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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76건)

사회의 기초 단위인 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생겨난 혈육들로 이루어진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슷한 뜻을 가진 말이 ‘식구(食口)’다. 한자말 그대로 ‘먹는 입(들)’이다. 함께 모여서 밥을 먹는 이들의 공동체다. 가족의 다른 이름으로 쓰일 만하다.그게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기능과 효율을 우선시하는 사회 환경의 변화가 주된 까닭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인 것 같다.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자기중심적 사고도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부부의 이혼율이 금메달 수준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특히 황혼 이혼까지 급격히 증가해서 새로운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그뿐 아니다. 왕래조차 끊고 사는 부모형제도 적지 않다. 상속 재산의 분할을 놓고 형제들이 법정 소송을 벌이는 일도 흔해졌다. 재산을 물려주는 조건으로 부모와 자식이 직접 서명한 효도 계약서라는 걸 쓰기도 한단다. 가족도 돈 다음에 났다는 게 정설로 굳어가는 듯하다.어느 조직에 속해 있거나 뜻을 같이하면 남남끼리도 얼마든지 가족을 이룰 수 있다. 2차적 의미의 가족이다. 이때 주로 쓰는 말이 바로 ‘가족 같은’이고, ‘우리가 남이가’다. 한때는 어떤 기업광고의 카피로 ‘가족 경영’과 ‘또 하나의 가족’이 쓰이기도 했다. ‘함께 일할 가족을 구합니다!’는 대학로 어느 분식점 유리창에서 발견한 문구다. 거기 적힌 ‘가족’이라는 말에 잠시 눈길이 머물렀다. 흔히들 쓰는 대로 ‘직원 모집’이나 ‘아줌마 구함’이라고 쓰지 않았다. ‘가족’을 구하는 것이다. 자매처럼 믿고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뜻이겠다.그 아래 적힌 ‘성실하고 용모 단정한 40대 여성’은 언필칭 가족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도 가족 나름이라는 건가. 못나도 부모고, 말썽꾸러기여도 내 자식이니 서로 감싸주고 아픔을 나누는 게 진짜 가족 아닐까. 승진도 제때 못하고 돈벌이까지 시원찮다고 아버지 대접을 안 할 수 있는가. 구인광고 속 문장이 좀 씁쓸하게 여겨진 까닭이다.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4-24 23:02

‘샤방샤방’이라는 노래가 있다. 트로트 가수 박현빈이 불러서 널리 알려진 곡이다. ‘얼굴은 브이라인 몸매는 에스라인 아주 그냥 죽여줘요~’는 노래의 끝부분이다. 이 노래의 제목인 ‘샤방샤방’은 ‘눈에 띄게 예쁘다’는 뜻을 가진 의태어다. 물론 순우리말이다. ‘죽여줘요’ 앞에 놓인 ‘아주 그냥’의 아주는 ‘어떤 상태나 성질, 느낌 따위가 보통을 훨씬 넘어서는 정도’의 뜻을 가진 부사다. 그 뒤에 붙인 그냥은 ‘아무 이유 없이’ 혹은 ‘따지고 자시고 할 것 없이’의 뜻을 가진 말이다. 아주와 결합해서 ‘죽여주는’ 정도를 강화시킨다.아주와 바꿔 쓸 수 있는 단어가 ‘매우’다. 이 또한 ‘보통을 훨씬 넘는 정도’를 뜻하는 말이다. 매우 예쁘다, 매우 잘생겼다와 같이 쓴다. ‘대단히’도 있다. 대단히 훌륭하다, 대단히 빠르다가 그런 예다. 얼마 전부터 새롭게 표준어로 인정된 ‘너무’나 ‘너무너무’도 ‘아주’나 ‘매우’하고 얼마든지 바꿔 쓸 수 있는 말이다.이 땅의 재기 발랄한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은 이런 말 대신 새로운 걸 자가발전시켰다. 바로 ‘졸라’다. 취향에 따라 ‘존나’를 병행해서 쓰기도 한다. 이건 비속어 ‘좆나게’에서 온 말임이 분명하다. 그걸 곧이곧대로 발음하기 뭣하니까 ‘졸라’ 아니면 ‘존나’로 순화(?)시켰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지 ‘개’를 접두사처럼 덧대서 뜻을 강조하기도 한다. ‘개맛있어’ 같은 식이다.노랫말에서 눈길을 끄는 단어는 또 있다. ‘죽여줘요’다. 실제로 어떤 일이 마음에 썩 들 경우 흔히들 ‘죽여준다’는 말을 썼다. 얼굴이든 몸매든 예쁘거나 미끈하게 빠졌으면 무조건 죽여준다고 했다. ‘끝내준다’는 물론 그보다 강도가 조금 약한 말이다. ‘죽여준다’도 이제는 한물 간 유행어다. 요즘 아이들은 출처도 불분명한 ‘쩐다’를 애용한다. ‘죽여준다’나 ‘죽여줘요’ 대신 ‘쩐다’나 ‘쩔어요’라는 말을 거침없이 주고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그냥 죽여줘요’를 요즘 아이들 식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혹시…, ‘존나 개쩐다?’·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4-17 23:02

순우리말 ‘자리’는 대략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교실이나 공연장에서는 책걸상이나 지정 좌석 같은 물리적인 장소를 가리킨다. 어떤 사람이 조직에서 맡고 있는 지위나 역할을 가리킬 때도 ‘자리’를 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사람이 어떤 직위에 오르면 그에 걸맞은 업무추진 능력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그걸 ‘지위 효과’라고도 부른단다. ‘완장’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인다. 주어진 지위가 무슨 대단한 권력인 줄 알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걸 빗대어 말할 때 그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 완장이다.자리에 해당하는 한자말은 아마 ‘위치(位置)’일 것이다. 위치는 자리에 비해 쓰임이 제한적이다. 적어도 ‘책걸상’이나 ‘지정 좌석’의 뜻으로 쓰이는 일은 드물다. 그래도 이 둘은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하다’를 뒤에 붙여서 ‘자리하다’, ‘위치하다’와 같이 용언으로 쓴다는 점이다. 문제는 한자말 위치를 남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무슨 뜻일까? ‘왼쪽에 위치한 정문을 이용해주세요!’ 어느 음식점 출입문을 보니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 알림판의 ‘위치한’에 눈길이 잠시 머물렀다. 위치한은 어느 공간을 차지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일 텐데, 그에 맞는 순우리말이 있다. 바로 ‘있다’다. 그러니까 ‘왼쪽에 위치한’은 ‘왼쪽에 있는’이라고 써도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긴 ‘좌측에 위치한’이라고 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버스정류장은 성당 정문에 위치해 있다.’, ‘5번 출구에 위치해 있다.’와 같은 식으로 꼬박꼬박 ‘위치’를 써야 하는 걸까. ‘자리하다’나 ‘자리 잡다’도 마찬가지다. ‘득점 선두를 달리는 팀 타선의 중심에 아무개 선수가 자리하고 있다.’가 그런 예다. ‘자리하고’를 빼고 ‘있다’만 써도 된다. 어째서 이런 언어 습관이 생겨난 것일까. 혹시 그렇게 쓰거나 말하면 품격이 조금 올라갈 거라고 착각들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4-10 23:02

‘기다리는 그 순간만은 꿈결처럼 감미로웠다아아∼’ 나훈아가 부른 ‘찻집의 고독’의 일부다. 더 말해 무엇 할까. 꼭 온다는 기약이나 믿음만 있다면 그 시간만큼 달콤한 게 또 어디 있으랴.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경우다. 그런데 만나기로 한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끝내 종무소식이면 ‘싸늘하게 식은 찻잔에 슬픔처럼 어리는 고독’만 하릴없이 씹어야 한다.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찻집이나 다방에는 사랑하는 이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청춘남녀가 흔했다. 다들 손목시계와 출입구를 번갈아 쳐다보기 바빴다. 신문을 읽거나 탁자 위에 성냥개비로 탑을 쌓으면서 애꿎은 시간을 죽이기도 했다. 어쩌다 카운터에서 전화벨 소리라도 울리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그쪽으로 애절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이제는 추억 속 풍경이다. 그 누구든 소재 파악이 가능하다. 그가 도착할 시간 역시 얼마든지 가늠하거나 확인할 수 있다. 그때까지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면 된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고 있으면 시간은 잘도 흘러가 준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찻집의 고독’이 흘러나오던 반세기 전 어느 날 ‘꿈결처럼 감미롭게’ 설레던 시간을 그리워질 때가 있긴 하다.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누군가를 만나는 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단체모임은 더욱 그렇다. 다들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적어도 며칠 전에는 약속을 잡게 마련이다. 그런데 정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인 이들이 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으면 도대체 오긴 하는 건지 답답할 수밖에…. 그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온갖 방정맞은 상상까지 하게 된다. ‘10분만 추가할게요. 차가 많이 막혀서요.’ 그 뜻이 한눈에 들어오는 문자메시지다. 음식점을 떠올리게 하는 ‘추가’를 쓴 건 ‘10분쯤 늦겠어요.’에 비해 좀 정겹다. 당연히 스스럼없는 사이에 한해서다. 차가 막혀서 약속장소에 늦게 도착할 수는 있다. 신호 대기하는 짧은 시간에 이런 문자를 보내서 상대를 배려하는 게 성숙한 태도 아닐까 싶은 것이다.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4-03 23:02

‘나는 빤히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열심히 액정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 달에 소설을 한 편 이상 읽는 독자라면 그 이름 석 자만은 익히 알 것 같은 어느 작가의 단편소설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이 두 개의 문장에는 어떤 공통점이 들어 있는가. 꾸미는 말과 꾸밈을 받는 말의 거리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 문장에서 부사어는 다른 부사어나 용언을 꾸미고, 관형어는 체언을 꾸며준다. ‘아주 느리게 흐르는 강물’ 같은 문장이 그걸 한눈에 보여준다. 부사어 ‘아주’는 다른 부사어 ‘느리게’를, ‘느리게’는 용언인 ‘흐르는’을, 관형어 ‘흐르는’은 체언인 ‘강물’을 꾸미고 있다. 이 구절이 자연스럽게 읽히는 까닭은 꾸미는 말과 꾸밈을 받는 말을 가깝게 두었기 때문이다. 앞서의 예문으로 돌아가 보자. 첫 문장의 ‘빤히’가 꾸미는 말은 ‘바라보았다’일 것이고, ‘열심히’는 ‘응시하고’를 꾸민다. 그 둘 사이를 다른 몇 개의 단어가 가로막고 있어서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있다.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액정 모니터를 열심히 응시하고 있었다.’와 같이 써야 한다는 말이다. ‘그가 술에 취하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잠든 초롱이 얼굴을 쓰다듬으며 하는 말이다.’라고 쓴 문장은 어떤가. 마치 초롱이라는 아이가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면서 잠든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갖게 한다. ‘혀 꼬부라진 소리로 하는 말이다.’라고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국민이라도 그 이름만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어느 소설가의 단편소설에는 또 이런 게 있었다. ‘그는 유심히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제 왼손은 얌전히 욕실 바닥을 향해 늘어뜨려져 있었다.’ 이 두 문장의 부사어 ‘유심히’, ‘얌전히’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 그림 속의 ‘…일제히 헌재의 결정을 환영하며…’의 경우 부사어 ‘일제히’ 역시 ‘환영하며’를 꾸미고 있으므로 ‘…헌재의 결정을 일제히 환영하며…’라고 써야지 싶은 것이다.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3-20 23:02

‘바르게’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비뚤어지거나 굽은 데가 없이 곧거나 반듯하게’라고 나와 있다. ‘삐딱하지 않게’가 ‘바르게’다. ‘바르게 살자’는 ‘삐딱하지 않게 살자’는 뜻일 게다. ‘바르게 살자’라는 두 어절의 문장을 새긴 바윗돌을 전국 어디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진실’한 마음을 갖고 ‘질서’를 잘 지켜서 모두모두 ‘화합’하며 살아가자는 말까지 그 아래 또박또박 덧붙여 놓았다. 구구절절 바른 말이다. 세상에 바르지 않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면 이런 말을 비석에까지 새겼을까 싶다. 그런데 거기 적힌 ‘바르게 살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몇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든다. 우리말을 웬만큼 구사할 줄 아는 어느 외국인이 부근을 지나다가 돌에 새겨진 말을 발견하면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아,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바르게 살지 않으면 이런 말을 이렇게 써 놓았을까. 하긴 일리가 없지는 않아….’ 한겨울 매서운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말마다 광화문을 밝힌 수십만 개의 촛불을 바라본 외국인이라면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 맞아. 바르게 살아야 해.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여기서 이 말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어쩔 뻔했어? 얘들아, 너희들도 여기에 적힌 것 좀 읽어 봐라. 어때? 참 좋은 말이지? 앞으로는 엄마하고 아빠도 바르게 살아가도록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너희들도 이걸 꼭 실천해야 한다, 알겠지?” 이렇게 깨닫고 실천 의지를 굳건히 다질 사람은 또 과연 몇이나 될까. 이토록 큼직한 돌을 세우고 ‘바르게 살자’고 적어 넣어서 이 땅의 수많은 ‘바르지 못한’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뜯어고치고 싶어하는 이들은 또 과연 얼마나 바르게 살아가고 있을까. 한때 ‘공주’로 떠받들어졌던 ‘그분’ 또한 이런 비석을 청와대 관저 앞마당에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바르게 살자’를 맘속에 새겼더라면 뭐가 좀 달라지긴 했을까. 문득 오래 전에 어느 드라마를 통해서 유행했던 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너나 잘 하세요.”라고 했던….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3-13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