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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 퇴진 전북 비상시국회의’는 매주 도민총궐기대회를 열고 있다. 비상시국회의 상임대표 4인 중 한 명인 이세우 목사(57)는 “이번 도민총궐기는 도민들이 함께 참여한 이 시대의 시민혁명이라 말할 수 있다”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가결을 시민의 힘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이 목사는 이번 도민총궐기를 계기로 전북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또 우리 사회의 청춘들이 한 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큰 힘을 얻었다고 평했다. 이 목사를 만나 그동안의 비상시국회의 이야기와 향후 방향 등에 대해 들어봤다.- 비상시국회의가 주도한 도민총궐기대회가 계속 열리고 있습니다. 이 협의체의 출범은 어떻게 계획했습니까.“기존 도내 시민·사회단체들은 박근혜 정권의 정책을 평가하며 국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간헐적으로 비판적인 입장들을 내왔습니다. 국정교과서와 GMO, 위안부 합의 등 일련의 사건들이 터지며 여러 단체도 함께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석달 전 최순실 사건이 터지자 이 문제는 한 단체가 중심이 돼 대응하기에는 너무 중대하다고 판단, 도내 여러 단체와 협의한 결과 함께 힘을 합쳐 대응하자는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처음에는 3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였고 최근에는 70여 개 단체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도내 여러 단체가 결합하는데 어려움도 있었을텐데요.“도내에서도 기존에는 박근혜 정권이 정책적 잘못을 했을 뿐 근본적 잘못은 아니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정권 퇴진과 관련해서도 서로 입장이 달랐죠. 최순실 사건 이후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정권 퇴진만이 답이라는 의견이 모였습니다. 이후에도 퇴진 방식에 대해 이견이 많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각 단체 대표들이 모여 단체의 크기와 영향력과 별개로 일방적 강요 없이 모든 단체가 동의할 때 행동하자고 마음이 모였고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최근에는 자주 모이다 보니 어색함과 과거의 앙금이 사라지고 한 단계씩 나아가는 방향으로 간격이 좁혀졌습니다.”- 매주 토요일 열리는 도민총궐기대회에 많은 이들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하셨나요.“기존 집회들을 볼 때 이렇게 많은 도민이 나오실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전북지역 사회단체가 모두 모여 함께하는 집회는 처음이기 때문에 앞서 총궐기를 기획했던 서울이나 다른 지역의 집회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지금의 사태와 집회는 시대적 흐름이기 때문에 우리 지역에서만 독자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많은 시민이 모이게 된 원동력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저는 중·고등학생과 언론의 역할이 컸다고 봅니다. 집회를 관망하던 청년들이 중·고등학생들이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동참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며 시민에게 외면받던 언론 매체들이 이러한 상황을 보도하면서 예상보다 더 큰 힘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계속 보도를 하니까 그 모습을 본 도민들도 집회에 폭발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참여자가 늘수록 주최 측의 고민도 적지않았을 것 같은데요.“학생들 걱정이 가장 컸습니다. 아무래도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안전문제로 학교 측과 마찰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렇지만 학생들과 대화를 통해 자발적으로 참여했음을 알게 됐고 원하는 학생의 경우는 무대에서 발언 기회를 주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우리는 무턱대고 분노하고 당위적으로 주장만 했었는데 청중과 호흡을 맞추고 유머와 위트를 섞어가며 말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 비상시국회의에 참여한 단체는 도민들에게 무대만 제공할 뿐 직접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습니다.”- 그러한 방침에 반발하는 단체도 있을 것 같은데요.“처음 시국회의를 결성할 때 정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단체들이 공평한 목소리를 듣고, 우리가 도민들을 위해 무대는 마련하지만 절대로 앞에 나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국회의가 직접적인 목소리를 내면 호응도 있겠지만 반발하는 시민도 있을 수 있다는 게 모든 단체의 판단이었습니다. 가능하다면 단체의 목소리는 배제하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습니다. 정당과 정치인들의 무대 발언을 수용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현 시국이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뒤 동력이 많이 떨어진 게 사실입니다. 떨어진 동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지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직 이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치지 않고 도민들 누구 하나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 배려하고 응원해야 합니다. 물론 주최 측도 도민 여러분의 의견을 계속해서 반영해야겠죠. 도민총궐기 시간과 장소를 변경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농촌문제, 환경문제, 교육문제 등 사회 참여를 많이 하고 계신데요. 특별한 계기가 있을텐데요.“신학대학원 시절 농촌 문제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당시 농촌을 떠나는 농민과 자살하는 농민이 많다는 내용을 접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손해’라는 이야기를 듣고 도대체 왜 그같은 현상이 생기는지 고민하게 됐습니다. 좋은 기회가 있어 지역에 내려와 함께 농사도 짓고 생활하면서 농업의 기반인 땅, 환경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이 문제들이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의 문제라는 생각에 이르렀고 직접적인 참여를 하게 된 것입니다.”-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다면 무엇인지요.“처음 완주에 왔을 때 인근 중학교가 폐교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을에서 학교가 사라지면 마을 자체의 활기가 떨어지게 되죠. 마을 주민과 학교, 교육청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힘을 실어주는 주민들도 생겨나고 선생님들과 가까운 지역의 주민들도 도와줘 학생 수를 점차 늘려갔습니다. 현재도 그 학교가 폐교되지 않고 계속 운영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떠한 활동들을 이어나가실 생각이십니까. “이번 계기를 통해서 더는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노동자들은 저녁이 있는 삶, 청년들은 낭만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성찰을 통해 제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현재 한쪽으로 치우쳐진 부의 왜곡을 해결하고, 낮은 수준이라도 사회 기반들이 도민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진다면 우리 지역의 행복지수가 올라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당장은 경제적으로 다른 곳보다 어려울 수 있어도 그 어떤 지역보다 큰 힘이 생기는 바탕이 될 것입니다. 그런 기반을 다지는 일에 제가 도움된다면 어떠한 활동이든 계속 할 계획입니다.”● [이세우 목사는] 농촌 관심 갖고 활동하다 지역 사회문제 뛰어들어1959년 서울에서 5남1녀의 막내로 태어난 이세우 목사는 초·중·고는 물론 대학원까지 서울에서 마친 서울 토박이다. 1989년 어려운 상황에 처한 농촌에서의 목회 활동을 위해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다니다 전북에 무작정 내려와 정착했다. 완주군 이서면에 있는 들녘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하며 직접 농사도 짓는다.농촌 빈곤과 자살 문제 해법을 고민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직거래를 고안하고, 친환경 농법을 이용한 생산도 하고 있다.학교 급식에 유기농 농산물을 공급하는 방식을 끌어냈고 이는 농촌 마을 주민들의 소득 증대로 이어졌다.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사회 시스템이 잘못됐음을 깨닫고 그 후부터 전북 지역 사회문제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농촌, 교육, 사회문제 활동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이 목사는 지난 2009년 ‘전북 녹색연합’을 설립해 지역사회 환경문제에도 앞장서고 있다.현재 한미 FTA 기독교 대책위원회 대표, 한국종교연합 전북대표, 반 GMO 상임대표, 교육발전 민관협력위원회 위원장인 이 목사는 최근 전북 비상시국회의 공동대표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기획 | 천경석 | 2016-12-26 23:02

라승용 농촌진흥청 차장은 9급 공무원으로 공직을 시작해 37년만에 1급까지 오른 인물이다. 김제출신인 그는 농촌진흥청 공공기관 지방 이전 초대추진단장을 맡아 전북혁신도시의 농업분야 R&D 기관의 집적을 이뤄냈다. 농촌진흥청 이전은 전북혁신도시 농생명연구단지가 조성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라 차장은 연말이면 40년 6개월 간 몸담아 왔던 공직을 떠난다. 전북출신으로 처음 농촌진흥청 차장에 오르기까지 우려곡절도 많았다.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라승용 차장은 40년 공직생활 동안 보람된 일도 물론 많았지만, 그 만큼 아쉬운 점이 더 많다고 털어놨다. 우리나라 농업발전을 위해 쉼 없이 달려온 그에게 공직을 떠나는 심경과 그 동안의 소회, 한국농업이 나아갈 길에 대해 들어봤다.-오랜 공직생활을 마치는 소회가 누구보다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농촌진흥청을 떠나시는 느낌이 어떠신지요.“일을 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지난날 내 발자취에 대해 돌아보니 만족보단 아쉬움이 남습니다. 막상 공직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오니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반성과 일에 대한 생각이 더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공직생활 중 가장 보람된 일과 가장 후회됐던 일은 무엇입니까. “제 개인적으로는 40년 공직생활을 하면서 정말로 이 일만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농촌진흥청의 전북이전에 온 힘을 쏟은 것이죠. 혁신도시 사업은 참여정부시절 낙후된 지방을 살리는 한편 대한민국의 균형발전을 위해 추진됐습니다. 저는 농촌진흥청에서 초대지방이전단장으로 오면서, 제 자리를 걸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일을 맡으면서 온갖 비난을 받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전북혁신도시에 제대로 자리 잡은 농촌진흥청과 산하기관 시설을 둘러볼 때면 마음이 뿌듯합니다. 가장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제가 연구직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농업기술을 위한 연구를 많이 못했다는 것입니다. 공직생활 대부분을 연구서비스와 행정지원파트에서 보냈습니다. 연구에 깊이 빠져보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어떤 위치에 가서든지 제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병해충 방재기술, 친환경 농약개발 등 당시에 하고 싶은 연구들을 못해본 것이 미련이 남습니다.“-앞서 말씀하셨다시피 농촌진흥청의 전북이전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처음 혁신도시 사업이 시작될 때, 정부는 농촌진흥청 본청을 비롯한 7개 소속기관을 각 도에 하나씩 따로 이전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촌진흥청과 같은 연구기관은 흩어지면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에 저는 모든 것을 걸고 끝까지 모든 기관의 집단이전을 주장해 관철시켰습니다. 특히 본청을 전북으로 올 수 있게 만드는 과정이 힘들었습니다. 투쟁을 하면서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라승용이 고향전북에 업적을 세우기 위해 억지를 부린다’ 등의 숱한 오해와 음해도 많이 받았죠. 농진청이 수원에 자리잡은 지 52년이 지난 시점에서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했다는 것은 단지 시설과 직원의 공간적·물리적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농업연구의 역사와 전통·정신을 새로운 연구시설과 청사에 담아 전북혁신도시로 옮겨 농산업 발전을 견인하고 세계적 농업연구의 중심이 될 새로운 농업연구 메카를 만들고자 한 것이지요. 우여곡절 끝에 이전이 완료된 지금은 많은 분들이 저와 뜻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농촌진흥청에 입사한 계기는 무엇인가요.“저는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에 장학금을 받고 김제농고에 진학했습니다. 그 당시 농고는 3학년이 되면 실습을 통해 취직했죠. 저는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포기하고 서울에서 농림직 공무원 시험에 응시 후 합격했습니다. 그 후 못 이룬 꿈을 위해 일을 하면서 방통대 학사학위를 받고, 고려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정신없이 달려와 보니 어언 40년이 지났습니다.” -공직사회에서 ‘자수성가’의 표본으로 많은 후배들의 ‘롤모델’이 되셨는데요. 후배 공직자 분들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흙수저·헬조선 등 노력이 타고난 스펙을 앞지른다는 자조섞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저는 그래도 아직까진 열정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는 항상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너의 인사권은 당신이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다’고 말입니다. 누가 인사권자로 오든지 간에 농촌진흥청의 경우 논문과 각종 실적이 승진의 기준이 됩니다. 최근 ‘멘토’라는게 유행했습니다. 저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멘토가 누구였냐고 많이 물어봅니다. 저는 ‘내가 만난사람 모두 멘토’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배웠습니다. 배우는 자세를 잃지 않고 꾸준한 열정을 이어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저는 내 인사권은 내가 쥐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발전하길 바랍니다.” -공직을 떠난 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은퇴를 앞두고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네요. 저는 아직 현직에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선뜻 말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능력을 한국농업발전을 위해 쓰자’는 다짐입니다. 정년이 다가오니까 몇몇 대학교에서 석좌교수 제안도 왔습니다만, 저는 후학양성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자칫 연구활동을 오래 떠난 제가 ‘낡은 학문’을 가르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농진청 국장급 이상 퇴직 동기들하고 뜻을 같이 한 것이 있습니다. 전북에 남아 ‘비영리재단’을 설립해 우리의 재능을 기부하자고요. 저는 전북에 온 사람이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를 위해 저는 수원에 있던 집을 다 정리했습니다. 전북에 남아 정말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직원들이 가끔 찾아와서 ‘차장님 이제 노는 것 좀 연습하세요’라고 하는데 천성이 놀지 못하는 체질인가 봅니다.”● [라승용 차장은] 근성·뚝심으로 9급서 1급까지라승용(59) 농촌진흥청 차장은 김제 출신으로 김제중앙초, 김제중학교, 김제농고(현 김제자영고)를 졸업했다. 영농학생으로 학비를 절약, 각종 장학금을 받으며 김제농고를 졸업한 뒤 1976년 농림직 9급으로 공직에 입문했다. 첫 발령지로 국립 부산생사검사소에 발령받은 그는 군 전역 후 국립자재검사소에 잠시 머물다 농촌진흥청 농약연구소에서 본격적인 연구원의 삶을 시작했다. 고졸 신분으로 농림부에 9급 공무원으로 들어온 후 방송통신대를 10년 동안 다녀 학사 학위를 받은 후 고려대학교에서 원예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농진청 본청 연구기획과장과 정책과장에 이어 참여정부 시절 농진청의 전북 이전을 총괄하는 지방이전지원단장을 역임했다. 그 후 본청 연구정책국장과 국립축산과학원장에 이어 지난해부터 국립농업과학원장으로 일했으며, 지난 2013년 제24대 차장으로 임명됐다. 라승용 차장을 대변하는 단어는 ‘근성’과 ‘뚝심’이다. 라 차장은 열등감을 열정의 원천으로 삼고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일’로 만들기 위해 40년 인생을 농업발전에 바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기획 | 김윤정 | 2016-12-19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