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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76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성철 스님께서 남긴 말씀이다. 천지간 삼라만상이 저마다 존재 의미를 갖고 있으니 산을 물이라 우기지 말고, 물 또한 산이라고 억지를 쓰지 말라는 뜻이 그 안에 담겨 있다. 한마디로 욕심을 버리고 순리에 따라 살아가라는 것인데, 그분의 깊은 뜻이야 헤아려 처신하되 문장만은 이런 식으로 쓰지 말 일이다.그림 속의 ‘이 프로그램은 모든 연령이 시청할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는 대부분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문장이다. 우리나라 TV 방송사에서는 새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직전에 이런 걸 먼저 보여준다. 프로그램 내용에 따라 봐도 무방한 연령대를 미리 지정해서 안내해 주자는 뜻일 게다. 그런데 공영방송에서 문장을 이런 식으로 써도 되는지는 의문이다.문장에는 주어와 서술어가 있다. 이 둘은 문장의 뼈대를 이룬다. 그 종류는 크게 세 가지다. 무엇이 어찌한다(나는 사랑한다), 무엇이 어떠하다(누나는 예쁘다), 무엇은 무엇이다(이것은 책이다)가 그것이다. 이걸 확장시켜서 ‘나는 그녀를 몹시 사랑하고 있다’, ‘누나는 코하고 입술이 특히 예쁘다’, ‘이것은 할아버지께서 내게 물려주신 책이다’와 같이 쓴다.그림 속 문장의 경우 세 번째 틀에 해당된다. 이 문장의 주어는 ‘이 프로그램은’이다. 물론 서술어는 ‘프로그램입니다’이다. 그런데 주어와 서술어에 ‘프로그램’을 반복해서 썼다. 매우 좋지 않은 글쓰기 습관이다. ‘이 노래는 가왕 조용필이 작사 작곡해서 부른 노래다’, ‘그의 모습은 내 모습 같다’와 같은 식으로 쓰지 말라는 것이다.앞서 보았던 ‘이 프로그램은 모든 연령이 시청할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는 ‘이 프로그램은 모든 연령이 시청할 수 있습니다’라고 ‘프로그램’ 하나를 빼고 써야 옳다. 물론 거기 크게 적힌 순우리말 ‘누구나’를 살려서 ‘이 프로그램은 누구나 시청할 수 있습니다’라고 쓰면 더 좋겠지만….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10-24 23:02

방송국 아나운서들 있잖아요? 아, 대왕께서는 ‘방송국’이나 ‘아나운서’를 잘 모르시겠구나. 아무튼요, 그 사람들 말이죠, 걸핏하면 뉴스 시간에 ‘달(達)한다’를 입에 달고 살거든요? ‘참석자가 100여 명에 달한다’, 뭐 이런 식으로요. 그 ‘달한다’를 순우리말 ‘이른다’라고 바꿔 써주면 좀 좋을까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제 말이 맞죠?지난겨울에도 그랬어요. 못된 작자들 때문에 엄청 많은 시민들이 광장에서 추위에 떨었거든요. 그 사람들도요, 기자들이 녹음기를 들이댈 때마다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臨)하겠습니다’라고 그러더라고요? 사실은 ‘그녀’도 그랬거든요. 그런 말버릇도 고쳐야 해요. 앞으로는 ‘검찰 조사를 성실히 받겠습니다’라고 쓰지 않으면 혼쭐을 내겠다고 해주세요. ‘앞으로는’을 쓰고 보니 생각나는데요, 다들 ‘앞으로’라고 쓰면 될 걸 굳이 ‘향후(向後)’라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들도 회초리로 종아리에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때까지 때려주세요. ‘조식(朝食)’, ‘중식(中食), ‘석식(夕食)’을 알리는 행사 진행자들이나 음식점 주인들한테도 기껏 한 글자 차이니까 ‘아침밥’, ‘점심밥’, ‘저녁밥’으로 고치라고 타일러주세요.참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가까운’이라고 쓰면 될 것을 굳이 ‘인접(隣接)한’이라고 쓰는 걸까요. 어느 식당에 갔더니요, ‘조리시간은 약 30분 정도 소요(所要)됩니다’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소요’되다니요. 하긴 다들 그렇게 써요. ‘서울까지 소요시간’처럼요. 이러다가 순우리말 ‘걸립니다’는 사라지지 않을까요? ‘종료(終了)되었다’라는 말도 그래요. ‘끝났다’가 있거든요.나랏말씀이 중국 것(한자)하고 달라서 한글을 맹갈으셨다고 하셨잖아요. ‘어린 백셩’들을 위해서요. 제가 떠오르는 대로 몇 가지만 말씀드렸는데요, 그 ‘어린 백셩’들이 한자말을 하도 많이 써서 순우리말은 씨가 말라가고 있다는 거 혹시 아세요? 아, 그림의 ‘셈하는 곳’은 뭐냐고요? 조선족이 모여 사는 중국 어느 도시의 음식점에서 발견한 거랍니다. 얼마나 정겹던지요.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10-10 23:02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리포트는 원고지에 펜으로 써서 작성했다. 쓰다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쓰기도 부지기수였다. 작성한 리포트는 까만색 철끈으로 묶어서 담당 교수의 연구실로 갖고 갔다. 교수가 부재중일 때는 다시 방문하는 번거로움도 기꺼이 감수했다.대학생 K는 리포트를 들고 담당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간다. 노크 따위는 생략하고 문을 벌컥 연다. 마침 교수가 책상에 앉아 있다. K군은 화난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문 채 성큼성큼 걸어가서 과제물을 책상에 던져놓는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없이 연구실을 유유히 걸어 나온다.이런 일이 가능할까. 누군가의 방에 들어갈 때 노크는 상식일 것이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서 교수와 눈이 마주치면 리포트를 제출하러 왔다고 말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내키지 않아도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 한마디쯤은 건네고 연구실을 나와야 하는 거 아닐까.그런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그렇긴 한데 리포트를 작성하는 방법이나 전달하는 양상이 과거와 달라지면서 앞서 봤던 K군 같은 이들이 적지 않다.요즘은 대부분의 리포트를 PC로 작성한다. 그걸 프린트해서 제출한다. 담당 교수에게 이메일로 전송하는 게 일상화되어가는 추세이기도 하다. 직장의 동료나 선후배들 사이에도 ‘파일첨부’ 기능을 활용해서 문건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들 중에는 K군과 같은 이들이 의외로 많다. 달랑 파일만 첨부해서 보내면 그걸로 끝이다. 이메일로 리포트를 전송하면 담당 교수의 ‘받은 편지함’에 보낸 사람 이름이나 아이디와 함께 제목도 뜨게 되어 있다. 그런데 달랑 ‘제목 없음’이다. 심지어는 이걸 누가 보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어떤 문건을 전송할 때 짧은 인사말을 몇 마디라도 곁들이면 좀 좋을까. ‘선배님, 지난번에 말씀하신 자료를 이제야 찾았네요. 도움이 많이 되었으면 해요. 조만간 한번 뵐게요.’와 같은 식으로…. 이런 정도로만 써도 서로 소통하는 즐거움을 나눌 수 있겠다 싶어서 하는 말이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09-26 23:02

놋그릇이나 놋숟가락이 귀한 시절이 있었다. 값싼 양은이나 스테인리스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기(鍮器) 제품은 집안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 우리 밥상에는 방짜 유기가 제격이다. 놋그릇은 깨진 기왓장을 잘게 빻은 가루를 묻혀 짚수세미로 쓱쓱 닦았다. … 하얀 광목천으로 마른 행주질을 하면 놋그릇의 표면에 거무튀튀한 이끼처럼 끼었던 녹이 어디로 가버리고 햇살 아래 찬연한 광채가 빛나곤 했다. 그럴 때면 햇살이 놋숟가락에서 튕겨 나와 내 눈썹 사이를 만지작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귀한 놋숟가락이 어떤 사연으로 누룽지를 긁는 데 사용하는 허드레 물건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윗대로부터 대대로 써내려오다가 숟가락으로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질 즈음에 가마솥 바닥의 누룽지를 득득 긁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무나 감자 껍질을 벗길 때에도 한 귀퉁이가 닳은 놋숟가락만한 게 없었다. 붕어 같은 물고기 배를 딸 때도 요긴하게 쓰였다. 게다가 놋숟가락은 살균 효과가 탁월하고 독성 있는 음식에 닿으면 까맣게 변해버린다고 한다. 이 총명하고 아름다운 놋숟가락을 본 지 오래되었다. 그것은 손잡이가 달린 예쁜 반달이었다.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이다.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은 산문도 맛깔스럽게 쓰는가 보다. ‘햇살이 놋숟가락에서 튕겨 나와 내 눈썹 사이를 만지작거리는 것 같았다.’와 같은 문장은 그만이 쓸 수 있는 표현이지 싶다. ‘손잡이가 달린 예쁜 반달’도 마찬가지다.이 짧은 글에 쓰인 단어 하나가 유독 눈에 띈다. 두 번째 문단 첫머리의 ‘그런데’다. 우리는 글을 쓸 때 ‘그러나’, ‘따라서’, ‘즉’ 따위의 접속부사를 자주 끌어들이곤 한다. 문장과 문장을 매끄럽게 연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가끔은 그걸 생략하는 게 오히려 글 읽는 맛을 더해주기도 한다. 그 까닭이 궁금하면 의 ‘그런데’를 빼고 다시 읽어 보라.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9-19 23:02

행복하려면 당연히 건강해야 한다. 안정적인 직업과 소득도 필수적이다. 취미처럼 즐겁게 일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한껏 발현하는 가운데 고소득까지 얻을 수 있다면 물론 금상첨화다.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기쁨과 고통을 기꺼이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도 있어야 한다. 행복의 조건은 그 수를 헤아리기가 한도 끝도 없지 싶다.행복을 추구하는 모양은 저마다 다르다. 돈이나 명예를 우선순위에 두는 이들이 참 많다. 사랑이 첫 번째 조건이라고 믿는 이들도 적지 않다. 누가 뭐라 해도 ‘신간’ 편한 게 제일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언필칭 ‘무욕’과 ‘무소유’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축에 드는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우리보다 훨씬 높게 나오는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 ‘행복 바이러스’에도 3단계 영향 규칙이 있다고 한다. 친구가 행복하면 내가 행복해질 확률이 15% 올라간다는 것이다. 친구의 친구가 행복하면 10%, 그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도 6%다. 부모의 형제의 자제인 사촌이 논을 샀다는 소식을 들으면 축하의 박수를 보내면서 행복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배가 아픈 건 6%를 뺀 나머지 94% 때문일까.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순전히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 걸 보면 행복은 상대적 개념인 것 같다. 너를 디뎌야 내가 올라설 수 있다고 가르쳐 온 우리의 경쟁교육 시스템이 어릴 적부터 그런 의식을 뿌리내리게 만들었을까. 요즘 세상에 ‘안분지족(安分知足)’을 강조하는 건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라는 걸 모르고 하는 말은 물론 아니다.좀 손해 볼 줄 아는 사람, 지위는 높지 않아도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가운데 뿌듯한 보람을 찾을 줄 아는 사람, 더 가진 걸 내세우는 대신 자신보다 덜 가진 이웃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을 친구로 곁에 두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으로 읽었다. 어느 카페 벽에 걸린 ‘행복한 사람을 친구로 사귀렴’을….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9-12 23:02

어느 치킨집 벽을 보니 ‘닭이 방금 있었던 일을 망각하는데 걸리는 시간 7초’라고 적혀 있었다. 웃자고 썼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닭의 지능이 그렇게 낮았나? 하긴 ‘닭대가리’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망각하는데’는 올바르게 띄어 쓴 걸까. 가려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망각하는데’의 ‘데’를 띄어서 ‘망각하는 데’라고 써야 한다. ‘형은 공부하는데 너는 뭐해?’와 ‘형이 공부하는 데는 어디지?’에 쓰인 ‘데’를 비교해보면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어미로 쓰이는 ‘∼데’는 앞 문장처럼 붙여 쓴다. 하지만 ‘거기’, ‘곳’과 같은 뜻의 장소를 나타내는 ‘데’는 의존명사이므로 앞말에 반드시 띄어 써야 한다. 덧붙이자면 ‘지’와 ‘만’도 흔히들 잘못 띄어 쓰는 말이다. ‘재활훈련을 시작한지 6개월만에 완투승을 따냈다.’를 보자. 이 문장에서는 ‘시작한지’의 ‘∼지’와 ‘6개월만에’의 ‘∼만’을 앞말에 띄어서 ‘시작한 지’, ‘6개월 만에’라고 써야 한다. 둘 다 일정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의존명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난 지 100일째’,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써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정도는 붙이거나 띄어 쓰거나 뜻은 다 통하니까 무방한 것 아니냐고? 과연 그럴까.어느 신문기사의 제목을 보니 ‘광주FC 새 감독 확정, 1년만 컴백’이라고 적혀 있었다. 무슨 뜻일까. 두 가지다. 하나는, 감독 생활을 더도 말고 1년 이상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너만 가도록 해라.’의 ‘∼만’과 쓰임이 같다. 다른 하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감독 생활 쉰 기간이 1년이라는 뜻이다. 제목대로라면 첫 번째가 맞다. 그런데 기사 내용은 후자 쪽이다. 그럴 때는 ‘1년 만 컴백’이라고 ‘만’을 띄어 써야 한다. 물론 ‘1년 만에’라고 써주면 더 정확해진다.그간의 복잡한 일을 정리하고 앞으로는 선수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쓰러지는 그날까지 의욕적으로 일하려고 마음먹은 그 감독이 ‘1년만 컴백’이라는 제목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오피니언 | 기고 | 2017-09-05 23:02

“자, 다들 밥값은 걱정 말고 각자 먹고 싶은 걸로 맘껏 시켜들….” 모처럼 한턱 쏘겠다면서 부하직원들을 데리고 중국집에 도착한 사장님께서 그렇게 호기를 부리는가 싶더니 다들 메뉴판을 들여다볼 틈도 안 주고 한마디 덧붙인다. “난 짜장!”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하직원들,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속으로 이렇게 투덜거리겠지. “아∼놔!”요즘 말로 일종의 ‘갑질’ 행태 중 하나를 빗댄 이야기일 터, 문제는 ‘자장면’이다. 짜장면의 본디 이름은 ‘작장면(炸醬麵)’이다. 중국식으로 소리 내면 ‘자지앙미엔’ 혹은 ‘짜지앙미엔’이다. 그걸 줄여서 부른 게 ‘자장면’하고 ‘짜장면’이다. 굳이 따지면 둘 다 우리말이 아니다. 하긴 그 넓은 중국 땅 어디를 가도 우리가 먹는 것과 똑같은 짜장면은 찾기 어렵다.우리 식으로 개량해서 즐겨 먹어 왔고, 또 범국민적 사랑까지 받고 있으니 짜장면도 이제는 우리 음식이라고 할만하다. 이름도 마찬가지다. ‘자장면’이든 ‘짜장면’이든 한자로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 이미 우리말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한동안 ‘자장면’만 표준어로 인정해 왔다. 표준발음규정을 공정하게 적용하다 보니 그리되었다는 국립국어원 쪽의 설명이다.오랫동안 탄압받았던 ‘짜장면’이 비로소 햇빛을 보기 시작한 게 2011년 8월부터다. ‘짜장면’도 ‘자장면’처럼 표준어로 인정한 것이다. 둘 다 표준어니 여태도 ‘자장면’을 고집하는 이들을 탓할 생각은 물론 없다. 그들은 혹시 ‘짜장면’이 품격 떨어지는 소리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어느 정치 집단처럼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모르고 있거나….철가방 전문 동네 중국집일수록 ‘짜장면’을 적극 선호한다. 까닭은 하나다. ‘자장면’은 입맛이 별로이기 때문이다. “2017년 9월부터 자장면은 완전히 버리고 짜장면만 표준어로 인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의 서민들 절대다수에게 친근한 이름이니, 국립국어원에서 이참에 두 눈 딱 감고 그런 발표나 한번 해주었으면 싶을 때가 가끔 있다.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8-29 23:02

여럿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음식점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상 위에 놓인 반찬 접시를 휘 둘러보고는 발길을 돌리면서 이렇게 한마디 툭 던졌다. “혹시 반찬 더 필요하신 거 있으면 얘기하세요.” 그 말을 듣고 누군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니, 보고도 모르나? 알아서 좀 갖다 주면 좀 좋아, 쯧쯧….” 이미 빈 반찬 접시가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그 아주머니 말대로라면 이렇다. 더 먹고 싶은 반찬이 있으면 ‘이모!’든 ‘여기요!’든 ‘저기요!’든 주방에 대고 누군가를 불러야 한다. 아무 반응이 없으면 빈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가야 한다. 그게 번거롭거나 괜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남은 반찬이나 알뜰히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겠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손님’이…. ‘~니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니가 있어 나는 살 수 있는 거야~’ 김종환이라는 가수가 오래전에 불렀던 라는 노래의 일부다. 여기서 말하는 2인칭 ‘니’는 1차적으로 ‘사랑하는 그녀’일 터, 살아가는 동안 ‘나를 존재하게’ 하는 ‘니’가 어디 한둘일까.사랑에 빠진 이라면 당연히 이성인 ‘그’ 아니면 ‘그녀’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한테는 자식들이야말로 ‘존재의 이유’ 아닐까. 교사나 교수한테는 학생들이, 음식점 주인에게는 손님이 바로 ‘나를 존재하게’하는 ‘니’들이다. 정치인들한테 가장 확실하면서도 영구불변인 ‘니’는 국민일 것이고…. ‘사랑’에 대한 하고많은 정의 중 하나가 ‘as you want’ 아닐까 싶다. 자식이 바라는 부모, 학생들이 요구하는 교사나 교수, 손님이 먹고 싶은 반찬을 미리 챙겨주는 주인, 굳이 촛불을 들지 않아도 국민들이 아파하는 곳을 알아서 어루만져줄 줄 아는 정치인이야말로 ‘고객 만족’의 진정한 실천자일 것이다. 어느 음식점 벽에 걸린 ‘손님이 짜다면 짜다!’를 보고 두서없이 떠오른 생각이다.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8-22 23:02

순우리말 ‘딱’은 활짝 벌어진 모양 혹은 정확히 맞닿거나 들어맞는 모양을 가리킬 때 주로 쓰는 부사어다. ‘딱 벌어진 어깨’, ‘딱 맞는 옷’이 그런 예다. ‘앞을 딱 가로막다’나 ‘딱 붙은 포스터’처럼 굳세게 버티고 있거나 단단하게 들어붙는 걸 가리킬 때도 쓴다. 어떤 일을 단호하게 끊거나 과단성 있게 행동하는 모양을 나타낼 때도 이 ‘딱’을 쓴다. ‘딱 잘라서 거절했다’나 ‘딱 한 번만 용서한다’가 대표적인 예다.주로 용언을 꾸며주는 부사어 구실을 하는 이 ‘딱’은 서술형 어미 ‘∼이다’하고 결합해서 용언으로 쓰일 때도 있다. ‘그 일이 너한테는 딱인 것 같다.’가 그런 경우다. 그뿐 아니다. 의성어로도 자주 쓰는 말 또한 ‘딱’이다. 가벼운 게임에서 벌칙으로 가끔 애용하는 ‘딱밤’도 의성어를 활용해서 만든 신조어라고 할 수 있다. ‘딱’이 갖고 있는 이런 다양한 뜻을 적극 활용한 광고 문구가 있다.“칠 때 딱! 먹을 때 딱! 마실 때 딱! 놀 때 딱!” 야구깨나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귀에 익숙한 말일 것이다. 쭉쭉빵빵하게 생긴 젊은 여성이 몸에 딱 붙는 짧은 치마를 차려입고 나와 야구방망이를 반복해서 휘두르는 그 장면은 주로 야구 중계 광고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방망이 속도만큼이나 ‘딱!’도 빠르게 반복된다. 그런 뒤 이런 마무리 멘트가 이어진다.“오빠 나랑 한 게임 딱?”정말로 야구를 ‘한 게임 딱’ 하자고 오빠한테 저런 눈길을 보내는 걸까? 액면대로라면 불과 7, 8m 앞에서 불쑥 날아오는 돌덩이처럼 단단한 야구공을 그 무거운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서 점수를 내는 게임일 게 분명한데, 설마 오빠를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맞짱’을 뜨자는 소리는 아니겠지? 평소 보아 둔 ‘오빠’의 신체 조건이나 운동 능력이 영 부실하다면 또 모르겠다.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야구 말고 다른 게임?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8-15 23:02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찢어진 청바지는 미련 없이 내다 버리거나 기워서 입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찢어진 청바지가 패션으로 자리를 잡았다. 숫제 여기저기(심지어는 허벅지나 엉덩이 언저리까지) 잘(?) 찢어서 신상품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겨울이 오고 첫눈이 내렸습니다.’ 맞다. 겨울이 찾아온 게 원인이고, 첫눈이 내린 게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첫눈이 내려서 겨울이 찾아왔습니다.’는 틀렸는가? 순서가 뒤바뀌었으니까? ‘당신을 보고 싶은 내 마음이 간절해서 이토록 시원한 빗줄기가 쏟아집니다.’ 이 또한 순전히 억지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비가 쏟아진 원인이 당신을 보고 싶은 간절한 내 마음이라는 거니까. ‘내 마음’이 대자연의 섭리마저 뒤바꿔 놓았다고 했으니까. ‘얼큰한 해장국을 먹었더니 지난밤에 몽땅 마신 술이 다 깨는 것 같다.’는 애주가들이 흔히들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하지만 ‘해장국이 이렇게 얼큰할 줄 알았더라면 지난밤에 술을 몽땅 마실 걸 그랬다.’는 유머 감각이 풍부한 술꾼들이나 쓸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광화문 거리 흰 눈에 덮여가고 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가수 이문세가 부른 의 끝부분이다. 하얀 눈이 하늘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자꾸 ‘올라간다’고 했다. 어떤가. ‘하얀 눈 하늘에서 자꾸 내려오네’라고 쓴 것하고 비교해 보라. 찢어진 청바지처럼 발상을 바꾼 문장이 때로는 훨씬 신선한 울림을 주고 있지 않은가.녹음이 짙은 느티나무 숲에서 안도현 시인이 쓴 시 한 대목을 떠올린다.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라고 했던…. 그렇다. 여름이 이토록 뜨거운 까닭은 삼복 절기나 기상이변 탓이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 매미가 저토록 악을 쓰고 울어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8-08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