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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76건)

삼시끼니를 모두 챙겨 먹는 집이 별로 많지 않다. 아침은 과일이나 빵조각으로 대충 때운다. 점심은 식당에서 해결한다. 집에서 차려 먹는 반찬도 조금씩 사다 먹는다. 아파트 상가마다 반찬가게 하나쯤은 다 있다. 마트나 백화점에도 없는 반찬이 없다. 맛도 좋다. 번창일로다.동네 반찬가게 이름 중에는 ‘장모’나 ‘처가’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것들이 많다. ‘장모님 손맛’, ‘장모님 반찬가게’, ‘친정엄마 손맛’, ‘처갓집 반찬’, ‘친정어머니의 정성’ 같은 것들이다. ‘시어머니’나 ‘시댁’을 갖다 쓴 이름은 찾을 수 없다. 대형 식품 제조업체 상표가 붙은 반찬 포장지에서도 ‘시어머니 손맛’이니 ‘시집 전통의 맛’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 식당 이름도 마찬가지다. ‘장모님 곰탕’, ‘장모님 김치찌개’, ‘장모님 밥상’, ‘처갓집 된장맛’ 같이 써 붙인 걸 자주 발견하게 된다. ‘처갓집 양념치킨’이나 ‘장모님 치킨’이라는 프렌차이즈 상표까지 있다. 그 옛날 어느 장모가 씨암탉을 잡아서 기름에 튀겨준 적 있었는지 모르겠다. 음식점 상호가 거두절미하고 ‘처갓집’인 곳도 여럿이다.어느 반찬가게 간판 한쪽에 ‘친정엄마의 정성으로 반찬을 만듭니다’라고 적힌 문구를 보았다. 반찬을 주로 사 가는 딸들의 정서를 자극하기 위해서 그렇게 적었을 것이다. 딸 내외에 대한 친정엄마나 장모의 정성이 듬뿍 담긴 음식이고 반찬이니 믿고 잡수시라는 얘기일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결혼한 딸과 아들이 있는 어머니는 장모이면서 동시에 시어머니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시어머니’나 ‘시댁’이라는 이름은 맛있는 음식과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는 걸까. 사위한테 음식을 해먹일 때는 온갖 정성을 다하니까 없던 음식 솜씨까지 저절로 생기고, 며느리한테는 대충 해서 먹이기라도 한다는 말인가.시어머니가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아파트 관리실에 맡긴 반찬이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는 풍속을 개탄한 어느 신문기사가 갑자기 떠오르는 건 또 무슨 까닭일까. ‘장모님 설렁탕’이라고 적힌 어느 음식점 간판을 바라보다가 조목조목 떠오른 생각이다.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6-06 23:02

‘객기(客氣)’라는 말이 있다. 공연히 부리는 호기다. 무모한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도 쓴다. 무식하면 용감해진다고 했던가. 그 또한 일종의 객기다. ‘객기’의 ‘객(客)’은 무슨 뜻인가. ‘손님’ 아니면 ‘여행을 떠난 사람’이다. 손님이나 여행자에게서 나오는 기운이 바로 객기다. 그러니까 얼굴에 철판을 까는 것도 객기다. 객기는 용기의 원천이다. ‘뻔뻔하다’는 말도 있는데 이건 좀 다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적반하장’이다.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든다는 뜻이다. 방귀 뀐 사람이 큰소리치는 것하고 다르지 않은 이치다. 그러므로 뻔뻔한 것과 객기 부리는 건 크게 다르다. 잘못한 게 없으면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말라는 것이다.“누가 보면 어때요? 다 남인데…” 어느 광고 카피다. 바로 그거다. 나 아니면 누구나 남이다. 낯선 곳에 여행을 왔으므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없던 자신감까지 저절로 생기게 만드는 것이 객기다. 그뿐인가. 객지에 나가면 영혼도 자유로워진다.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는 데는 그런 까닭도 있을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객지 술’이 으뜸이라고 힘주어 강조하는 술꾼도 적지 않다.“주변에 고백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딱지 맞을까 봐 겁나니까 가만히 있어야 돼요? 그건 아니지요. 민주주의 국가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거 여러분도 잘 아시지요?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표현 아닙니까? 그러니까 가서 고백을 하는 거예요. 나, 너 사랑한다. 우리 사귀자. 단, 고백을 하되, 민주국가에서는 거절할 수 있는 자유도 있으니까 상대방이 거절하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그 사람의 소중한 자유를 인정하고 깨끗이 물러나는 거예요. 어때요, 하나도 어렵지 않죠?”방송인 김제동이 강연 자리에서 대학생들에게 들려준 말의 일부다. 예의를 지킬 줄 아는 것, 진중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시민의 기본적 덕목임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는 아무 생각없이 객기도 부려보는 것이다. 이토록 환장하게 화사한 봄날에는 특히….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5-29 23:02

‘친오빠도 아니고, 친척 오빠도 아니고, 사귀는 오빠도 아니고, 모르는 오빠도 아닌, 자신과 미묘한 관계에 있는 오빠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쓰는 호칭.’ 대학로 어느 전봇대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아는 오빠’를 가리키는 말이란다. ‘오빠’가 그만큼 흔해졌다는 뜻일 것이다.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땅의 수많은 여자 대학생들은 ‘조용필 오빠’를 제외하면 아무한테나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자 선배는 ‘선배님’이라고 가리키고 불렀다. 서너 살 차이가 지는 선배한테 즐겨 쓴 호칭은 따로 있었다. 바로 ‘형’이었다. 남자들끼리 쓰는 그 ‘형’이라는 말을 여자들이 입에 달고 살았다.요즘에는 남자선배를 ‘형’이라고 부르는 대학생 또래의 여자들은 없다. ‘남친’이나 ‘여친’은 애인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이 또한 아무한테나 쓰지 않는다. 대신 과거에는 거의 금기시했던 ‘오빠’를 남자선배들에게 주저 없이 갖다 붙인다. 집집마다 하나나 둘만 낳고 말기 일쑤여서일까. 친오빠가 귀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학 선배도, 직장 선배도 오빠다. 그렇다고 친오빠만큼 친근감을 느끼거나 ‘어린 아빠’라는 뜻으로 쓰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 호칭을 쓸 때의 전후 맥락을 살펴야 진짜 오빠인지, 선배인지, 장래를 약속한 애인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빠’는 본디 손아래 여자가 손위 남자를 부르는 호칭이다. 그 어원을 ‘어린 아빠’에서 찾는 이도 있다. 동요 의 ‘서울 가신 오빠’는 애틋하고 간절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아내의 나갈 길을 지키라고 했던 의 오빠는 또 아빠처럼 듬직했을 것이다.며칠 전 5·18 광주항쟁 기념식장에서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던 이가 있었다. 추모사를 마친 뒤 대통령의 품에 안겼던 김소형 씨는 “아버지의 품처럼 따뜻했다.”라고 말했다. 이 땅의 수많은 그녀들의 피맺힌 아픔을 아버지처럼 기꺼이 안아줄 수 있을 만큼 넉넉하고 따뜻한 가슴을 지닌 대통령의 모습에서 ‘국민오빠’를 떠올린 건 나 혼자뿐이었을까.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5-22 23:02

‘착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곱고 어질다’라고 적혀 있다. ‘어질다’는 또 ‘너그럽고 덕행이 높다’라는 뜻이란다. 갈수록 복잡하다. 추상적인 말로 풀이되어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알고 보면 간단하다. 한마디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바로 ‘착한 것’이다. 시시때때로 피해를 주어서 누군가를 곤경에 빠트리거나 고통스럽게 만들면 그게 바로 ‘악한’ 혹은 ‘착하지 않은’ 것이다. 반대로 남에게 도움을 주면서 살면 ‘엄청 착한’ 사람인 셈이다. 테레사 수녀처럼 평생을 착하게 살아온 사람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사람의 일생도 ‘착한’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성선설’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착한’ 모습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세파에 시달리면서 ‘악한’ 일도 가끔 벌인다. 생을 마감할 때가 되면 ‘착한’ 모습을 회복한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한 사람의 어떤 행동을 가리키던, 그러니까 주로 어른들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주로 썼던, 이 ‘착한’이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대단히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물건의 가격이다.재래시장이든 마트든 심지어는 백화점까지 진열된 물건마다 ‘착한 가격’을 내세운다. 그뿐인가. 심지어는 날씬하게 잘 빠진 몸매도 착하다. 얼굴도 착하고, 심지어는 여자들 가슴까지 착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애들까지 나서서 ‘착하다’를 남발하고 있다. 어느 아파트 분양광고지를 보니 단지 안에 조성할 예정인 공원까지 착하다고 적혀 있다. TV 프로그램을 통해 ‘착한 짬뽕’, ‘착한 도가니탕’, ‘착한 해물탕’ 같은 말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기도 했다. 음식을 착하게 만들어 파는 이들이 별로 없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세상이 얼마나 착하지 않으면 아무데나 ‘착한’을 갖다 붙일까 싶다. 하긴 착하지 않은 ‘나랏님’들 때문에 수많은 국민들은 그동안 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던가. 이제 그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말솜씨는 조금 모자라도 사람이 먼저임을 묵묵히 실천하면서 평생을 올곧게 살아왔던 착한 이가 만들어나갈 착한 세상이 참 많이 기대되는 요즈음이다.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5-15 23:02

“한 잔에 천오백 원이세요.” “이 넥타이가 훨씬 잘 어울리세요.” “10분 후에 버스가 도착하세요, 손님.” “영화 상영시간은 세 시 오십 분이세요.” “화장실은 문밖으로 나가서 오른쪽에 있으세요.”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신종 대화체다. 말끝마다 꼬박꼬박 ‘~세요’다.우리말에서 존대 표현을 만드는 ‘-세-’나 ‘-시-’는 사물에는 쓸 수가 없다. 사람에게만 쓰는 게 옳다. ‘이분이 제 할아버지세요.’는 옳지만 ‘제 아버지가 쓰시던 컴퓨터세요.’는 우리말법에 어긋난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돈, 넥타이, 버스, 영화 상영시간, 화장실은 존대표현의 대상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긴 “그렇게 먹으면 건강에 안 좋으세요.”라는 말도 들은 적 있다.도대체 자꾸 왜들 그러는 걸까. 과거에 없던 이런 말법이 생겨난 까닭은 무엇일까. 요즘 젊은 친구들이 우리말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일까. 얼핏 그럴 것 같은데 사실은 그거, 우리 사회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사회적 관점에서 원인을 찾으면 몇 가지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경제적 양극화의 심화’, ‘청년실업의 증가’, ‘갑을 관계’ 등이 바로 그것이다.이 셋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부의 분배가 공정하지 않다 보니 사회 양극화는 날이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다. 값싼 외부 노동력의 유입에 따라 물가 상승률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저임금 때문에 청년실업은 증가하고, 고용불안 심리의 작용으로 대부분의 ‘을’은 ‘갑’의 부당한 횡포에 맞설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앞서 보았던 것처럼 이 잘못된 ‘-세요’는 한마디로 ‘을’의 용어지 ‘갑’이 쓰는 말이 아니다. 어쩌다 말 한마디라도 삐끗 잘못했다가는 언제 어떻게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저 유명한 김수희의 노래 의 가사처럼 ‘갑’인 그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을’의 처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회적 현상 중 하나인 것이다.발길 닿는 도처에서 귀에 딱지가 붙도록 들었던 ‘-세요’를 눈으로까지 발견하다 보니 조목조목 떠오른 생각이다.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5-08 23:02

대나무 특산지로 널리 알려진 전라남도 담양에 가면 ‘죽녹원’이라는 대나무공원이 있다. 그곳에서 ‘죽순의 바람’이라는 제목을 얹은 깜찍한 팻말을 발견했다. ‘저는 대나무로 자라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바라만 봐 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사람으로 치면 죽순은 ‘아기 대나무’다. 대나무의 땅속줄기에서 돋아나는 새싹이 바로 죽순이다. 그 어린 죽순이 사람들 눈에는 식감 좋고 영양가도 풍부한 먹거리로 보인다는 게 문제다. 마치 지나가는 강아지만 봐도 입맛을 다시는 이들처럼….하긴 그럴 만도 하다. 죽순은 탄수화물, 칼슘, 섬유질, 인, 철분이 풍부해서 당뇨병을 비롯한 각종 혈관 질환의 예방과 치료 효과가 탁월하다고 한다. 죽순의 껍질로 우려낸 차는 또 만성 변비를 해소하고 노화 방지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맛까지 일품이어서 데치고 볶아서 만드는 각종 반찬의 재료로 널리 쓰여 온 게 죽순이다.아기와 어린이는 국가의 미래라고 했던가. 그들을 인격과 실력을 골고루 갖춘 민주시민으로 키워내기 위해 교육도 시행한다. 대나무 새싹인 죽순의 미래는 대나무일 것이다. 어린이의 가치를 미래의 어른에서 찾듯, 죽순의 가치 또한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발휘될 것이다.앞서 보았던 ‘죽순의 바람’은 관련 법규 따위를 들이대면서 ‘죽순을 함부로 캐가는 자에게는 관련 법규에 따라 과태료를 부과합니다.’ 따위의 경고 문구보다 호소력이 커 보인다. 그걸 간곡하게 부탁하는 ‘대나무 가족’은 공원을 관리하는 사람들만일까. 댓바람 소리 우거진 숲에 오순도순 함께 모여살고 있는 노인 대나무, 어른 대나무, 아기 대나무들일지도 모르겠다. ‘바람[希望]’을 ‘바람[風]’하고 혼동할까 봐 ‘바램’이라고 흔히들 잘못 쓰는데, ‘바람’이라고 정확하게 표기한 것도 돋보였다. 귀여운 ‘바람’이었다. 이렇게 깜찍하게 적힌 팻말을 읽는다면 그 누구라서 어린 죽순을 함부로 밟고 가거나 반찬거리로 쓰겠다고 마구 캐갈 수 있을 것인가.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피니언 | 기고 | 2017-05-01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