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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315건)

애호박과 감자를 빚어 넣고 뜨끈하게 끓인 수제비는 새큼하게 익은 열무김치와 먹으면 찰떡궁합. 땀 흘리며 코를 훌쩍이며 정신없이 먹던 시절이 아련하다.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워 씹을 사이도 없이 목줄을 타고 넘어가는 그 맛이야말로 어떤 음식에 비할까.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속이 시원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찔레꽃이 만발한 5월의 언덕엔 밀밭도 덩달아 누렇게 익어갔다. 찔레꽃 우듬지를 꺾어 껍질을 벗기고 손바닥에 비비면서 ‘쓴 것 줄게 단 것 달라’는 주문을 외우면 우듬지는 거짓말같이 달달했다. 그리고 심심하면 밀밭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깐깐한 주인 할아버지의 말총머리 같은 밀 까끄라기가 두렵지도 않았나 보다. 악동들은 겁 없이 이삭을 뽑아 껍질을 비벼 버리고 입안 가득 밀알을 털어 넣고 씹었다. 뜨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잘근잘근 씹었다. 말총머리 할아버지 눈을 피해 내달리다 보면 신기하게도 ‘껌’이 만들어졌다. 껌을 만들다가 까끄라기가 목에 걸려 맨밥 한 숟가락을 씹지도 않고 삼켰던 일도 있다. 손가락을 목구멍에 집어넣고 깩깩거렸던 그 동무들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밀껌’의 추억이 새삼스럽다.익어 갈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인데, 통통히 여물어가는 밀 모가지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본다. 고집쟁이 동생이 밀 이삭을 닮았나 싶다. 어머니의 회초리 앞에서도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고개를 쳐들고 말대답을 하여 매를 벌던 동생이었다. 엄동설한을 살아낸 까끄라기가 밀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일까. 아니면 하늘을 향하여 한없는 겸손을 더 내려주시라고 우러러보는 것일까? 이 순간 나도 밀 이삭처럼 하늘을 우러러본다.밀 수확이 끝나고 나면 밀이 밀가루로 변신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밀이 밀가루로 변신하는 날이 왔다. 맨날 허기진 배를 채워준 보리밥은 안중에도 없다. 수제비, 부침개, 칼국수, 막걸리를 넣어 만든 찐빵 등을 생각하며 방앗간에 가신 아버지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지게에서 내린 밀가루는 아직 뜨뜻했다. 동생과 나는 밀가루 포대에 들러붙어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기도 하고, 강아지도 코를 킹킹대며 토방에 떨어진 밀가루를 핥기도 했다. 막 알을 낳은 암탉이 몇 번 쪼아보더니 이내 부리를 제 겨드랑이에 닦아버렸다. 지금 같은 세상에 밀가루 타령이라니, 그래도 그때가 그립다.수제비를 끓이는 날은 어머니가 밭에 나가 일을 할 수 없는 비 오는 날이 제격이다. 밀가루에 물을 조금씩 주어가며 반죽을 한다. 뽀송뽀송한 밀가루가 물을 만나면 찰기를 드러내며 엉겨 붙는다. 입 안에 털어 넣은 밀알이 씹히고 씹혀서 껌이 되듯이 손아귀에서 주물러지는 밀가루는 주무를수록 부드러워 진다. 마치 어릴 땐 손이 맞아 찌그락 짜그락 싸우던 형제들이 커가면서 형제애를 알아가듯이 밀반죽이 잘되면 손바닥에 달라붙지도 않는다.아궁이에 불을 지펴 멸칫국물을 끓인다. 그러면 눅눅한 방바닥도 모처럼 고슬고슬해진다. 솥 가득 수제비를 끓이는 날이면 이 집 저 집 굴뚝에서도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멸칫국물 냄새가 사방으로 소문을 냈다. 수제비 한 그릇이 정과 함께 토담을 넘어 친구 ‘말례’네 집으로 넘어가면 부침개 한 접시가 정과 함께 우리 집 밥상에 올랐다. 또 뒷집 ‘응구’네 집에서 찐빵이 정과 함께 뒤란 담을 넘어왔다. 수제비뿐만 아니라 농기구며 잔돈푼까지도 빌려 쓰고 빌려주면서 서로 정을 나누며 살았다. 이렇게 사는 모습이 이웃사촌이 아닌가. 점심에 수제비나 떠볼까?△최정순 수필가는 종합문예지 《대한문학》 수필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를 출간했고, 제7회 행촌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10-20 23:02

오늘도 기린봉 산행을 다녀왔다. 으레 치명자산을 거쳐 가는 코스다. 치명자산 순교자 묘지를 지나 능선을 돌면 동고산성 견훤 대왕 궁터를 만난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이 궁터를 왜 지금까지 방치해두었는지 전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해서 세운 진나라의 역사는 기원전 221~206년이니 불과 15년이라는 짧은 역사에 불과하다. 그런데 견훤이 900년 완산주(전주)에 입성하여 도읍을 정하고 세운 후백제 왕도는 36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다. 이는 진나라에 비하면 오랜 기간이다. 올해가 꼭 1117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전주를 천년고도라 부른다.견훤왕이 전주에 백제를 세우며, ‘나는 감히 도읍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백제의 원한을 풀러 온 것뿐이다.’라고 건국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떳떳하게 선포한 것도 백제의 맥을 잇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런 ‘백제’가 후세 역사가들이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서 ‘후백제’라 이름 지어 불리고 있으나 백제의 영혼은 지울 수가 없다.조선 영조 때 쓴 《동서강목》에서는 후백제를 백제의 옛 땅을 남김없이 차지해 신라와 고려보다도 강력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 켄서스 대학의 허스트 3세 교수의 〈고려왕조 창건 속 인물들〉이란 논문에서 ‘견훤은 상당한 군사적, 도덕적 힘을 가지고 있었던 백제인으로 운명의 뒤틀림이 없었다면 10세기 한국은 견훤에 의해 통일됐을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막강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고 했던가. 오늘날 왜곡된 역사로 인해 견훤왕이 폄하되고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 전주사람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후백제는 후삼국 시대 이후 유일하게 왕궁터를 찾지 못하고 있는 나라다. 개발을 계속하고 있지만 지금도 확실치 않다. 학자마다 설이 분분하다. 동고산성이라고도 하고, 물왕멀 일대라고도 한다. 또, 중노송동 인봉리와 문화촌 일대라고도 한다. 그런데 최근 전주국립박물관에서는 이제까지의 모든 자료를 종합 검토하여 노송동 지역을 궁성 일대로 상정하고 도성의 형태나 방어체계를 새롭게 설정하여 발표했다. 다소 늦은 감이 있다. 돌아가는 사정을 알 리 없는 시민은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하다. 천 년이 지났는데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니 말이다. 궁성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면 어떤가? 전주시내 어느 곳일 텐데…. 궁성 터를 찾는 일에 발목이 잡혀 다른 사업을 미룬다면 그것도 옳은 방향이 아니지 싶다.경북 문경시 가은읍에서는 견훤왕의 사당과 후백제 사당 위패를 소중하게 모시고 있으며, 충남 논산시 연무읍에서는 견훤왕의 묘를 자랑하고 있다. 후백제 왕도로서 위상을 되살리고 시민들의 자긍심을 돋우기 위해서 후백제 역사 문화 복원에 박차를 가하기 바란다. 시민들도 ‘백제대로’나 ‘견훤로’ 같은 도로명 주소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협조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어느 누가 나를 보고 “어디 사세요?”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백제 왕도였던 “전주에 삽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김상권 수필가는 《대한문학》 수필 부문 신인상, 《한국산문(구 에세이플러스)》 수필 부문 신인상을 받았다. 수필집 〈다들 어디로 갔을까〉, 〈뻐꾸기 소리로 아침을 열다〉를 출간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09-22 23:02

배롱 꽃잎이 지는 여름 끝자락에 하루해 일상을 채우고, 아침저녁으로 뽀송뽀송 살갗을 더듬는 음이온 향기 스민 바람이 세포를 한껏 숨 쉬게 한다. 아직도 매미들의 세레나데가 여름~ 여름~~하면서 다가오는 이별의 애달픔을 애처롭게 토해내고, 초저녁에는 귀뚜라미가 가을~ 가을~~콧노래를 부르며 순환하는 계절의 배턴을 이어받는다.계절의 변곡점에 설 때마다 이 세상 것 무엇 하나 영원한 것이 없다는 진리와 끝도 없이 순환을 거듭하는 자연, 부침을 거듭하는 인간사야말로 인생의 참된 깨우침을 얻는다. 계절의 줄다리기는 보고 듣고 피부에 닿는 것들로 느껴지지만 어쩌면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불어가는 나이테만큼 때로는 추억이 파노라마로 밀려올 때면 현실은 비록 그러하더라도 기억 속 풍요로움이 이 또한 행복일 때가 많다. 파스텔톤 삽화로 그려지는 추억 속 편린들이 순환 고리를 덧칠할 적마다 철 따라 새로움으로 묻어나곤 하기 때문이다.채송화처럼 작은 앉은뱅이 꽃도 저 높은 하늘빛을 옴쏙 안고 피어, 투명한 색채로 뜰 안에서 계절을 키운다. 햇볕의 파장은 그리움과 기다림을 해바라기 꽃과 선홍빛 칸나의 자태로 눈이 시릴 만큼 맑은 여름을 수놓는다. 가냘픈 보랏빛 나팔꽃, 귀여운 초롱 모양 분꽃은 아기 입처럼 오물오물 소곤댄다.이렇게 오롯한 꽃들의 여름 잔치가 가을을 부르는 삽상한 바람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 이맘때면 어릴 적 어머니 옷깃에서 물씬 풍기던 메밀밭 풋풋한 냄새가 그립다.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사신 아버지의 올곧음에 맞춰 농사일하시랴 또 자식들 건사까지 무던한 세월이었다. 지금 내 나이 어릴 적 엄마 자리에까지 왔다. 지금은 쉽게 사다만 먹는 메밀묵을 손수 맷돌에 갈아 찰지게도 쒀주셔서 양념장에 퐁당 적셔 먹던, 내 고향 집 넓은 마당 평상에서 가족들과 함께했던 가을 저녁은 넘을 수 없는 모성(母城)이다. 보고 싶은 어머니도 이제는 밤하늘별이 되어 반짝인다. 우리의 해후는 가을밤 쇼팽의 ‘야상곡’ 선율 따라 내 안의 가을 서곡 그리는 순례자가 되기도 한다. 어느 별 어느 자리에서 빛의 언어가 시(詩)가 되는….찬바람이 꽃가지에 걸터앉으면 고추잠자리 맴도는 하늘 늙은 지붕 위 휘어진 나뭇가지 어디쯤인가 따살거리는 햇살이 분주한 여인의 손놀림 사이로 빠지고 가을이 여기저기서 달려오고 있다. 계절의 성산을 쌓기 위한 가을맞이는 만물의 영장인 사람 또한 제 안의 결핍을 변형해야 하는 부단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파란 하늘 넓은 캔버스에 티 없는 소망 하나씩 흰 구름에 두둥실 띄워 봐도 좋겠다. 단단한 땅을 딛고 맘껏 뛰고 걸을 수 있는 땅에 지혜를 심을 수 있어서 좋다.그리스 신화에서도 대지의 여신, 태초의 어머니 가이아가 전해지고 있듯 땅은 어머니의 상징이며 넓고 깊은 지혜의 샘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우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00세를 사는 자신의 일상에서 반올림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아니면 반내림을 하는 것이 기쁨이라면 하등의 조건에 뭐가 따르랴! 내 삶의 주관자는 자신이기에 자연의 섭리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보람이고 행복일 것이다.천(天), 지(地), (人)의 합이 선(善)을 행하고 조화를 이룬다면 이 세상 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가을 문턱에서 내 행복은 내가 가꿔야 내 것인 것을…. 쉽고도 어려운 진리에 방점을 찍는다.△이점이 시인은 〈시와 산문〉으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전북시인협회, 두리문학회, 샘동인 회원으로 현재 전주문인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한국미술협회 문인화 작가, '화랑 묵객' 서예 초대작가이기도 하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09-15 23:02

아들 있는 집은 요양원에서 죽고, 딸 있는 집은 싱크대 밑에서 죽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딸 잘 두면 비행기 탄다는 말도 이젠 한물갔나보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많아짐에 따라 파생되는 문제 중 가장 큰 일이 육아 문제 아닐까.아이 낳기를 권하는 사회, 많이 낳을수록 박수받는 시대가 올 줄 예전엔 상상도 못 했다. 7, 80년대만 해도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이 표어가 곳곳에 나붙어 있었다. 맞벌이 부부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름지기 애국자라면 이대로 따라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어쩌다 아이가 셋만 돼도 비애국적인 처사로 남들이 손가락질하지 않나 눈치 보던 시대였다.아들이 장가간 지 3년이 넘도록 아이 소식이 없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기다림 끝에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자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었다. 아기 돌보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닌 터, 한창 일할 나이에 일을 그만둘 수 없는 며느리는 아기를 안고 친정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들인들 처가살이한다는 말 듣고 싶었겠으며, 며느리인들 친정어머니 고생시키고 싶었으랴. 그러나 눈 뜨고 코 베이는 서울살이에 아기를 믿고 맡길 만만한 대상이 친정어머니뿐이니 친정집으로 들어가는 일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아버지, 어머니! 은퇴하시니 심심하시죠? 주말에 아기 데리고 내려가도 돼요?”손자를 보고 싶지만, 사돈집에 들락거릴 수도 없어 애태웠는데 아들이 우리 맘을 읽었는지 이제 막 돌이 지난 손자를 데려왔다. 걸음마를 배워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여간 귀엽지 않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쉴새 없이 아장대고 다닌다. 넘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지만 붙잡아 둘 수도 없다. 딴에 제 눈에 보이는 물건마다 난생처음 보는 것들일 테니 만져보고 눌러보고 입에 대보고도 싶겠지. 외가에서 자란 손자는 우리 집에 와서도 낯가림 없이 잘 먹고 잘 놀았다.“아기한테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얼굴도 익힐 겸 자주자주 내려와야겠어요.” 아들의 말이 살갑게 들렸다. 그리고는 주말마다 내리 5주를 거르지 않고 아기를 데리고 내려왔다. 생활 패턴이 바뀌면서 주말의 이틀이 주중 닷새보다 길었다. 손주는 예쁜데 몸은 고단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손주는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고 했구나.이젠 아들이 좀 뜸하게 오면 좋겠는데 노골적으로 말하면 상처가 될까봐 에둘러 표현했다.“아들아, 일요일마다 애 엄마 없이 네가 아기 데리고 교회 가니까 남들은 부부싸움 하고 별거하는 줄 알겠다.”며느리 하는 일이 주말에 더 바쁜 일이라서 우리야 이해하지만, 남들은 오해하기 딱 좋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들은 제집에 오면 더 편한지 이젠 아예 아기를 내게 맡기고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가 있기도 하고, 혼자 영화를 보고 오기도 한다. 매일 밤 손주 때문에 잠을 설치는 사돈 보기도 미안한데 주말이라도 푹 쉬시도록 내가 주말 돌봄이 노릇이라도 해야겠다.장모도 인생 즐길 권리가 있다고 ‘장모님 반란’이란 제목 아래 장모님 5계명이 실린 신문기사가 한동안 회자되었다. 처가살이가 대세인 요즘, 고부갈등이란 말 대신 장서갈등이란 새로운 용어가 뜨고 있다. ‘아들아, 내 대신 장모님께 효도하거라’ 장모님 수난 시대에 아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다.청년 일자리 문제가 심각한 이때, 결혼을 안 하는 게 아니고 못 한다는 말이 맞다. 아이를 낳으려 해도 양육할 자신이 없어 안 낳는다는 말이 엄살이 아니고 사실이다. 자식을 낳아 기르기가 녹록하지 않은 시대에 이런 젊은이들에게 힘을 보태주고 싶지 않은 어른은 없다. 다만 진짜로 노쇠해가는 육체의 한계 때문에 주저할 뿐이지.△최선욱 수필가는 2014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했다. 수필집으로는 〈거꾸로 가는 시간 속에서〉가 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09-08 23:02

2002년 초겨울에 애마(愛馬)를 처음 만났다. 애마는 처음 세상에 나온 회색 소렌토(SORENTO)였다. 그와 동고동락하며 10년 고개를 언제 넘었는지 까마득하다. 전주시에서 익산시로 서너 달 다니다 교감 승진의 기쁨을 싣고 진안군 소태정 고개를 4년 반 오르내렸다. 또 교장 승진의 영광을 안고 4년 반 동안 임실군을 다니다 정년을 맞았다. 이제는 애마랑 제2 인생을 동행하고 있다.작년 1월 중순 오후, 친구와 전주화산공원에 올라가 양쪽 끝까지 정담을 나누며 왕복했다. 전주빙상경기장 주차장에서 쉬고 있던 애마에게 큰일이 생겼다. 열쇠를 자물쇠 구멍에 넣었는데 전혀 돌아가지 않았다. 친구와 안간힘을 써보고 주위 분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막무가내였다. 고집을 부릴 땐 미웠다. 보험회사의 서비스도 안 돼 기아오토(KIAOUTO) 지점으로 견인했다. 키박스(keybox)가 고장 나 전체를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 부품과 수리비가 20여만 원인데 단골이라 19만 원만 달라고 했다.그 뒤로 가고 싶은 곳은 어디를 다녀도 끄떡없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열쇠를 자물쇠 구멍에 꽂아 시동을 걸면 여러 번 작동해야 했다. 시동을 끄고 열쇠를 빼지 않은 채 두었다가 시동을 걸 때는 괜찮았다. 답답해서 동네 카센터에 갔다. 열쇠를 바꿔보라고 해서 보조 열쇠로 시동을 걸어보았다. 조금 나은 것 같았는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차를 타려면 두려움이 앞선다. 늘 실랑이를 하다가 시동이 걸렸다. 며칠을 견뎌보다 또 카센터를 갔다. 자물쇠 고장이니까 키 전문가를 오라고 해서 점검을 받아보자고 했다.고민하다 키 박스를 교체한 데가 나을 것 같아 기아오토 지점으로 갔다. 자물쇠 부분 수리가 안 되면, 키 박스를 통째로 교체해야 한다는 말은 카센터와 같았다. 부품 무상 교체는 보증기간이 6개월이나 넘어 불가능하다며 열쇠 전문가를 소개해 주었다. 사무원한테 ‘행운 열쇠’ 가게에 전화를 부탁하고 곧바로 찾아갔다. 고급 오토바이가 가게 앞에서 고객의 부름에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차 밖에서 자물쇠에 열쇠를 꽂아 상하좌우로 움직여보니 시동이 걸렸다. 자물쇠가 잠겼다가 잘 풀리지 않아 그렇다며 구멍에다 기름을 스프레이처럼 뿌렸다. 소명 가수가 부른 노래 제목같이 ‘유쾌 상쾌 통쾌’해, 오후 한나절의 폭염으로 등에 맺힌 송골송골 땀방울이 금방 식어버렸다. 사장님은 갓 50대쯤 되어 보이는데, 자물쇠와 열쇠만은 어떤 문제든지 고객을 만족하게 할 자신감이 넘쳤다. 그 단계에 오르기까지는 남모르는 많은 시행착오와 수련과정을 거쳤을 거다.열쇠 사장님이 올여름 같은 폭염에 고객들의 청량제가 되듯이 그런 글을 쓸 수는 없을까? 수필을 써보겠다고 맘먹고 입문한 지가 내년이면 10년이다. 수필은 웃고 들어갔다가 울고 나온다는 말이 헛말은 아닌 것 같다. 지금 나는, 바라는 만큼 좋은 수필을 쓰는 게 아니라 시시콜콜한 신변잡사(身邊雜事)만 늘어놓은 글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서글퍼져 울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독자들의 마음에 시원한 바람을 일으킬 수필나무를 그려보며 새로운 십년지계(十年之計)로 순수한 열정을 품고 시작해야 할 성싶다. 애마도 즐겁게 동행해 줄 것이다.△정석곤 수필가는 종합문예지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풋밤송이의 기지개〉와 〈물끄러미 바라본 아내의 얼굴〉을 출간했다. 임실 삼계·관촌초 교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작가회·행촌수필문학회 이사, 전북문인협회 회원, 안골은빛수필문학회 편집국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09-01 23:02

요즘 노인네 모임에서 우스갯소리로 ‘노인십계명’이 회자되고 있다. 노인십계명은 노인이 최소한 지켜야 할 10가지 도덕적 계율이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10개조의 계시를 풍자적으로 패러디한 것이다. 허물없는 노인들 사이 흔히 술좌석에서나 하는 푸념이지만 노인에 대한 공경심이나 권위가 실추되고 있는 현실에서 귀담아 들을 만한 경구이다. ‘노인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은 ‘자식한테 효(孝)를 기대하지 마라’이다. 까마귀 새끼가 자란 뒤에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는 소위 반포지효(反哺之孝)는 이젠 머언 태고적 전설처럼 잊혀져 가고 있다.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가며 고이 기른 자식도 부모를 늘그막에 제대로 모시기는 커녕 귀찮게 여겨 현대판 고려장 호텔인 동네 요양원에 버리다시피 방치하는 세태다.둘째 ‘남 앞에 자식 자랑 하지 마라’다. 옛말에 마누라 자랑하는 놈은 온병신이고 자식 자랑하는 놈은 반병신이라 했다. 사람의 길흉화복은 새옹지마(塞翁之馬)이다. 그만큼 현재의 잣대로 자식을 남 앞에 치켜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셋째 ‘남 앞에 아는척, 잘난척 하지 마라’. 나이 70이 넘으면 한때 잘나갔던 사람이나 그저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나 그게 그거고 오십보 백보 처지다. 괜스레 힘주어 보았댔자 남이 알아주지도 않을뿐더러 자신만 외롭다.넷째 ‘돈 있다고 자랑말고 뻐기지 마라’. 인생 80이 넘으면 돈 쓸래야 쓸 곳도 없고 맛있는 음식조차 갈수록 소태씹는 듯 하다. 돈이 억만금 있어도 얼마남지 않은 여생에 비추어 보아 몇푼 쓰지도 못하고 3평 남짓 땅만 차지한 채 귀소(歸巢)한다. 다섯째 ‘공공장소에서 목청 높이지 마라’. 허리는 꾸부정정, 걸음걸이도 휘청휘청, 눈은 침침, 귓속은 윙윙거리는데 왠 목청만 그리도 높고 요란한지 마치 자기집 안방인양 행세한다. 조용히 세상사를 음미하고 관조(觀照)하듯 여생을 즐겨라.여섯째 ‘지난날의 화려했던 한 때를 내세우며 되씹지 마라’. “왕년에 그래도 내가 한 자리 한 몸인데 어쩌고 저쩌고…”하며 허세부리는 노인네일수록 별볼일 없는 친구다. 고매하고 훌륭한 인품의 노인은 어디서나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은은하게 지적(知的) 향기를 내풍긴다.일곱째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노골적으로 빈자리를 노리지 마라’. 경로석이 마치 자신만의 전용석이나 되는 듯 승차하자마자 두눈을 두리번 거리고 좌석의 양보를 바라는 듯한 행동을 보이지 마라. 이미 앉아있는 사람도 나름대로 다 사정이 있고 이유가 있을 터이다. 여덟째 ‘대중이 있는 장소에서는 일행 중 다른 사람을 부를 때 의식적으로 고위직 직함이나 교수, 박사, 장군 등의 호칭을 외치듯 부르지 마라’. 높은 직함을 부르는 것이 자기와 동일시하고자 하려는 심리적 발로일지라도 듣는 다른 사람에게는 거부감과 불쾌감을 자아낸다. 아홉번째 ‘자식에게 가진 재산을 몽땅 털어 넘기지 마라’. 재산을 자식한테 전부 넘겨주고 얹혀 살며 눈칫밥이나 얻어 먹고 쥐꼬리 만한 용돈이나 타 쓰는 처량한 신세를 상상만 해도 끔찍스럽다. 열번째 ‘맡고 있는 공식적, 비공식적 직위를 모두 내려 놓아라’. 자기 소유의 기업체가 되었건 공공단체의 명예직 감투가 되었건 70세가 훨씬 넘은 노인네 입장에서는 다 부질없는 거추장스러운 자리다. 얄팍한 자리에 연민을 두고 붙들고 있는 것은 노추고 노탐이다. 구구절절 옳은 이 말을 그리 쉽게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주책없는 고질병이다. 새삼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라는 고은 시인의 짧은 시문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된다. 이제라도 인생 마지막 황혼길 아름답게 장식하자.△ 고재웅 씨(78)는 부안 출신으로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공직에 입문해 제주와 군산, 여수해운항만청장을 지냈다. 주요 일간지에 다수의 칼럼을 게재했고, 고향인 부안지역 주간신문에서는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08-25 23:02

이발을 했다. 아니 머리를 잘랐다. 이발은 머리를 깎고 다듬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 나는 아파트 단지 내 헤어숍에서 머리만 잘랐다. 면도도 하지 않았으니 뭘 다듬어 준 게 있겠는가. 돌아오면서 한참 뒤 생각하니 오늘 같은 날이라도 이발소로 가서 머리도 자르고 면도도 하고 다듬어 줄 걸 그랬군 싶었다.아침에는 운동을 하고 평소대로 손자들 데리고 와서 달래가며 서둘러 밥을 먹게 한다. 이어서 등교 시간 늦지 않게 학교 보내는 게 군대 생활 점호같이 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평소와 달리 1학년 4학년인 손자들이 꼬막 손으로 분홍색 봉투를 내민다. 1학년 손자는 작은 지폐 두 장을 동봉하고서 초보 글씨로 ‘할아버지 축하드립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썼다. 글씨 아래엔 어른과 아이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크게 그려두었다. 그리고 어른 그림 아래에는 ‘할아버지’, 꼬마 그림 아래엔 ‘나’라고 썼다.아침 없는 날 없고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는 날도 드물다.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시간, 나는 허리 아픔에서 탈출해 일어날 수 있음을 하나님에게 먼저 감사드린다. 이어서 책상으로 가서 아침 시간 깨어나는 정신으로 가족들을 생각하며 힘든 일 없이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기도한다. 다음 온수 한 잔을 몸속으로 공급한다. 이어서 산길에 나선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이 하루의 내 인생을 끌고 간다. 그동안 나는 고향에서 객지에서 비틀거리고 넘어지면서 생명으로서 몸살을 많이 앓았다. 그래도 용케 살아남아 부모님과 한아파트에서 지내다 부모님 먼저 허무의 본질 속으로 떠나시게 되었다. 그런데 나보다 더 힘들게 살아오셨던 그분들에게 존경을 표함에 인색했다. 자본주의 시대의 꽃인 경제 쪽으로 둔하고 무능한 사람들 속에 가족도 있었고 나도 갇혀 있었다. 그러면서 나 혼자 열심히 사는 양 아는 체를 했다. 생각해 보면 참 싸가지 없는 소행이었다.산길을 거닐다 보면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겸손해지는 시간이 찾아온다. 자유롭게 걷지 못해 불편해하는 분을 볼 때는 아니 볼 상황을 훔쳐보는 것 같이 미안해진다. 내 의지대로 내 육신을 운행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점점 커 보인다. 그러한 가운데 자동차 주행가능 거리를 보면서 내 삶의 주행거리와 남은 에너지가 궁금해지기도 한다.오늘은 내게 있어 의미 있는 날이다. 그러나 누구에게 자랑할 만큼 특별한 것은 아니다. 누구 같이 아들딸이 박사 학위 받는 날도, 검사 판사에 임명되는 날도 아니다. 주식이 튀거나 복권 당첨은 더욱더 아니다. 그저 혼자서 작은 의미를 안고 ‘내가 이 땅에 온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강물에 내 얼굴 비춰보듯 해야 할 날이다. 이어서 이 땅에 올 때의 예의가 있었다면 갈 때의 도리도 소중하겠다는 점을 곱씹어 볼 날인 것이다.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는 동안 커트 보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에 흰 머리털이 꽤 섞였다. 그래, 때 되면 모두 잘려나가고 떠나는 거겠지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저 머리털도 내 부실한 치아로 더디 씹어 삼킨 음식의 영양분으로 자랐을 텐데…하는 생각으로 마음속 한 곳이 묵직해졌다. 그 순간 “다 되었습니다.” 하는 주인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출입문을 밀고 오후의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름다운 젊음은 자연 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작품’이라는 들어봄 직한 문장의 언어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김경희 수필가는 〈월간문학〉으로 등단했으며 ‘국제펜클럽전북위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전북문학관아카데미’에서 수필을 지도하고 있다. 수필집 〈사람과 수필 이야기〉 외 몇 권이 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08-11 23:02

노련한 등산가는 늘 나침반을 지니고 다닌다.나침반은 산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사용할 목적이 아니더라도 상황에 따라 금방 꺼내 길을 쉽게 찾기 위한 것이다. 보통사람들도 나침반을 지니고 산다. 자기만의 어떤 특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으로 가는 것을 정상으로, 나쁜 상태에 직면했을 때는 올바른 상태로, 낮은 단계일 때는 높은 단계로 가려는 의지 등 삶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일을 행하게 된다. 어떨 때는 특별한 대가를 치러야 하고 기약 없는 인내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생이라는 굴레는 누구나 거쳐야 하는 단계는 아니더라도 주관적인 판단 속에는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나침반이 있다.어느 해 가을, 용머리 고개 튀김집에서 갓 구워 올린 꽈배기 냄새가 코앞을 가로막았다. 반세기 전 아버지가 사주시던 꽈배기가 그 집 창가에는 진열되어 있다. 그 앞에는 낯모르는 어린 학생이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호주머니를 뒤지며 돈을 찾는 것 같았다. 아마 돈이 없거나 잃어버린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 없이 그의 손에 꽈배기를 쥐여주었다.꽈배기를 보니 문득 시골 오일장 생각이 났다. 그때 아버지는 비를 맞으며 봉투 하나를 들고 오셨다. 젖은 봉투에는 쫄깃하고 달콤한 꽈배기가 있었다. 그 냄새는 방안에 가득했다. 어머니는 꽈배기의 숫자를 세어보고 분명 열 식구인데 한 개가 부족한 아홉 개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바라보시니 아버지는 시장에서 먹었다며 손사래를 쳤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꽈배기 반절을 뚝 잘라 아버지 입에 넣어 주셨다. 그러더니 그의 반절을 막내 입에 넣어 주고 나머지는 어머니의 입에 넣었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었다. 가난이라는 것은 조금 불편하지만, 형제들의 숫자만큼 정이 숨어 있었다. 비록 꽈배기처럼 꼬이는 일이 많았던 내 삶 속에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 행복한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한평생 살면서 모든 것들이 내 것인 줄 알고 살았던 삶이 사실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가 남이 준 것들이다. 아파트는 건축업자가 지은 것을 산 것이다. 책도 옷도 승용차도 모두가 내가 잠깐 빌려 쓰고 죽을 때 놓고 갈 물건이다. 아니 내가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제자리에 놓고 가야 한다. 그렇게 할 바에야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리라고 생각해 보게 된다.횔덜린의 「반평생」이라는 시가 있는데 그 시 후렴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아아, 나는 어디에서 이 겨울에 / 꽃들을 찾을 수 있을 거나 /또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는 /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거나 / 깃발들이 덜컹거리는 / 바람 속에서 벽들은 / 말없이 차갑게 서 있는 데.”나침반을 가지고 등산하듯 인간의 삶도 서정적인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언어가 깨끗하고 단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매사가 긍정적이다. 거친 파도가 노련한 어부를 만들 듯 대가를 크게 치른 사람은 인생의 나이테도 굵고 깊다. 나이테 속에는 넉넉한 나침반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의 추억을 거울삼아 세상을 밝게 사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이를 불평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나와 함께 지내왔던 물건들을 후손들에게 후회 없이 주고 가겠다는 지혜로운 생각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성공한 사람이 되기보다 차라리 평범한 삶 속 행복한 사람을 꿈꾸어야 하겠다.△ 정곤 씨는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으며 작촌예술문학상을 수상했다. 덕진문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07-28 23:02

시대가 변하는 요즈음, 직업에 대한 인식도 급변하고 있다는 걸 교직 사회에서도 느낀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말하던 ‘군사부일체’라는 고어적 표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존경심이 담긴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늘 교사들에게 자랑스러운 표현이었다. 우리 부모는 적어도 자녀들 앞에서는 ‘아무개 선생’이라 호칭하지 않았고 반드시 ‘선생님’이라 했고 우리 세대도 그랬다. 그런데 요즈음 부모님들은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을 어떤 말로 호칭하는지 궁금하다. 아마 아직도 대부분의 학부모는 ‘선생님’이라고 존경의 뜻을 담아 지칭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끔 매스컴을 통해 소식을 접하면서 우울해질 때가 많다.요즘 학부모 중에는 흔히 말하는 갑과 을의 관계를 떠나서라도 적어도 자녀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를 자기 집안의 하인을 다루듯이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자녀들의 이야기만을 듣고 학교에 찾아와서 교사에게 삿대질하면서 훈계조로 말하는 학부모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멱살을 잡고 욕설을 퍼붓거나 신체적 가해를 하는 학부모도 있다는 교단의 현실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필자는 이제 머지않아 정년을 앞둔 사람으로서 젊은 시절을 돌이켜 본다. 그 시절 함께 했던 대부분의 동료들은 아이들을 정말 자식처럼 여겼다.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자기 반 아이들의 학력을 높여보겠다고 퇴근 시간 가까이 데리고 앉아 부족한 공부를 시켰고,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겐 사비를 털어 옷을 사주고 신발도 사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한 시간 이상을 걸어서 자기 반 아이들의 집까지 일일이 방문하여 가정 형편을 살피고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부모의 손이 미처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손발을 씻겨 주고 머리를 감겨주면서 부모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했고, 학부모들 또한 교사는 자기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참으로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항상 대해 주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교사들에 대한 인식이 예전과 같지 않다.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나치다 싶을 만큼 학생 인권은 강조하고 있는데 교사의 인권은 추락하고 있어 일부 학부모들이 이를 악용하고 존중하지 않은 풍토가 그중 하나라 생각된다.또 사회적 분위기도 교사 입장에서 소극적인 지도를 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다. 예전처럼 학생들의 손발을 씻겨 주고 머리를 감겨주는 교사가 있다면 그 교원은 성추행으로 고발될 수 있다.예전에는 일기장을 통해 반 아이들의 분위기를 짐작하고 아이들의 고충을 파악하여 해결해 주던 일도 많았었는데 이것이 학생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단정 지어지면서 일기 검사는 물론이거니와 이젠 아이와 단둘이 앉아서 상담조차 하는 것조차 꺼리는 상황이 되었다. 한마디로 학부모와 교사가 서로 믿으면서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교사들은 선생님으로 존중받았으면 좋겠다. 자녀 교육에 대한 문제가 생기면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가다듬고 먼저 선생님과 상의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갔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보면서 배운다. 부모들이 선생님을 무시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분명 언젠가는 이것이 부메랑이 되어 부모들이 선생님께 했던 방식으로 부모를 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진정으로 존중받는 교직 사회는 교사와 학부모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학생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학생과 교사의 소중한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적 분위기를 기대해 본다.△ 전순자 씨는 동시를 쓰는 아동문학가로 익산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익산 망성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07-21 23:02

항상 손을 붙들고 다녔는데, 두 손녀의 식성이 서로 달라 오늘 처음 각자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했다. 그랬더니 작은 손녀가 그만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할머니는 천 길 낭떠러지에 서 있는 심정으로 1층, 2층을 몇 바퀴 돌고 구내방송도 하고 자주 다니던 곳에서 기다려 보기도 했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얼굴이 사색이 된 할머니는 이미 눈이 멀고 귀가 먹어 버렸다. 그러나 곁에 있던 외손주는 아무런 걱정도 없이 시식코너에서 제가 좋아하는 과일 조각을 찍어 먹기에 여념이 없었다.“그러니까 할머니, 생각 좀 해 보세요. 집에 갔을 것 같아요?”다급해서 딸에게 혹시 손녀가 집에 왔느냐고 확인 전화하는 걸 보고 하는 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손녀는 이쑤시개에 제가 좋아하는 생선구이를 꽂아 들고는 의기양양하게 우리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손녀를 보자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그러자 손녀도 할머니를 끌어안고 그만 눈물바다를 이루었다.“봐요, 할머니. 내가 곧 올 것이라고 했잖아요?”조급해서 얼이 빠진 할머니와 태연한 손녀 사이에는 이미 생각의 큰 간격이 존재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언제까지나 손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과잉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할머니와 손자들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우리는 가끔 개구리 올챙이적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올챙이는 올챙이 때 생활에 충실하고, 개구리는 개구리 때 생활에 충실하다 보니 그렇다고 자위할 수밖에 없다.촛불 혁명에 이어 새 정부가 들어서고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깨끗한 인사로 채우겠다고 장담하고 시작했는데, 첫 단추부터 격이 맞지 않게 되었다. 핑계 삼아 쓰는 말은 ‘관례’였다는 것, 즉 그 시대는 그것이 삶의 방식이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맞지 않으니 결격 사유가 되어 임용을 막을 수밖에 없다는 또 다른 주장이다. 이 싸움을 보고 있노라면 청문하는 사람에게는 ‘너는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느냐?’라고, 후보자에겐 ‘그래도 그렇게밖에 살지 못했느냐?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시대의 흐름은 한 사람을 생각이 다른 두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나는 아직도 아내의 생각을 읽어 내지 못한다. 내가 집에 있고 싶을 때는 어디로 나들이 가자고 하고, 자식들에게 먹일 것을 사주고 싶을 때는 우리 둘이만 맛있는 것 먹으러 가자고 한다. 그리고 TV 시청에 빠져 있을 때마다 사정없이 채널을 바꾸곤 한다. 사십 년을 함께 호흡하며 살아오면서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부부 일심동체’라고 믿고 살아왔는데, 요사이의 아내의 행동을 보면서 다른 사람 같이 나를 낯설게 한다.나는 가끔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었다. 내 생각은 이런데 왜 저 사람들은 왜 저런 생각을 하고 저런 행위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정당한데 그들은 부당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그것이 내가 맡았던 어린이들에게 내 생각만을 강요하며 그들 생각의 싹을 잘라냈던 것이다. 같이 지내던 동료들에게도 그들의 방식을 온통 무시하고 내 생각만을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후회스럽다.세월이 흐르니 이제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세상은 두 사람이,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서로를 보완해주며, 서로를 위해 살아야 행복한 세상이라는 것을 말이다.△조내화 수필가는 2006년 에세이스트를 통해 등단했으며 현재 남원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수필집 〈섬진강에 삶을 묻고〉가 있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07-14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