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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591건)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5년 전에 칸트가 〈월간 베를린〉에 기고한 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1784)은 이렇게 시작된다. “계몽이란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 원인이 지성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 있을 때, 그 미성숙 상태는 스스로 책임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계몽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당신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인간들 간 상대적 권력 발생을 인지오늘날 ‘계몽’이라는 말은 고리타분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그렇다는 것을 지적하는 이런 말조차도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정도다. 계몽주의의 역사화/지식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근대적 계몽의 가치가 각종 반근대?탈근대주의에 의해 이론적 탄핵을 받은 바 있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신’과 ‘무지’를 먹고 사는 가짜 권위를 몰아내기 위해 ‘이성’과 ‘실증’의 정신으로 투쟁하는 것이 계몽주의라면, 미신과 무지가 잔존하는 사회는 여전히 계몽기를 살고 있는 것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위 문장에 역사적 유통 기한은 없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칸트의 말을 언제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이를테면 그가 18세기 말에 요청한 것은 지성이었고 또 그 지성을 사용할 줄 아는 용기였는데, 여전히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이제는 저 문장에서 ‘지성’(understanding)의 자리에 ‘감수성’(sensitivity)을 넣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미성숙한’(즉, 계몽되지 못한) 인간이라 불리는 이들이 치명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감수성인 것 같아서다. 비가 오면 울적해지고 슬픈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그런 감수성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성숙한(계몽된) 인간이 갖고 있는 감수성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믿음(즉 ‘무지’와 ‘미신’)이 ‘차별’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거나 비판할 줄 아는 민감함을 의미한다. ‘젠더 감수성’(gender sensitivity, ‘성-인지’라고 번역되기도 한다)이나 ‘인권 감수성’이라는 개념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감수성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나에게 그것이 없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시적으로 품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여기에 ‘권력 감수성’(power sensitivity)이라는 용어를 덧붙여보고 싶다. (검색해 보니 사용된 전례가 드물게나마 있다. 당연히 이 개념의 저작권은 나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누가 권력을 갖고 있는지를 재빨리 파악해서 ‘줄을 잘 서는’ 예민함이 아니다. 언제나 평등해야 할 인간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 상대적 권력이 발생할 가능성을 섬세하게 인지하고, 행여 그 가능성이 가시적/폭력적으로 드러나 그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사태를 차단할 줄 아는 민감성이다. 권력 감수성이 높다는 것은 ‘내가 우월한’ 관계가 아니라 ‘함께 대등한’ 관계의 행복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다. 함께 대등한 관계의 행복 알아야며칠 전 어느 대선후보가 TV에 나와서는 앵커의 불편한 질문에 건들거림과 이죽거림으로 응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연한 기분을 느낀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어떤 누구를 만나든 늘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늘 우월한 위치에서 누군가를 만났을 것이고, 상대방에게 건들거리고 이죽거려도 된다는 그 권력을 누려왔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감수성은 말과 행동에서야 확연히 드러나지만 권력 감수성은 표정에서부터 잘 감춰지지 않는다. 바라건대, 그의 얼굴을 보는 일이 괴롭지 않은, 즉 권력 감수성이 높은 그런 대통령이 탄생해서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을 진심으로 존경해주기를.

오피니언 | 기타 | 2017-04-07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