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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수명한 우리 고장 인심좋고 성실한 조상들의 덕망을 이어 받아 명석한 두뇌를 갈고 닦아 국가의 동량이 된 박사촌을 이루었으니 그 높은 뜻을 기리고 후대에 전수코자...’임실 오수에서 삼계면 소재지로 이어지는 길 옆에 지난 2000년 3월 이 지역 중견 인사들의 모임 삼정회가 세운 ‘博士의 고장 三溪面’ 비문에 새겨진 내용이다. 이 길을 따라 안으로 쑥 들어가면 면소재지를 지나 세심리에 ‘박사골 체험관’이 있고, 그 마당에 우뚝 세워진 박사모를 쓴 석상이 박사고을임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삼계면은 ‘박사골’로 불리는 인재의 고장이다. 예로부터 한양에서 낙향해 터를 잡은 선비들이 많았고, 근래 삼계면에서 배출된 ‘박사’가 200명에 육박하고 있다.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세심리에 ‘박사골체험관’을 지어 운영하며 큰 자랑으로 삼고 있다. 최근 ‘임실사람 임실이야기’란 저서를 낸 임실군청 문화관광치즈과 김철배 학예사는 “계유정란과 무오사화 등을 피해 내려온 선비들이 씨족을 이뤄 학문을 갈고 닦으며 터전을 이룬 곳”이라고 소개한다. 500년 전부터 중앙정치의 화를 피해 자리잡고 살아온 선비들은 후학을 육성하고 또 조정과 연을 맺기도 했다. 어은리의 청주한씨 고택과 육우정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광주 김씨)의 외가였다. 인경왕후가 10세라는 어린 나이에 세자비로 간택 돼 외로운 궁궐 생활을 하면서 입궐 전에 지냈던 외가 생활을 그리워 했다는 이야기가 이 마을에서 전해진다. 인경왕후가 외가에서 지낼 때 먹었던 콩잎장아찌를 진상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후천리에 많이 사는 풍천노씨 집안의 노익원 공은 정조의 스승을 지냈을 만큼 인품과 학식이 뛰어난 선비로 알려져 있다. 240여년 된 그의 집 대문에 쓰여진 ‘馬四客’(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예의를 알고 용모단정한 사람이 사는 곳)이란 글씨가 말해 준다. 지금도 임실군 삼계면은 발길 닿는 곳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묵향이 흠뻑 배어 있는 고을이다. 노동환 가옥, 한상준 고택, 육우당 등 200년 전후에 건축된 선비들의 한옥이 즐비하다. 고을 곳곳에 만취정, 광제정, 오괴정 등 정자가 많아 산골 마을 사람들이 예로부터 글과 풍류를 사랑했고, 시인묵객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음직 하다. 선비들의 고결한 인품과 학문을 존중해 세운 서원, 각 성씨들이 조성한 사당과 묘동도 수두룩 하다. 어은리에서 살았던 종호(從好) 최광범씨는 근래의 뛰어난 한학자로 알려진다. 삼계면에서 인물이 많이 배출되는 것은 향학열과 교육열이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적 개념의 삼계면 1호 박사는 고 심길순 박사다. 1918년생인 심박사는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약학대 교수, 학장 등을 지냈다. 2호 박사는 고 허세욱 박사다. 1934년생인 허 박사는 한국외국어대와 타이완사범대 대학원을 나온 중국어문학자로 외대와 고려대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시인이자 수필가이다. 중앙교육진흥연구소 회장을 지낸 허필수 박사도 삼계가 고향이다. 임실의 박사들은 주변과 가족 영향을 많이 받아 직계, 친인척 박사 그룹도 상당하다. 예를 들어 전북대 교수를 지낸 노상순씨의 아들이 노덕환 노도환 노승환 노방환 박사이고, 손자 노시훈씨도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명 8박사 집안이다. 노환성·노영진은 부자지간이고 노상균·노상우는 형제이다. 나로호 연구소에 근무하는 한민홍 박사는 한상엽박사 아들이다. 화천수력발전소장 박병근씨와 박배근박사는 사촌, 김봉철·김주현·김진엽은 삼남매, 김대현·김인희는 형제, 심석무·심유경은 부녀, 김흥주·김효수는 남매, 정남옥·정석균은 남매, 오세원·오세홍은 형제, 김학준·김택현은 삼촌조카, 김진원·김문수는 사촌이다. 세심리에 ‘박사골체험관’을 짓고 인재의 고장 삼계면의 위상을 높이고자 심혈을 기울이는 오흥섭씨(59)는 “인재가 많이 나는 것은 우리 고장의 경사요, 큰 자랑입니다. 박사 테마파크를 조성, 삼계면을 더욱 알리고 싶다”고 말한다. 삼계면은 면적 56㎢에 삼계리, 후천리, 어은리, 삼은리, 산수리, 세심리, 죽계리, 홍곡리, 학정리, 홍현리, 오지리, 덕계리, 두월리, 뇌천리 등 14개 법정리로 구성돼 있다. 인구는 1612명이고, 최근 전통쌀엿을 비롯해 부추와 한우 농사가 많다. 인재의 상징으로 ‘뇌’ 모양을 한 호두 작목반도 출범했다. 연안김씨 고 김시영씨를 중심으로 한 주민들이 살려 낸 ‘말천방 들노래’는 ‘임실군 무형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돼 있다. △정계한상준 5·6·7대 국회의원(어은리), 김진억 전 임실군수(후천리), 오현모 군의원(삼은리), 노두상(삼계리), 김신기 군의원(홍곡리), 김학관 군의원(덕계리), 환경운동 등 시민단체 활동가이자 정치인 최형재 노무현재단 전북지역위원회 공동대표(어은리)△관계내년 익산에서 열리는 제99회 전국체전 화합문화체전 추진 총괄본부장 이지영 전 익산부시장(덕계리), 전북경찰청 차장과 전주완산경찰서장을 지낸 김학역(삼계리), 정보통신부 정석균(오지리), 기획재정부 허점옥(덕계리), 총무처 이재흥(덕계리), 농업기술원 국장을 지낸 유정(삼은리), 경남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김종영(삼계리), 새만금추진지원단장 오정호(삼은리), 김학엽 4대 전주지방환경창장(세심리), 김정호 11대 전주지방환경청장(홍곡리), 오경섭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삼은리)△교육계 심길순 전 서울대 약학대학장(뇌천리), 노상순 전 전북대 명예교수(후천리),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어은리), 허필수 전 중앙교육진흥연구소 회장(덕계리), 김효순 김제교육지원청 교육장(두월리), 김학산 전북교육연수원 원장(삼계리), 노덕환 군산대명예교수(후천리), 노도환 전북대교수(후천리), 노방환(전북대교수), 노상우 전북대교수(후천리), 박배근 충남대 수의학교 교수(세심리), 박은숙 완주 봉성초교 교장(세심리), 오동순(우석대 교수(세심리), 한광수 우석대교수(어은리), 김근주 전북대교수(두월리), 이동호 전북대교수(세심리), 신동수 한양대교수(학정리), 이미재 수원대교수(세심리), 수능출제위원장을 지낸 정병헌 숙명여대교수(봉현리), 이용현 군산대 명예교수(봉현리)△경제·사회계2003년 12월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 수사’ 특별검사를 맡아 유명해진 김진흥 변호사(홍곡리), 김제경찰서장을 역임한 박달근 인천 도로교통공단 전 인천시지부장, 노상흡 캠틱종합기술원 본부장(후천리), 노보환 전 광명기업사장(후천리), (사)한국안전보건협회 회장 오병섭(삼은리), 화천수력발전소 소장 박병근(세심리), 한국농약과학회 회장, 한국잡초학회장 등을 지낸 한성수 전 원광대 대학원장(오지리), 한평호 한국생산성본부 근무 (봉현리), 류강열 전주생물벤처연구소(삼은리)△문화예술언론계삼계 말천방 들노래를 세상에 알리고 전승, 임실군 무형향토문화유산 제1호 지정을 이끌어 낸 김시영(두월리), 고려대·외국어대 중문과 교수를 역임하고 시인이자 수필가로 활동한 허세욱(덕계리), 전주정보영상진흥원장을 지낸 이흥재 추계예술대학교수(삼계리), 박임근 한겨례신문 전북담당지역기자(세심리), 한국국학진흥원 김민옥(두월리)△의료계 ‘간’ 분야 전문의로 명성을 얻고 있는 김인희 전북대의대 교수(삼계리), 박승근 전남 순천 아이미코병원 피부과원장(세심리), 모윤희 치과원장(삼계리),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성수 의학박사(어은리), 허균 국립암센터 연구소 (후천리)·김재호 수석논설위원

기획 | 김재호 | 2017-10-24 23:02

전주시 서노송동에 가면 선미촌이라는 ‘유리의 성’이 있다. 전주시청 바로 뒤편에 자리잡은 선미촌은 성매매업소 집결지. 성매매특별법이 2004년 9월23일부터 시행되고 있지만 버젓이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13년 전 특별법 제정 후 당국이 성매매업소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과 처벌에 나섰지만 선미촌같은 유리의 성이 전국 곳곳에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유리방 형태의 전형적인 성매매집결지는 물론 술집 형태, 숙박업소 형태 등 다양하다. 성매매는 주택가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이른바 풍선효과다. 최근 광주여성인권지원센터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9월 현재 광주시내 8개의 성매매 집결지에서 일하는 여성이 250명에 이른다. 성매매는 동서고금 사회적 골칫거리다. 허용하는 나라도 있고, 그저 방관하는 나라도 있다. 우리나라는 1961년 윤락행위방지법을 만들었지만 사문화 된 상태였다. 사회의 양심을 찌르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2000년 9월19일 군산 성매매업소 집결지인 ‘감독골목’의 한 업소에서 불이 나 성매매 여성 5명이 사망했고, 불과 1년4개월만인 2002년 1월29일 군산시 개복동 성매매집결지에서 불이 나 성매매 여성 14명이 사망했다. 개복동 업소 2층에는 1평 정도의 쪽방이 7개나 있었고, 내부 통로는 60~80㎝에 불과했다. 창문과 출입문에는 쇠창살이 설치됐고 안팎에서 모두 잠글 수 있는 2중자물쇠가 설치돼 있었다. 성매매 여성들은 참변을 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한 여성이 선미촌에서 자살했다. 이미 인천, 대구, 광주, 부산을 거쳤다는 이 여성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아무리 일을 해도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 빚 때문에? 창문이 온통 검은색 시트지에 가려 한 줌 빛도 볼 수 없어서? 외출은커녕 아플 때 병원 가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가 비참해서? 최근 전주시가 선미촌 업소 3곳을 매입,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일부는 현장시청이다.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는 이 곳에서 지난 9월21일부터 29일까지 ‘선미촌 리본 프로젝트’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고형숙, 김정경 등 모두 6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전시회를 연 센터는 염원했다.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선미촌에 있는 여성들의 삶이 지금보다 나아지는 것입니다. 20㎝가 넘는 고단한 신발 위에서 버텨낸 시간 아래로 내려와 쉴 수 있는 것입니다. 묶여버린 삶, 묶여버린 공간의 낡은 매듭을 풀고 다시 태어나, 살아나는 것입니다” 성매매특별법 13년,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무엇인가.김재호 수석논설위원

오피니언 | 김재호 | 2017-10-12 23:02

전주 완판본문화관에서 오늘 오후 2시 특별한 행사가 열린다. ‘100년 만에 핀 꽃, 완판본 심청전’이다. 이 행사는 100년 전 전주 출판가에서 목판으로 인쇄된 심청전의 목판 복각 출판 기념식이다. 오는 10월 9일 한글 571돌을 기념하는 의미가 있고, 전주 완판본의 가치를 되새기는 의미가 있다. 목판 복각 작업에는 전주에서 완판본의 맥을 이어가는 안준영 선생과 그 문하생인 강상미, 김상욱, 김형채, 박은희, 신갑철, 안은주, 안정주, 이인숙, 조승빈 씨 등이 참여했다. 모든 작업을 수작업으로 해 내야 하는 이 기나긴 작업이 결실을 보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다. 이번에 이산 안준영 선생과 문하생들이 해 낸 완판본 심청전 복각 원본은 1906년 전주 서계서포(西溪書鋪)에서 간행된 완서계신판(完西溪新板)이다. 박순호 교수의 소장본을 모본으로 하여 작업이 진행됐다. 이 심청전은 상·하 2권이다. 2007~2009년에 상권 30장이 복각됐고, 하권 41장은 2014년부터 최근까지 전주에서 복각 작업이 진행됐다. 이산 안준영 선생과 그 문하생들의 이번 작업은 몇가지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 출판문화를 주도하며 한글 대중화를 이끈 전주 완판본을 현대에 펼쳐 보임으로써 출판문화의 중심지 전주의 자긍심을 높였다는 점,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전통판각강좌의 소중한 결실이라는 점,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복각했다는 점, 전주 한지에 인쇄해 오침안정법으로 묶은 서책이라는 점 등이다. 또 이번 작업을 통해 문화 원형의 전승 중요성과 완판본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전주는 기록문화라는 소중한 자산을 보유한 도시다. 사실 심청가나 열녀수절춘향가 등 100년 전의 완판본 목판은 대부분 소실됐지만, 전라감영에서 작업했던 완영본목판은 전주향교에 5059판이나 보관돼 왔다. 지금은 전북대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지만, 전라감영에서 인쇄한 목판 완영책판이 이 정도 보관되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경북의 안동국학진흥원이 국내에서는 10만장에 달하는 책판을 보유하고 있지만 감영판본은 전무하다. 소설류인 완판본이 6.25전쟁 등을 겪으며 소실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전주 선비들이 감영판본을 5059판이나 거의 원형대로 보관해 온 것은 조선왕조실록을 온전히 지켜낸 고장으로서 전주의 출판문화 자긍심이 남달랐음이다. 아쉬운 것은 전주가 전통판각 기능의 원형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2007년 전주에 와 완판본문화관을 맡아 운영하며 판각기능을 전수하고 있는 안준영 선생의 작업이 남다르다. 김재호 수석논설위원

오피니언 | 김재호 | 2017-09-28 23:02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지난 12일 북한의 ‘9·3핵실험’ 9일 만에 중국과 러시아가 동참하는 대북제재 결의안인 2375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006년 7월 이후 10번 째 대북제재 결의다. 북한이 잇따라 미사일과 핵실험 행보를 이어가자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가 발끈, 북한의 원유수출 30% 차단 등 국제 상거래는 물론 김정은과 김여정 남매를 제외한 북한의 실력자들까지 포함하는 강력한 제재에 나선 것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대북제재가 ‘아주 작은 걸음’이라며 향후 더욱 강력한 제재에 나설 뜻을 밝혔지만, 북한은 13일 “결의 2375호는 북한의 자위권을 박탈하고 전면적인 경제봉쇄로 국가와 인민을 완전히 질식시킬 것을 노린 도발 행위”라고 미국을 강하게 비난했다. 김정은은 84일만에 모습을 드러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민생행보를 했다. 최근 북한의 군사적 도발은 미국과의 대등한 협상을 원하는 압박카드다. 핵탄두를 싣고 날아갈 대륙간탄도탄을 개발, 미국과 대등한 수준에서 북한의 이익을 얻어 내겠다는 구상이다. 핵과 ICBM을 포기하고 테이블에서 대화하자는 국제사회의 요구는 마이동풍이다. 이번 2375호 제재로 북한은 13억 달러 이상의 막대한 손실을 입을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이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허리띠 질끈 동여매고 견디지만 이를 감내하는 주민들의 고통이란 뼈를 깎는 것과 다름없다. 위정자들이 할 짓이 아니다. 옛날 태평성대를 이뤘다는 중국의 요임금 시절에 지어졌다는 고복격양가(鼓腹擊壤歌)가 있다. 먹을 것이 풍성하면 백성들은 배를 두드리고 발로 땅을 구르며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행복해 한다. 평안한 나라를 만들어 준 지도자를 칭송한다. 자위권을 갖추고, 힘 있다고 뻐기는 세력과 동등하게 어깨를 견줘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자존감 없는 민족은 산 송장일 뿐이다. 하지만 백성들이 배가 고픈데 핵무기며 미사일이 무슨 소용인가. 엊그제 전북 고창 출신의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표결이 불발됐다. 정부·여당 못지 않게 전북 입장에서도 안타까운 일이다. 이를 두고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당을 향해 “골목대장 같은 권한행사”라고 맹비난 했고, 국민의당은 “협치 하려거든 먼저 손을 내밀라”고 받아쳤다. 사람들은 대화와 협치를 말하면서 자기 입장을 먼저 생각한다. 중용은 없고 내 주장만 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없이 꼬인 실타래를 어찌 풀겠는가. ·김재호 수석논설위원

오피니언 | 김재호 | 2017-09-14 23:02

소설이나 영화에는 종종 “허튼수작 하지 마. 움직이면 쏜다!”는 장면이 등장한다. 움직였다간 큰일 나니 섬짓한 노릇이다. ‘허튼’은 사전적으로 ‘쓸데없이 헤프거나 막된 것’을 일컫는 관형사다. 허튼수작, 허튼걸음, 허튼뱅이, 허튼계집, 허튼춤 등으로 쓰인다. 허튼춤(허튼가락)은 일정한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고 즉흥적인 춤(가락)일 것이다. 건축에서 사용하는 용어 허튼귀는 부정형의 물매로 이뤄지는 귀를 이른다. 창조적 변화다. 한자 서예에서 필사체의 정형은 필법에 따라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다. 서예가들은 이 규정 안에서 ‘왕희지’ 등 특정 서예 대가가 완성한 서체를 따라 쓴다. 그 표준을 어긋나면 허튼 것이 되니, 어느 서예 대전 응모작가가 전통적 필법을 전수받아 온 스승의 서체를 벗어나 자유분방하게 허튼체를 구사했다가는 ‘탈락’을 자초하는 것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서양 음악이든, 우리 전통음악이든 그 정해진 틀에서 움직인다. 이미 완성된 작품의 틀을 벗어나면 ‘틀린 것’이 된다. 고수 예술가들은 틀을 벗어난 듯 벗어나지 않은 듯 하게 멋을 부린다. 편곡이다. 하지만 신진이나 일반인이 멋과 기교를 부리면 자칫 건방지다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허튼’은 사전적으로 ‘틀’을 벗어난 것을 이르지만, 다양성이라든가 자유분방함에서 미적 가치 등 새로움을 추구하는 뜻을 담고 있다. 울타리는 경계선이기도 하고, 뭔가를 가둬두는 틀이다. 안전하다와 답답하다가 혼재한다. 인간은 틀을 깨고 나갈 때 구만리 장천을 날아오르는 자유를 만끽한다. 대중적 ‘글자체(서체, 폰트)’에도 허튼체가 있다. 활자나 컴퓨터 서체들은 정형화 된 것이지만, 수많은 불특정 대중들이 연필 등으로 쓰는 글씨는 모두 허튼체다. 정사각형에 딱 들어맞게 쓰는 글씨, 늘어진 글씨, 뒤로 나자빠진 글씨, 흐물흐물한 글씨, 몽당연필 같은 글씨 등이다. 홍길동이 쓰면 홍길동체가 되고, 춘향이가 쓰면 춘향이체가 된다. 전주완판본 방각본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글자체, 소위 민체들이 바로 특정 울타리를 벗어난 허튼체다. 창의와 멋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움이다. 전주시가 지난 7월 ‘전주완판본’을 토대로 완성한 ‘전주완판본체’ 선포식을 가졌다. 이 서체는 (주)한글과컴퓨터의 ‘한컴오피스 NEO’ 프로그램 기본서체에 탑재됐고, 전주시는 물론 한글단체 등이 적극 보급하기로 했다. 허튼체는 계속되겠지만, 조선 후기 전주를 중심으로 발달한 다양한 서체들을 정형화, 대중 보급에 나선 것은 뜻깊은 일이다. 김재호 수석논설위원

오피니언 | 김재호 | 2017-09-06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