 게 영락없는 깡패들이었다. 그리고 의사도 경찰도 모두 한통속처럼 보였다.나는 치기배고 사기꾼이 분명하니 고발을 하자고 했으나 남편과 보험회사 직원은 그냥 조용히 사고처리를 하자고 했다. 이유는 내 차 번호를 알고 있기 때문에 어디서 다시 행패를 부릴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분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순응했다. 그들은 서울로 정밀검사 하러 간다며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지만 더는 상대할 수 없어서 보험회사에 맡겼다. 지금도 TV 뉴스에서 아직도 여자 초보 운전자들이 범죄의 표적이 되는 것을 보면서 여인들이여, ‘초보운전’은 위험천만한 표시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큰 소리로 말해주고 싶다.그래도 요즈음은 옛날과 달리 마음대로 사기를 칠 순 없는 세상이 오고 있다. 설령 사기행각을 벌였다 해도 CCTV와 블랙박스로 대부분 들통이 나니 불행 중 다행이다. 모두 열심히 노력해서 바르게 살아가는 세상은 언제나 올까? 하루빨리 정직한 사회가 되어 걱정 없이 살아가려는 날을 기다려 본다.△양영아 수필가는 초등교사로 정년퇴직 했으며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수필문학회, 영호남수필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가 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12-22 23:02

열심히 자판기를 두드리고 있는데 안방에서 다급히 부르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고 급히 갔더니, 아내는 TV 토론 프로그램을 시청하던 중 한 제자의 얼굴을 보고 나를 불렀다. 고등학교 3년 동안에 두 번이나 담임을 했던 제자였다. 성적이 우수하고 다방면에 다재다능하였는데 졸업 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고, 지금은 모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아내는 그 제자가 TV에 출연할 때마다 나를 부르며 ‘훌륭한 제자를 두어서 좋겠다’는 말을 한다. 나도 그 말을 들으면 흐뭇해서 그냥 웃기만 한다.교육이란 미숙한 사람들에게 인간답게 살며 사회와 국가에 필요한 지·덕·체를 갖추도록 가르치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이다. 그런데 나는 가끔 바람직한 인간이란 어떤 사람을 이르는 말인가를 생각해본다. 인생은 유수와 같다는 속담이 있다. 흐르는 물은 장애물을 만나면 흐름을 멈춘다. 그러다가 한곳에 오래 머무르면 오염되고 부패한다. 그래서 부패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며 새로운 물과 동화하여 변화를 꾀한다. 이것이 물의 자정작용이다. 물은 계속 흘러야 오염되지 않고 많은 생명체를 살리는 생명수가 된다. 인생은 오염과 정화를 반복하며 흐르는 물처럼 파란만장한 유수와 같다고 표현한다. 이런 생명수 같은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자들의 사명이다.필자도 깜냥에는 생명수와 같은 인간을 기르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교단에서 35년 동안 열심히 교육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올빼미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근무해도 지칠 줄을 몰랐다. 그만큼 학생들과 생활하는 것이 재미가 있었다. 주로 인문계고등학교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좋은 대학에 진학시키는 것이 목표였지만, 노력의 결과는 학년 말에 나타났다. 소위 사회에서 말하는 일류 대학에 합격시킨 숫자로 교사의 능력과 학교의 등급이 평가되기 때문이다.한때는 교육자가 된 것이 부끄러울 때도 있었다. 80년대 초까지는 즐겨 마시는 술의 종류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구분되었다. 회사원이나 타 직 공무원으로 있던 친구들은 값비싼 맥주를 마셨는데 교사인 나는 주로 값싼 막걸리를 마시며 호주머니를 헤아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세월이 어느새 정년퇴직을 하고 동창회 사무실에서 빈둥거리면서 옛날 맥주만 마시던 친구들은 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다가 맥주가 아니라 막걸리만 사줘도 감지덕지하며 내가 자주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인생 역전을 느낄 때도 있다. 어떤 때는 함께 술집에 가면 제자들이 나를 보고 쫓아와 ‘선생님’이라고 반가워하며 계산까지 해주는 모습을 보며 나를 우러러보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제는 교사가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년퇴임하고 막상 학교를 뒤돌아보았을 때는 허전하고 빈손 뿐이었다. 전인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극과 반응과의 관계로 정의되는 행동주의심리학의 학습이론을 맹종하며 행동의 변화를 강조하는 데에는 소홀했고 많은 양의 정보를 투여하는 데에만 급급 주입식 입시교육에만 열중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방송이나 신문지상에 나오는 제자들의 면면을 볼 때마다 일생을 교육에 몸담았던 교육자로서의 내 삶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고 자위할 때도 있다.쪽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청출어람처럼 제자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며 ‘보기에 참 좋다’를 연발하면서 흡족하게 미소를 지어 본다.△이희근 수필가는 ‘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중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했으며 수필집 , , 등을 출간했다. 전주문학상 문맥상을 수상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12-15 23:02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하늘 같은 가없는 은덕을 어디 대여 갚사오리. 정철의 시조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그러면 복을 받을 것이다.’ 성경 말씀이다. ‘지극한 도는 효순심(孝順心 : 부모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마음)이다.’ 불경 말씀이다. 필자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려서부터 효도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살아왔다.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한국이 인류문명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효(孝)사상이다”라고 했다. 유교에서는 효를 모든 행실의 근원으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효가 인(仁)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도덕 기준인 삼강오륜에도 ‘부자유친’이 첫 번째에 있다. 서양인들은 한국인의 이러한 ‘효’사상을 부러워하고 높이 평가한다.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났다. 은퇴한 부모들이 30여 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적응을 의미한다. 지금까지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가 가정의 관심사였지만 앞으로는 여기에 하다 더 “고령의 부모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가 집마다 큰 숙제로 다가왔다. 장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요즈음 핵가족 개념이 시험대에 올라있다. 베이비부머(Baby Boomer-가족계획 시대 태어난 세대)들이 고령화에 접어들었지만, 핵가족 개념이 시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어 부모를 섬기겠다는 젊은이들이 30%에 불과하다. 부모들이 큰돈을 벌어 놨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소셜시큐리티(Social Security-은퇴연금) 만으로 먹고살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정부연금만으로 생활하면 여생을 빈민층 수준에서 머물게 된다. 따라서 아버지들이 체면을 구기며 여생을 마쳐야 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자식들은 효도를 개인적인 의무에서 국가적인 의무로 넘기려 한다. 그러나 고령화로 인해서 세계 각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지금 진통을 앓고 있다. 2030년대부터는 연금이 바닥난다고 걱정이 태산이다. 결론적으로 장수 시대의 이 난제를 타결하려면 자녀들이 어느 정도 부모를 돌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따라서 효(孝)사상이 다시 21세기의 연구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효도 민족인 한국의 젊은이들은 요즈음 현대화의 물결에 너무 휘말려 예전의 효사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히려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현대화가 우리의 문화를 해체하여 서양문화에 동화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전통문화를 잃어버린 현대화는 현대화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심각한 문화적 위기다. 사실 효도란 자식들이 강조해야 할 덕이지 우리 부모들이 들고나오기에는 좀 어색한 과제다. 군신유의를 임금이 강조하는 뻔뻔함을 연상케 한다.필자도 돌아가신 부모님께 변변한 효도를 하지 못해서 ‘효(孝)’ 운운하려니 좀 쑥스럽다. 그러나 개인적인 효도와 민족문화로서의 효사상은 성격이 다르다. 한국인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재산을 하나만 꼽으라면 무엇일까. 역시 효사상이다.장자는 ‘공경하는 마음으로써 효도하기는 쉬워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효도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참된 효는 좋은 잠자리와 음식, 용돈에 있지 않다. 그보다 부모님의 뜻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해드리는 것,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에서 참된 효가 시작된다.△안도씨는 198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하여 현재 전라북도 국어진흥회, 전북예총 부회장과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문학관 관장으로 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12-08 23:02

시월의 끝자락에 운장산을 찾았다. 길섶 억새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잠자리 날개에 고요가 묻어난다. 능선과 능선 사이로 하늘이 청자색으로 말끔하다. 나는 느릿하게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산비탈로 단풍나무 붉게 물드는 데 길가 생강나무 한 그루 저 홀로 말간 치자색이다. 햇살 오라기들은 나뭇잎을 한잎 두잎 색칠하여 골짜기를 가지각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하루 이틀에 이토록 화사한 단풍으로 단장하였을까. 고운 빛을 내려고 봄여름 내내 색깔을 입히고 또 덧칠하였으리라. 언 땅을 뚫고 나오는 연두의 고통과 따가운 햇볕을 지나온 초록의 땀방울로, 단풍은 온몸을 오색으로 물들여 농익은 가을 빛깔을 천지 사방에 흩뿌리고 있다.오솔길을 따라 드문드문 쑥부쟁이 꽃이 연보랏빛으로 하늘거린다. 나무와 칡넝쿨이 엉클어진 모습은 사람이 머물지 않은 원시림 같았다. 나도 숲에 물들어 자연 속으로 스며들었다.폭포 소리가 쏴르르 귓가에 파고든다. 계곡으로 내려가 너럭바위에 앉았다. 높은 나무 위 박새 소리와 물소리에 젖어 단풍잎을 하릴없이 바라본다. 햇살에 투영된 나뭇잎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아리땁기만 한 단풍잎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픔이 많다. 산속의 수많은 풀벌레에게 받은 상처로 난 구멍일 것이다. 또 다른 목숨에 기운을 불어넣어 주느라 자신은 상처 입고 야위어 간다.몸집이 자그마한 우리 시어머니도 자식들 거두느라 온몸에 구멍이 생겼다. 자신은 돌보지 못하고 오롯이 자식과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어머니의 굽은 등. 긴 세월 삶에 절여져 몸속에 구멍 나는 줄도 모르고 살아온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시리다. 구멍 뚫린 당신의 육신을 디딤돌로 자손들은 나날이 푸르러가건만.나뭇잎에 뚫린 구멍도 저 홀로 살지 아니하고 서로 껴안고 견뎌낸 흔적이리라. 숲은 이렇게 동식물이 어우러져 살아가기에 아름다운 단풍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내려오는 길에 숲에 묻혀 사람의 발길이 뜸한 소沼에 들렀다. 숲속의 연못은 불쑥 찾아와 흙 묻은 발로 짓밟아도 말없이 나를 품어준다. 먼지에 찌들고 땀방울로 얼룩진 손을 씻어도 계곡물은 해맑게 나를 비춘다. 세사에 긁혀 움푹 파인 가슴에 푸릇한 물기가 차올라 마음이 청량해진다. 산속에 들면 계곡 물소리는 귀를 맑게 씻어 주고, 나무를 담은 내 눈은 초록 바다가 된다. 세상의 소리 아득히 멀어지고 숲에 물들어 내 영혼마저 순연해진다. 새 한 마리 산등성이 노을빛을 물고 날아간다.계곡의 청아한 물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도 다시 숲속으로 돌아가고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정상에 오른 쾌감보다 내 몸에 스며든 숲속의 향기가 더 좋다. 따라다니던 근육통도 땀에 절은 끈적거림도 없어져 담담하고 여유롭다. 그래서 선인들도 세속이 시끄러울 땐 숲을 찾아 무의구속에서 벗어나 심성을 함양하고 도를 실천하는 참된 삶의 바탕으로 자연과 일체를 추구하였구나 생각했다. 나는 어느새 나무가 되고 나무는 다시 내가 되며 숲은 한줄기 바람으로 넉넉한 새 울타리가 된다.△박일천 씨는 수필 전문지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토지문학상’ 수필 부문 대상을 받았다. 현재 샘문학회 회장으로 있으며, 수필집 , 가 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12-01 23:02

이사야 벌린이라는 영국의 사상가는 옥스퍼드를 나와 올 소올즈 칼리지, 하버드와 프리스턴대학에서 역사학과 철학을 강의했다. 그의 명작 중에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에세이가 있는데 고슴도치와 여우의 생태적 습성을 비교하여 우화화한 글인데 매우 재미있다.여우는 꾀가 많아 교활하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무수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수 있다. 반면 고슴도치는 오로지 막강한 가시방패 갑옷 하나로 무장하고 과묵하게 삶을 영위한다. 그렇다면 지략이 뛰어난 여우와 우직하게 살아가는 고슴도치의 대결에서 승자는 과연 누구일까?여우는 고슴도치가 방심한 틈을 타서 단번에 치명상을 입힐 지략을 세워 공략한다. 그러나 어김없이 빗나간다. 위험을 느낀 고슴도치가 여우의 기습을 감지하고 순간적으로 몸을 말아 방어망을 치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우는 고슴도치에 코가 찔려 혼비백산 물러나고 만다. 결국, 여우는 계획을 내일로 미룰 수밖에 없고 고슴도치는 눈을 반짝이며 으스댄다. 일상적 상식으로는 항상 지혜와 전략이 무쌍한 여우의 승리를 예상하지만, 승리는 언제나 고슴도치다.이사야 벌린의 이 우화를 통해서 역사적인 인물들을 분류해 봤는데 프로이드, 다윈, 마르크스 등은 고슴도치에 비유되고 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셰익스피어 등을 여우에 비유했다. 등식을 성립하는 논거의 핵심은 여간한 통독으로는 난해하여 해독하기 어려우나 읽는 중의 짐작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날의 국제적 인사들이 첨예하게 다투는 모습들을 비교하면 재미난 이야기가 될 법하다.촛불 혁명으로 새롭게 탄생한 문재인 대통령과 예상을 깨고 당선된 미국의 트럼프는 어떤 부류에 해당할까. 아마도 졸렬한 나의 소견으로는 우직하게 오직 나라의 안위와 적폐청산을 안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은 고슴도치에 비유해 본다. 반면 온갖 변화무쌍하고 현란한 난어로 세계의 언론에 가십거리를 양산하고 있는 트럼프는 여우과에 속하지 않나 짐작해 본다.트럼프가 한국과 더불어 일본 중국도 방문했다. 트럼프의 이번 동북아 순방은 여러 가지 목적을 추구하며 에어포스원에 올랐다. 특히 우리나라는 가장 짧은 체류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연설을 마치 대단한 선심성처럼 포장한 것은 교활한 여우의 지혜가 숨어 있었다.한미동맹, 대북정책 공조, 국방 방위산업, 경제 통상 투자 등을 망라한 7개 항의 공동언론발표문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이 올해부터 2021년까지 748억 달러에 이르는 대미 투자와 구매를 할 것이라는 내용도 담겼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문제에 대한 톤을 낮추고, 한, 미 FTA에 대한 민감한 표현을 피하면서 무기판매와 대미 투자 등 실속을 챙겼다는 분석도 나왔다.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만 알고 있다. 여우는 언제나 공격적이지만 고슴도치는 방어적이다. 여우는 지략을 정비하고 전략을 자주 바꾸어 줄기차게 공격을 하지만 고슴도치는 오직 한 가지 방어 전략만을 구상한다.우리도 이럴 즈음 아주 단순하게 고슴도치의 전략으로 막아내는 것은 어떨까.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복잡한 일에 가장 현명한 판단과 대처는 많은 꾀보다는 정당하고 정직하며 우직한 대응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불리하면 몸을 말아 버리는 고슴도치 전략이 결국 승리할 수도 있다. 동북아의 안보는 단순한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트럼프와 비슷한 여우 같은 아베도 있지만, 우리와 비슷한 고슴도치 같은 시진핑도 있기 때문이다.△양용모 씨는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외 수필집 5권을 냈다. 현재 전라북도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11-24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