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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칼럼 (671건)

몽상(夢想)은 합리적, 과학적 사고보다 주로 직관에 의존하는 의식작용이다. 흔히, 객관적 현상을 무시한, 실현가능성 없는 헛된 생각이라 여겨진다. 일종의 판타지(Fantasy)랄까? 중국에서도 미래의 꿈이나 소망을 표현할 때 몽상이란 말을 자주 쓴다. 뉘앙스로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헛된’에, 중국에선 ‘꿈’에 방점이 있는 느낌이다. 몽상 자체가 나쁜 건 결코 아니다. 우리는 때로 공허한 꿈이나마 꾸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자신의 미래상이든, ‘스위트 홈’의 모습이든, 가슴 저미는 짝사랑이든, 대부분 몽상의 형태로 그려지고 채색된다. 몽상은 실현에의 기대를 잉태함으로써 행동의 추동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10년 전 주술처럼 지구촌을 풍미했던 ‘시크릿 -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도 결국 몽상 실현의 설명서이다. 한 마디로 몽상은 팍팍한 인생살이에서 좋은 일이고, 또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실천이다. 많은 이들이 사상 최고의 소설로 꼽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몽상적 사랑’과 ‘실천적 사랑’의 구분이 그것이다. 해당 구절을 잠깐 인용해 보자. ‘몽상적인 사랑은 만족할만한 위업을 재빨리 달성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봐 주길 갈망합니다. 하지만 실천적인 사랑, 그것은 노동이자 인내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학문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몽상적 사랑은 모든 이들의 시선과 칭찬을 한 몸에 받기 위해서 목숨조차 내놓을 태세지만, 그 이면에는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마치 연극무대에서처럼 신속히 성사돼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깔려있다고 위대한 작가는 부연한다. 이 지적은 우리 정치판을 생각나게 한다. 아니 꼭 정치를 꼬집을 것도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세상의 풍속도가 대체로 그러하다. 우리는 타인의 애정과 지지를 받기 위해 장밋빛 몽상을 ‘무한 리필’한다. 약속하고, 유혹하며, 순애보를 헌정한다. 그러나 후속의 합당한 실천적 노력은 없거나 부실하다.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식언하기 일쑤다. 이것이 인간계의 엄혹한 세태다. 반면, 실천적 사랑은 고행과 시간을 요구한다. 끝 모를 인내와 육체적 고통, 심적 수양이 필요하다. 몽상은 쉽고 실천은 어려우니, 도스토예프스키도 ‘몽상적 사랑에 비하면 실천적 사랑은 잔혹하고 무서운 것’이라 단언한다. 경제통상진흥원도 몽상의 구름 속에 안주하는 족속은 아닐까? 최근의 고민이다. 우리원 경영지표는 ‘새로운 가치와 고객만족을 창조한다!’고 표방한다. 참으로 멋들어진 몽상적 표현이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기 위해 진정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이 물음 앞에 필설은 무력해진다. 어려운 여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도내 기업을 생각한다면 강도 높은 실천과 행동으로 응답함이 마땅하다. ‘당신이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멀어졌음을 목도하고 공포감을 느끼게 될 그 순간 -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은 갑자기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이며, 신의 기적적인 힘을 보게 될 겁니다.’ 부조리한 세상에 절망한 작가는 실천적 사랑을 위한 헌신에서 바늘구멍만한 희망의 출구를 찾고 있는지 모른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09-12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