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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76건)

‘착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곱고 어질다’라고 적혀 있다. ‘어질다’는 또 ‘너그럽고 덕행이 높다’라는 뜻이란다. 갈수록 복잡하다. 추상적인 말로 풀이되어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알고 보면 간단하다. 한마디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바로 ‘착한 것’이다. 시시때때로 피해를 주어서 누군가를 곤경에 빠트리거나 고통스럽게 만들면 그게 바로 ‘악한’ 혹은 ‘착하지 않은’ 것이다. 반대로 남에게 도움을 주면서 살면 ‘엄청 착한’ 사람인 셈이다. 테레사 수녀처럼 평생을 착하게 살아온 사람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사람의 일생도 ‘착한’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성선설’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착한’ 모습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세파에 시달리면서 ‘악한’ 일도 가끔 벌인다. 생을 마감할 때가 되면 ‘착한’ 모습을 회복한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한 사람의 어떤 행동을 가리키던, 그러니까 주로 어른들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주로 썼던, 이 ‘착한’이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대단히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물건의 가격이다.재래시장이든 마트든 심지어는 백화점까지 진열된 물건마다 ‘착한 가격’을 내세운다. 그뿐인가. 심지어는 날씬하게 잘 빠진 몸매도 착하다. 얼굴도 착하고, 심지어는 여자들 가슴까지 착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애들까지 나서서 ‘착하다’를 남발하고 있다. 어느 아파트 분양광고지를 보니 단지 안에 조성할 예정인 공원까지 착하다고 적혀 있다. TV 프로그램을 통해 ‘착한 짬뽕’, ‘착한 도가니탕’, ‘착한 해물탕’ 같은 말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기도 했다. 음식을 착하게 만들어 파는 이들이 별로 없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세상이 얼마나 착하지 않으면 아무데나 ‘착한’을 갖다 붙일까 싶다. 하긴 착하지 않은 ‘나랏님’들 때문에 수많은 국민들은 그동안 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던가. 이제 그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말솜씨는 조금 모자라도 사람이 먼저임을 묵묵히 실천하면서 평생을 올곧게 살아왔던 착한 이가 만들어나갈 착한 세상이 참 많이 기대되는 요즈음이다.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5-15 23:02

“한 잔에 천오백 원이세요.” “이 넥타이가 훨씬 잘 어울리세요.” “10분 후에 버스가 도착하세요, 손님.” “영화 상영시간은 세 시 오십 분이세요.” “화장실은 문밖으로 나가서 오른쪽에 있으세요.”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신종 대화체다. 말끝마다 꼬박꼬박 ‘~세요’다.우리말에서 존대 표현을 만드는 ‘-세-’나 ‘-시-’는 사물에는 쓸 수가 없다. 사람에게만 쓰는 게 옳다. ‘이분이 제 할아버지세요.’는 옳지만 ‘제 아버지가 쓰시던 컴퓨터세요.’는 우리말법에 어긋난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돈, 넥타이, 버스, 영화 상영시간, 화장실은 존대표현의 대상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긴 “그렇게 먹으면 건강에 안 좋으세요.”라는 말도 들은 적 있다.도대체 자꾸 왜들 그러는 걸까. 과거에 없던 이런 말법이 생겨난 까닭은 무엇일까. 요즘 젊은 친구들이 우리말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일까. 얼핏 그럴 것 같은데 사실은 그거, 우리 사회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사회적 관점에서 원인을 찾으면 몇 가지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경제적 양극화의 심화’, ‘청년실업의 증가’, ‘갑을 관계’ 등이 바로 그것이다.이 셋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부의 분배가 공정하지 않다 보니 사회 양극화는 날이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다. 값싼 외부 노동력의 유입에 따라 물가 상승률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저임금 때문에 청년실업은 증가하고, 고용불안 심리의 작용으로 대부분의 ‘을’은 ‘갑’의 부당한 횡포에 맞설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앞서 보았던 것처럼 이 잘못된 ‘-세요’는 한마디로 ‘을’의 용어지 ‘갑’이 쓰는 말이 아니다. 어쩌다 말 한마디라도 삐끗 잘못했다가는 언제 어떻게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저 유명한 김수희의 노래 의 가사처럼 ‘갑’인 그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을’의 처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회적 현상 중 하나인 것이다.발길 닿는 도처에서 귀에 딱지가 붙도록 들었던 ‘-세요’를 눈으로까지 발견하다 보니 조목조목 떠오른 생각이다.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5-08 23:02

대나무 특산지로 널리 알려진 전라남도 담양에 가면 ‘죽녹원’이라는 대나무공원이 있다. 그곳에서 ‘죽순의 바람’이라는 제목을 얹은 깜찍한 팻말을 발견했다. ‘저는 대나무로 자라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바라만 봐 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사람으로 치면 죽순은 ‘아기 대나무’다. 대나무의 땅속줄기에서 돋아나는 새싹이 바로 죽순이다. 그 어린 죽순이 사람들 눈에는 식감 좋고 영양가도 풍부한 먹거리로 보인다는 게 문제다. 마치 지나가는 강아지만 봐도 입맛을 다시는 이들처럼….하긴 그럴 만도 하다. 죽순은 탄수화물, 칼슘, 섬유질, 인, 철분이 풍부해서 당뇨병을 비롯한 각종 혈관 질환의 예방과 치료 효과가 탁월하다고 한다. 죽순의 껍질로 우려낸 차는 또 만성 변비를 해소하고 노화 방지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맛까지 일품이어서 데치고 볶아서 만드는 각종 반찬의 재료로 널리 쓰여 온 게 죽순이다.아기와 어린이는 국가의 미래라고 했던가. 그들을 인격과 실력을 골고루 갖춘 민주시민으로 키워내기 위해 교육도 시행한다. 대나무 새싹인 죽순의 미래는 대나무일 것이다. 어린이의 가치를 미래의 어른에서 찾듯, 죽순의 가치 또한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발휘될 것이다.앞서 보았던 ‘죽순의 바람’은 관련 법규 따위를 들이대면서 ‘죽순을 함부로 캐가는 자에게는 관련 법규에 따라 과태료를 부과합니다.’ 따위의 경고 문구보다 호소력이 커 보인다. 그걸 간곡하게 부탁하는 ‘대나무 가족’은 공원을 관리하는 사람들만일까. 댓바람 소리 우거진 숲에 오순도순 함께 모여살고 있는 노인 대나무, 어른 대나무, 아기 대나무들일지도 모르겠다. ‘바람[希望]’을 ‘바람[風]’하고 혼동할까 봐 ‘바램’이라고 흔히들 잘못 쓰는데, ‘바람’이라고 정확하게 표기한 것도 돋보였다. 귀여운 ‘바람’이었다. 이렇게 깜찍하게 적힌 팻말을 읽는다면 그 누구라서 어린 죽순을 함부로 밟고 가거나 반찬거리로 쓰겠다고 마구 캐갈 수 있을 것인가.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5-01 23:02

사회의 기초 단위인 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생겨난 혈육들로 이루어진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슷한 뜻을 가진 말이 ‘식구(食口)’다. 한자말 그대로 ‘먹는 입(들)’이다. 함께 모여서 밥을 먹는 이들의 공동체다. 가족의 다른 이름으로 쓰일 만하다.그게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기능과 효율을 우선시하는 사회 환경의 변화가 주된 까닭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인 것 같다.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자기중심적 사고도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부부의 이혼율이 금메달 수준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특히 황혼 이혼까지 급격히 증가해서 새로운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그뿐 아니다. 왕래조차 끊고 사는 부모형제도 적지 않다. 상속 재산의 분할을 놓고 형제들이 법정 소송을 벌이는 일도 흔해졌다. 재산을 물려주는 조건으로 부모와 자식이 직접 서명한 효도 계약서라는 걸 쓰기도 한단다. 가족도 돈 다음에 났다는 게 정설로 굳어가는 듯하다.어느 조직에 속해 있거나 뜻을 같이하면 남남끼리도 얼마든지 가족을 이룰 수 있다. 2차적 의미의 가족이다. 이때 주로 쓰는 말이 바로 ‘가족 같은’이고, ‘우리가 남이가’다. 한때는 어떤 기업광고의 카피로 ‘가족 경영’과 ‘또 하나의 가족’이 쓰이기도 했다. ‘함께 일할 가족을 구합니다!’는 대학로 어느 분식점 유리창에서 발견한 문구다. 거기 적힌 ‘가족’이라는 말에 잠시 눈길이 머물렀다. 흔히들 쓰는 대로 ‘직원 모집’이나 ‘아줌마 구함’이라고 쓰지 않았다. ‘가족’을 구하는 것이다. 자매처럼 믿고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뜻이겠다.그 아래 적힌 ‘성실하고 용모 단정한 40대 여성’은 언필칭 가족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도 가족 나름이라는 건가. 못나도 부모고, 말썽꾸러기여도 내 자식이니 서로 감싸주고 아픔을 나누는 게 진짜 가족 아닐까. 승진도 제때 못하고 돈벌이까지 시원찮다고 아버지 대접을 안 할 수 있는가. 구인광고 속 문장이 좀 씁쓸하게 여겨진 까닭이다.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4-24 23:02

‘샤방샤방’이라는 노래가 있다. 트로트 가수 박현빈이 불러서 널리 알려진 곡이다. ‘얼굴은 브이라인 몸매는 에스라인 아주 그냥 죽여줘요~’는 노래의 끝부분이다. 이 노래의 제목인 ‘샤방샤방’은 ‘눈에 띄게 예쁘다’는 뜻을 가진 의태어다. 물론 순우리말이다. ‘죽여줘요’ 앞에 놓인 ‘아주 그냥’의 아주는 ‘어떤 상태나 성질, 느낌 따위가 보통을 훨씬 넘어서는 정도’의 뜻을 가진 부사다. 그 뒤에 붙인 그냥은 ‘아무 이유 없이’ 혹은 ‘따지고 자시고 할 것 없이’의 뜻을 가진 말이다. 아주와 결합해서 ‘죽여주는’ 정도를 강화시킨다.아주와 바꿔 쓸 수 있는 단어가 ‘매우’다. 이 또한 ‘보통을 훨씬 넘는 정도’를 뜻하는 말이다. 매우 예쁘다, 매우 잘생겼다와 같이 쓴다. ‘대단히’도 있다. 대단히 훌륭하다, 대단히 빠르다가 그런 예다. 얼마 전부터 새롭게 표준어로 인정된 ‘너무’나 ‘너무너무’도 ‘아주’나 ‘매우’하고 얼마든지 바꿔 쓸 수 있는 말이다.이 땅의 재기 발랄한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은 이런 말 대신 새로운 걸 자가발전시켰다. 바로 ‘졸라’다. 취향에 따라 ‘존나’를 병행해서 쓰기도 한다. 이건 비속어 ‘좆나게’에서 온 말임이 분명하다. 그걸 곧이곧대로 발음하기 뭣하니까 ‘졸라’ 아니면 ‘존나’로 순화(?)시켰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지 ‘개’를 접두사처럼 덧대서 뜻을 강조하기도 한다. ‘개맛있어’ 같은 식이다.노랫말에서 눈길을 끄는 단어는 또 있다. ‘죽여줘요’다. 실제로 어떤 일이 마음에 썩 들 경우 흔히들 ‘죽여준다’는 말을 썼다. 얼굴이든 몸매든 예쁘거나 미끈하게 빠졌으면 무조건 죽여준다고 했다. ‘끝내준다’는 물론 그보다 강도가 조금 약한 말이다. ‘죽여준다’도 이제는 한물 간 유행어다. 요즘 아이들은 출처도 불분명한 ‘쩐다’를 애용한다. ‘죽여준다’나 ‘죽여줘요’ 대신 ‘쩐다’나 ‘쩔어요’라는 말을 거침없이 주고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그냥 죽여줘요’를 요즘 아이들 식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혹시…, ‘존나 개쩐다?’·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4-17 23:02

순우리말 ‘자리’는 대략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교실이나 공연장에서는 책걸상이나 지정 좌석 같은 물리적인 장소를 가리킨다. 어떤 사람이 조직에서 맡고 있는 지위나 역할을 가리킬 때도 ‘자리’를 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사람이 어떤 직위에 오르면 그에 걸맞은 업무추진 능력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그걸 ‘지위 효과’라고도 부른단다. ‘완장’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인다. 주어진 지위가 무슨 대단한 권력인 줄 알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걸 빗대어 말할 때 그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 완장이다.자리에 해당하는 한자말은 아마 ‘위치(位置)’일 것이다. 위치는 자리에 비해 쓰임이 제한적이다. 적어도 ‘책걸상’이나 ‘지정 좌석’의 뜻으로 쓰이는 일은 드물다. 그래도 이 둘은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하다’를 뒤에 붙여서 ‘자리하다’, ‘위치하다’와 같이 용언으로 쓴다는 점이다. 문제는 한자말 위치를 남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무슨 뜻일까? ‘왼쪽에 위치한 정문을 이용해주세요!’ 어느 음식점 출입문을 보니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 알림판의 ‘위치한’에 눈길이 잠시 머물렀다. 위치한은 어느 공간을 차지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일 텐데, 그에 맞는 순우리말이 있다. 바로 ‘있다’다. 그러니까 ‘왼쪽에 위치한’은 ‘왼쪽에 있는’이라고 써도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긴 ‘좌측에 위치한’이라고 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버스정류장은 성당 정문에 위치해 있다.’, ‘5번 출구에 위치해 있다.’와 같은 식으로 꼬박꼬박 ‘위치’를 써야 하는 걸까. ‘자리하다’나 ‘자리 잡다’도 마찬가지다. ‘득점 선두를 달리는 팀 타선의 중심에 아무개 선수가 자리하고 있다.’가 그런 예다. ‘자리하고’를 빼고 ‘있다’만 써도 된다. 어째서 이런 언어 습관이 생겨난 것일까. 혹시 그렇게 쓰거나 말하면 품격이 조금 올라갈 거라고 착각들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4-10 23:02

‘기다리는 그 순간만은 꿈결처럼 감미로웠다아아∼’ 나훈아가 부른 ‘찻집의 고독’의 일부다. 더 말해 무엇 할까. 꼭 온다는 기약이나 믿음만 있다면 그 시간만큼 달콤한 게 또 어디 있으랴.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경우다. 그런데 만나기로 한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끝내 종무소식이면 ‘싸늘하게 식은 찻잔에 슬픔처럼 어리는 고독’만 하릴없이 씹어야 한다.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찻집이나 다방에는 사랑하는 이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청춘남녀가 흔했다. 다들 손목시계와 출입구를 번갈아 쳐다보기 바빴다. 신문을 읽거나 탁자 위에 성냥개비로 탑을 쌓으면서 애꿎은 시간을 죽이기도 했다. 어쩌다 카운터에서 전화벨 소리라도 울리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그쪽으로 애절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이제는 추억 속 풍경이다. 그 누구든 소재 파악이 가능하다. 그가 도착할 시간 역시 얼마든지 가늠하거나 확인할 수 있다. 그때까지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면 된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고 있으면 시간은 잘도 흘러가 준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찻집의 고독’이 흘러나오던 반세기 전 어느 날 ‘꿈결처럼 감미롭게’ 설레던 시간을 그리워질 때가 있긴 하다.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누군가를 만나는 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단체모임은 더욱 그렇다. 다들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적어도 며칠 전에는 약속을 잡게 마련이다. 그런데 정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인 이들이 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으면 도대체 오긴 하는 건지 답답할 수밖에…. 그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온갖 방정맞은 상상까지 하게 된다. ‘10분만 추가할게요. 차가 많이 막혀서요.’ 그 뜻이 한눈에 들어오는 문자메시지다. 음식점을 떠올리게 하는 ‘추가’를 쓴 건 ‘10분쯤 늦겠어요.’에 비해 좀 정겹다. 당연히 스스럼없는 사이에 한해서다. 차가 막혀서 약속장소에 늦게 도착할 수는 있다. 신호 대기하는 짧은 시간에 이런 문자를 보내서 상대를 배려하는 게 성숙한 태도 아닐까 싶은 것이다.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4-03 23:02

‘나는 빤히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열심히 액정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 달에 소설을 한 편 이상 읽는 독자라면 그 이름 석 자만은 익히 알 것 같은 어느 작가의 단편소설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이 두 개의 문장에는 어떤 공통점이 들어 있는가. 꾸미는 말과 꾸밈을 받는 말의 거리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 문장에서 부사어는 다른 부사어나 용언을 꾸미고, 관형어는 체언을 꾸며준다. ‘아주 느리게 흐르는 강물’ 같은 문장이 그걸 한눈에 보여준다. 부사어 ‘아주’는 다른 부사어 ‘느리게’를, ‘느리게’는 용언인 ‘흐르는’을, 관형어 ‘흐르는’은 체언인 ‘강물’을 꾸미고 있다. 이 구절이 자연스럽게 읽히는 까닭은 꾸미는 말과 꾸밈을 받는 말을 가깝게 두었기 때문이다. 앞서의 예문으로 돌아가 보자. 첫 문장의 ‘빤히’가 꾸미는 말은 ‘바라보았다’일 것이고, ‘열심히’는 ‘응시하고’를 꾸민다. 그 둘 사이를 다른 몇 개의 단어가 가로막고 있어서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있다.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액정 모니터를 열심히 응시하고 있었다.’와 같이 써야 한다는 말이다. ‘그가 술에 취하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잠든 초롱이 얼굴을 쓰다듬으며 하는 말이다.’라고 쓴 문장은 어떤가. 마치 초롱이라는 아이가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면서 잠든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갖게 한다. ‘혀 꼬부라진 소리로 하는 말이다.’라고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국민이라도 그 이름만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어느 소설가의 단편소설에는 또 이런 게 있었다. ‘그는 유심히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제 왼손은 얌전히 욕실 바닥을 향해 늘어뜨려져 있었다.’ 이 두 문장의 부사어 ‘유심히’, ‘얌전히’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 그림 속의 ‘…일제히 헌재의 결정을 환영하며…’의 경우 부사어 ‘일제히’ 역시 ‘환영하며’를 꾸미고 있으므로 ‘…헌재의 결정을 일제히 환영하며…’라고 써야지 싶은 것이다.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3-20 23:02

‘바르게’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비뚤어지거나 굽은 데가 없이 곧거나 반듯하게’라고 나와 있다. ‘삐딱하지 않게’가 ‘바르게’다. ‘바르게 살자’는 ‘삐딱하지 않게 살자’는 뜻일 게다. ‘바르게 살자’라는 두 어절의 문장을 새긴 바윗돌을 전국 어디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진실’한 마음을 갖고 ‘질서’를 잘 지켜서 모두모두 ‘화합’하며 살아가자는 말까지 그 아래 또박또박 덧붙여 놓았다. 구구절절 바른 말이다. 세상에 바르지 않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면 이런 말을 비석에까지 새겼을까 싶다. 그런데 거기 적힌 ‘바르게 살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몇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든다. 우리말을 웬만큼 구사할 줄 아는 어느 외국인이 부근을 지나다가 돌에 새겨진 말을 발견하면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아,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바르게 살지 않으면 이런 말을 이렇게 써 놓았을까. 하긴 일리가 없지는 않아….’ 한겨울 매서운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말마다 광화문을 밝힌 수십만 개의 촛불을 바라본 외국인이라면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 맞아. 바르게 살아야 해.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여기서 이 말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어쩔 뻔했어? 얘들아, 너희들도 여기에 적힌 것 좀 읽어 봐라. 어때? 참 좋은 말이지? 앞으로는 엄마하고 아빠도 바르게 살아가도록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너희들도 이걸 꼭 실천해야 한다, 알겠지?” 이렇게 깨닫고 실천 의지를 굳건히 다질 사람은 또 과연 몇이나 될까. 이토록 큼직한 돌을 세우고 ‘바르게 살자’고 적어 넣어서 이 땅의 수많은 ‘바르지 못한’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뜯어고치고 싶어하는 이들은 또 과연 얼마나 바르게 살아가고 있을까. 한때 ‘공주’로 떠받들어졌던 ‘그분’ 또한 이런 비석을 청와대 관저 앞마당에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바르게 살자’를 맘속에 새겼더라면 뭐가 좀 달라지긴 했을까. 문득 오래 전에 어느 드라마를 통해서 유행했던 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너나 잘 하세요.”라고 했던….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3-13 23:02

‘피의 대가, 반드시 치를 것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레버넌트’라는 영화의 포스터에서 발견한 문구다. 거기 적힌 ‘대가’라는 말이 잠시 혼란스러웠다. ‘대가(代價)’일까, 아니면 ‘대가(大家)’일까해서다. 물론 이어진 말로 미루어 ‘대가(代價)’라는 건 짐작이 갔다. 그렇더라도 ‘댓가’라고 적을 수 있었더라면 좀 좋을까 싶었다. 사이시옷은 순우리말에 쓴다. 순우리말과 한자어가 결합된 경우에도 덧댄다. ‘빗물’과 ‘처갓집’ 같은 게 그런 예다. 한자말의 경우는 어떤가. 사이시옷을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곳간(庫間), 셋방(貰房), 숫자(數字), 찻간(車間), 툇간(退間), 횟수(回數) 여섯 개 단어는 사이시옷을 반드시 적어야 옳다. 그렇게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생선회를 파는 식당은 ‘횟집’과 ‘회집’ 중 어느 것이 옳겠는가? ‘횟집’이다. ‘회(膾)’는 한자어지만 ‘집’이 순우리말이어서 그렇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 ‘횟집’ 메뉴판에 가격 대신 ‘싯가’라고 적힌 걸 본 적 있을 것이다. 그 ‘싯가’는 우리말 어법에 어긋난다. ‘시가(市價)’가 맞다. 까닭은 뻔하다. 앞서 본 한자말 여섯 개 중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꾸 떼를 쓰고 싶어진다. 이걸 곧이곧대로 ‘시가’라고 ‘우아하게’ 말하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대부분 ‘싣까’ 아니면 ‘시까’라고 말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그런데도 읽거나 말할 때는 ‘싣까’든 ‘시까’든 상관이 없지만, 쓸 때는 ‘시가’가 맞춤법에 맞는 말이라니 도리가 없다. 흔히들 쓰는 ‘시가(媤家)’하고 소리가 같아서 헛갈리든 말든 그건 알 바 아니라는 건가.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앞서의 여섯 개 한자말에만 사이시옷을 쓸 수 있다고 정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대가(大家)’와 구분하는 뜻으로 ‘댓가(代價)’를 표준어로 인정할 수는 없는가. ‘시가(媤家)’와 ‘싯가(市價)’를 나누도록 표준어 규정을 손봐서 다들 ‘댓가’와 ‘싯가’를 마음 편하게 쓸 수 있도록 해주면 좀 좋을까 싶은 것이다.

오피니언 | 기고 | 2017-03-06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