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18-05-21 10:24 (월)
최진석의 노장적 생각 (16건)

장자라는 중국 고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한테는 바다에 대해서 말해줘도 소용없다. 그 이유는 그가 우물이라는 좁은 세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여름벌레한테는 얼음을 말해줄 수 없다. 여름이라는 시간만 살다가기 때문이다. 함량이 작은 사람에게 도(道)를 말해봐야 아무 소 용없는 것은 그가 자신만의 좁다란 진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인간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 체계나 시간적 경험 혹은 공간적 제약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대개는 자신의 믿음 체계나 시공간적 제약으로 빚어진 함량만큼만 살다가는 것이다. 일반적인 소시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학자나 종교인이나 정치인 등을 망라하여 누구나 그러하기 쉽다. 그래서 철없는 어른도 있고, 신도들의 이해 안에서 겨우 연명해나갈 수밖에 없게 된 성직자도 있으며, 제자들의 아량에 기대 살게 되는 교수도 있고, 시대의 버림을 받게 된 큰 정치인이 생기는 것이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한테는 자기가 사는 우물이 자기 경험과 인식의 전체다. 그런데 인간은 개구리와 다르다. 진화를 선택한 동물과 달리 인간은 문화를 선택하였다. 문화는 진화에 비해 시공간적 또는 질적이고 양적인 면에서 모두 확장성이 훨씬 더 크다. 진화는 ‘필요’가 만들지만, 문화는 지금 당장 필요치 않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무모함에 기대는 바가 크다. 인식의 범위 밖으로 나가 보려는 무모한 상상력이 문화의 핵심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을 자신의 전 세계로 알고 살다 가지만, 인간은 가본 적도 없는 자신의 우물 밖을 꿈꾸는 것이다. 결국 무모한 꿈을 꾼 한 사람에 의해 인간은 우물 밖의 세계를 자신의 영토로 갖는다. 당연히 문화의 확장성은 한계 밖을 향해 무모하게 덤비는 상상력이 결정한다. 상상력 즉 자신의 제한성을 넘어서려는 무모함이 있으면 문화적 활동을 크게 할 수 있고, 그것이 없으면 문화적 활동을 작은 테두리에서 따라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의 크기가 큰 문명을 살 것인지 아니면 작은 문명을 살 것인지를 결정한다. 결국 상상력은 익숙함에 갇히지 않고 생경한 곳으로 나를 끌고 가서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한다.문제는 이 제한성을 넘어서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작은 문명은 일정한 파라다임 안에서는 계속 작게 유지되고, 큰 문명은 일정한 파라다임 안에서는 계속 크게 유지된다. 후진국 형 국가에서는 후진국 형 일이 일어나고, 선진국 형 국가에서는 선진국 형의 일이 일어난다. 우리나라에 후진국 형 재난이 끊이질 않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다. 후진국적 제한성 혹은 후진국적 시선을 극복하고 한 단계 더 높고 큰 시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단계에서나 시선의 제한성에 갇혀 있으면, 다시 말해 익숙한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 단계를 세계 전체로 여기며 살 수 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을 비판적인 언사로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하는 것이다.더 단순화해서 말하면 우물 안 개구리 형 인간은 자신만의 익숙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간이다.우물 안에서 우물 밖을 꿈꾸는 상상력이 발동될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지적 활동이 바로 ‘질문’이다. 반면에, 자신이 머무는 우물 안으로만 시선이 향해 있을 때 작동되는 지적 활동이 ‘대답’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는 ‘대답’의 기능으로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이미 도달해버렸기 때문에, 그 다음을 노려야 하는데, 계속 우물 안에만 머물려 하거나 우물 안에 머물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대답’하던 습관을 ‘질문’하는 습관으로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다. 우물 안 개구리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우물 밖을 향해 튀어나가는 도전을 할 것이냐 하는 점이라고 말해도 되겠다.대답이란 무엇인가. 이미 있는 지식과 이론을 그대로 먹은 후, 누가 요구할 때 토해내는 것이다. 이때 승부는 누가 더 빨리 뱉어내는가, 누가 더 많이 뱉어내는가, 누가 더 원래 모양 그대로 뱉어내는가에 따라 갈린다. 여기서 인간의 성장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원래 모양’그대로 뱉어내는 일이다. 대답이라는 기능을 하면 할수록 자기도 모르게 ‘원래 모양’을 중시하고 거기에 집착한다. 그런데 ‘원래 모양’을 시제로 따져보면, 그것은 미래적이라기보다는 과거적이다. 그래서 ‘원래 모양’을 중시하는 데 익숙해지면 과거를 따지는 일을 중시하게 되고 과거를 분명히 하는 일을 제대로 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이 채우는 사회의 논쟁은 거의 대부분이 과거 논쟁으로 흘러 버린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선적인 사명은 과거를 지키고 밝히거나 과거의 횃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데에 있지 미래를 여는 일에 있지 않다. 오히려 미래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우선 분명히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를 내버려 두고 뜬구름이나 잡으려 하는 사람으로 치부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가까이에 있는 현실의 기능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집중하지,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꿈을 꾸거나 비전을 세우는 일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비전이나 꿈을 현실성 없는 한가한 소리로 치부하기 쉽다. 그래서 일상에서도 고등학생들에게 꿈을 꾸는 일보다 우선은 대학 합격이 더 중요하니, 꿈은 대학에 가서나 꾸라고 말해주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청춘들은 점점 고갈되어 간다. 나라도 마찬가지다.또 ‘원래 모양’은 바탕이나 근거가 되거나 모범적인 모습을 표현하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기준으로 사용하는데, 기준이라는 것은 언제나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기준이 없이 구분은 일어나지 않고, 구분을 하지 않는 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 구분 가운데 가장 분명한 것은 시비와 선악의 기준이다. 자기가 가진 기준에 맞으면 옳거나 선이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르거나 악이 된다. 이런 연유로 ‘원래 모양’을 중시하는 ‘대답’이라는 기능을 잘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은 진위나 선악을 따지는 일에 쉽게 빠진다. 그러다가 결국은 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 옳고 그름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사용하고, 선과 악의 윤리적 기준을 적용하는 것을 철저한 삶의 모습으로 믿게 된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로 채워진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논쟁이 진위 논쟁이나 선악 논쟁으로 빠진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위나 선악을 넘어서거나 혹은 비켜서서 새로운 길을 내려는 사람들은 종종 사이비나 회색분자 혹은 변절자로 취급되어 가혹한 냉대를 당하고 배척된다. 변절이나 변화나 제3의 길은 회색분자의 길로 치부되기 때문에 이런 사회에서는 종종 기준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뭉치게 된다. 바로 진영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제 모든 활동이나 논의는 진영의 논리로 귀결된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리는 진영에 있지 세계에 있지 않다. 나에게도 있지 않다. 나는 진리의 입법자가 아니라 진영의 진리를 대행하는 대리인으로만 존재한다. 능동적이거나 독립적인 주체가 아니라 바로 종속적 주체로 전락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종속성을 스스로는 의식하지도 못하고, 또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평생 종속성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종속성은 종속성 그 자체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종속성으로 채워진 주체들이나 또 그런 주체들이 이루는 사회나 국가가 종속성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큰 불행이다. 한 번 종속성에 갇히면 종속성을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운명 앞에 던져져 버리는 것, 이것이 비극인 것이다. 그래서 진영에 갇힌 사람은 대부분이 근본주의자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다 근본주의자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을 넘보는 무모함 자체를 죄악시 할 수 있다. 우물 안은 이미 진영이 되었고, 그 진영을 벗어나는 일은 옳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다. 진영에서 공유한 논리와 맞지 않은 것은 다 나쁘고 악하다. 그래서 모든 일들은 진영 안에서만 유효하다. 변화도 진영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당연히 작은 변화에 만족하고 큰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다. 우물의 왼쪽에 있다가 오른 쪽으로 옮기고 또 오른 쪽에 있다가 왼쪽으로 옮기는 것을 큰 변화나 생명력으로 착각한다. 왼쪽과 오른쪽을 바꾸는 것을 스스로는 새 세상을 연 것으로 착각한다. 이 착각은 자신도 우물 속에 가두고 사회도 우물을 벗어날 수 없게 붙잡는다. 그래서 한 번도 미래를 실현하지 못하고 평생 과거만을 살다간다. 전술적 차원에만 머물다 전략적 차원으로 건너가지 못한다.우물 안에서 볼 때 우물 밖은 다른 곳이거나 없는 곳이거나 불가능한 곳이거나 위험한 곳이다. 상상력은 다른 곳을 꿈꾸는 무모한 행사다. 다른 곳을 적대시하지 않는 포용력이 없이는 우물 안 개구리의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우물 안에서 왼쪽 오른 쪽은 ‘다른 곳’이 아니라 ‘같은 곳’이다. 우물 안에서 왼쪽과 오른 쪽을 바꾸는 것은 변화가 아니다. 조삼모사일 뿐이다. ‘대답’으로만 훈련된 사람들끼리 하는 진영의 교체를 우물 밖으로 나간 것이라고 우기거나 새로운 우물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 진영의 교체를 새 세상으로 착각하면 착각할수록 넓은 세상의 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물 안의 한 쪽만 지키다가 속절없이 작아진다. 그래도 말할 것이다. 작아진 것이 패배가 아니라, 진정한 승리라고 말이다. 이런 우물 안 개구리들을 중국의 루쉰(魯迅)은 ‘아큐’(阿Q)라고 하면서 중국인의 종속성을 비판하고, 중국이 우물 안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과거에 갇힌 우물 안의 중국에서 왼쪽 오른쪽의 교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중국’을 꿈꿨던 것이다. 아직 ‘아큐’(阿Q)의 속성을 탈각하지 못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만 해 왔던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기획 | 기고 | 2018-02-13 23:02

한사람의 삶은 전적으로 그 사람이 가진 시선의 높이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선의 높이까지만 살다간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문명은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된다. 가장 아래층은 구체적인 물건들로 채워진다. 둘째 층은 구체와 추상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제도다. 가장 높은 층은 추상적인 형태를 띠는 철학이나 윤리나 문화 같은 것이다. 제도는 인간이 사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물건들이 생산되고 삶이 영위된다. 풍요롭고 정의로운 삶은 그런 것들이 보장되는 길(제도)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제도는 또 철학이나 문화적 지향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이런 식의 길을 내고, 저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저런 식의 길을 낸다.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런 꿈을 꾸는 사람은 저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치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의 생각(철학)이 길을 내고 또 그 길을 따라 물산(物産)의 질과 양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명’은 ‘사람’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결과다. 높은 생각은 높은 문명을 만들고, 낮은 생각은 낮은 문명을 만든다. 앞선 생각은 선진 문명을 만들고, 뒤따라가는 생각은 후진 문명을 만든다. 이런 이유로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라 고 말하는 것이다.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가장 구체적인 물건들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물건 가운데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이 몇 개나 되는가. 거의 없다. 다른 나라에서 누군가가 최초로 만든 것들을 들여와서 살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먼저 생각하거나, 먼저 불편을 느끼고 해소해보려 했거나, 먼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 해보려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물건들은 다 발상이나 불편함이나 문제를 해결한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도도 그렇다. 우리가 사용하는 제도도 대부분 외부에서 온 것들이다. 총체적으로 볼 때, 우리는 ‘따라 하기’의 문명을 살아왔다. 다른 사람이 생각해서 낸 길을 따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물건들을 누리며 산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유롭지도 독립적이지도 주체적이지도 않고 아직까지는 다만 종속적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속적인 문명이 닿을 수 있는 최고의 높이에 도달했다. 중진국 상위 레벨에 이미 도달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중진국을 넘어서 선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계, 즉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주체적인 단계로 넘어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창의가 일어나는 사회를 열 수 있느냐 없느냐 라고 할 수도 있고, 대답하는 기능에 머물지 않고 질문이 감행되는 사회를 이룰 수 있느냐고 할 수도 있고, 전술적인 높이를 넘어 전략적인 단계에 이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고, 분열을 넘어 통합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하게 발휘하였던 시선을 한 단계 더 높이 상승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종속적인 단계의 특징은 스스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해 놓은 생각의 결과나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이념을 수용하고 키우며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산다. 그러므로 나라 전체나 대국을 보기보다는 기준이나 이념의 공유체인 진영을 중심으로 해서 사고하는 습성을 갖는 다. 세계의 진실에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진영의 진실을 세계에 부과하려 애쓴다. 또 기준이 분명하므로 그 기준에 맞으면 참이고 맞지 않으면 거짓이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기준을 중심으로 하는 진위 논쟁에 힘을 쓴다. 또 이 진위는 과학적으로 확인된 진위가 아니라 특정한 가치관에 싸인 정치적인 판단이 하는 진위로서 쉽게 선악이라는 가치판단으로 연결된다. 보통 과학적 판단보다는 정서적인 판단에 빠진다.사회를 움직이는 엔진은 크게 두 개다. 정치와 교육. 사실 우리 정치는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박제되어 있다.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능에 갇힌 것이다. 진영의 정치는 기능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적대적 공생 관계로 유지된다. 기능과 진영의 논리는 분열을 낳는다. 현대 한국 정치의 큰 특징은 누가 뭐래도 ‘배타성’을 위주로 하는 ‘분열’이다. 그러다가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호 아래 “두 국민 국가”라는 침울한 풍경만 남았다. 한국의 정치사를 단순화 해보자. 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는 이승만과 김구의 대결 구도 그대로다. 이승만/김구, 친미/반미, 반북/친북, 보수꼴통/친북좌빨, 박정희/김대중, 국가/민족으로 양분된 대립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아마 이런 대결에는 조선시대 영남학파/기호학파, 이언적/서경덕의 구도가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체결한 FTA에 대해서도 정권이 다른 진영으로 바뀌면 바로 반대로 돌아선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결정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도 정권이 다른 진영으로 넘어가면 격렬한 반대론자로 바뀐다. 미군이 낸 사고에는 격렬한 저항 투쟁을 하지만, 중국 해적에게 우리 해경이 맞아죽어도 그 흔한 데모 한 번이 없다. ‘독립’이라는 높은 시선에서 태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영’이라는 낮은 기능에 갇혀 있기 때문에 유사한 사안에 대해서 미국에 대하는 태도와 중국에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국익’이라는 전략적인 높이가 아니라 ‘진영’의 논리로 문제를 다루면 같은 사안을 놓고도 이 정권에서는 이렇게 행동하고 저 정권에서는 저렇게 행동하는 기능적 태도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정치가 기능에 갇히듯이, 정해진 지식을 지키고 전파하는 지식 기사들은 넘쳐나도 세계를 응시하며 그 시대에 맞는 지적 해결책, 즉 지식을 생산하는 지식인이 귀해졌다. 타도하는 자리에 올라앉으려는 반항아는 많아도, 국가의 명(命)과 틀과 비전을 바꾸는 일에 헌신하는 혁명가는 사라졌다. 반항만 넘치고 혁명은 씨가 말랐다.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일은 ‘명’(命)이 바뀌는 일이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혁명이다. 동일한 단계 내에서 의자 싸움하는 일은 반항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기능적 반항을 넘어서는 혁명 역랑이 있기나 한가. 이제 우리에게는 기능에 갇혀 내뱉는 순결한 사자후가 아니라 전략적 단계로 올라서려는 굵고 거친 발걸음이 필요할 것이다.교육에서 기능인을 양산하기 때문에 정치가 기능적이다. 우리 교육은 내용을 정해놓고 그것을 숙지하는 것으로 이뤄져왔다. 자신 안에서는 숙지해야 하는 내용이 주도권을 갖지 실제 자신은 그 내용들이 들락거리는 통로나 중간 역으로만 존재한다. 자신의 의식이나 사유에서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한다. ‘생각’하는 인재가 아니라 기준을 적용만 하는 ‘판단’ 주체로 길러진다. ‘문제’나 ‘불편함’을 발견한 후, 그것을 해결하려고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정답을 찾는 사람으로만 길러지는 것이다. 독립적 주체가 아니라 종속적 주체다. 이렇게 배양된 인재들은 이미 숙지한 내용을 기준으로 쓰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에 빠지기 쉽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전쟁’이라고 하면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 해서는 안 될 것으로서, 악한 것으로 정해놓고 대화를 시작한다. 내가 미국이나 일본 학생들과의 대화를 통해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전쟁’을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놓지 않고 질문을 했다. 즉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지 등을 묻는 것이다. 전쟁을 피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놓은 문명과 전쟁을 통제하고 제어하며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개방적 태도가 일구는 문명은 크게 차이가 난다. 세계에서 마주치는 대상이나 사건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을 쉽게 하는 인재들은 숙고하고 사고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세계의 진보는 이미 굳건히 자리 잡은 기준이나 가치관으로 하는 ‘판단’에 의존하기보다는 개방적으로 진행되는 ‘사유’에 더 크게 의존한다. ‘판단’에만 빠진 채 ‘사유’ 능력을 기르지 못하면, ‘판단’이 제공할 수 있는 문명만 누리지 ‘사유’하는 능력이 제공하는 더 높은 문명은 누릴 수 없다.새해 첫날, 새해의 희망을 담은 성스러운 기원을 하려고 일출을 보러 온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경포119안전센터 앞, 소방차를 세워야 할 곳에 주차를 해 놓았다. 소방관들이 일일이 전화를 해서 차를 빼는 데에만 40분이 걸렸다 한다. 경포119안전센터 관계자는 “대부분이 해돋이를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계도 차원에서 과태료를 부과하진 않았다”고 한다. 얼마 전 KTX를 타고 가는데, 딸 둘을 데리고 젊은 부부가 나와 같은 칸에 탔다. 딸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내내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였다. 보다 못한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역무원에게 전화 좀 통로로 나가서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역무원은 그냥 지나친 후, 방송으로 기차 안에서의 예절에 대해서 간단히 방송하는 것으로 끝냈다. 여기 두 풍경에서 소방차 세울 자리에 주차를 한 사람들이나 기차 안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편리한 기능을 좇느라 시민으로서의 책임성이나 존엄성을 포기하였다. 이런 부모들 앞에서 어떤 교육이 이뤄지겠는가. 그리고 공적 기관의 책임자들도 당연히 행사해야 할 ‘강제력’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 모두 당시의 불편함이나 정서적 갈등을 피하는 등과 같이 기능적으로 편하려고만 했지, 누구 하나 독립적이고 공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 못하다. 모두 기능에 빠져 있다.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도달했다. 지금 정도의 시민의식, 지금과 같은 인재 배양 방식, 지금과 같은 정치 수준으로 도달할 수 있는 높이로는 여기가 가장 높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할 일은 이미 다 해버린 민족인지 모른다. 이제는 어떤 주장도 어떤 정책도 새롭거나 참신하지 않다. 모두 전에 들어봤던 얘기들이다. 알고 있는 것이나 익숙한 것을 넘어선 “다음”을 말 할 수 있는 것이 지혜다. 이제 우리는 한 층 높은 단계의 지혜로 재무장하여, 이 한계를 돌파하려는 용기가 절실하다. 아인슈타인이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바보는 다른 결과를 기대하면서 같은 방법을 계속 쓰는 사람.”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이 다시 들린다.

기획 | 기고 | 2018-01-10 23:02

유전자로만 본다면 인간과 원숭이 사이에는 약 2%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100분의 2만 다르다. 인간과 동물로 구별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가깝다. 심지어는 아메바와도 차이가 14%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숫자로 본다면 인간과 아메바 사이도 뭐 그리 멀겠는가. 하지만 14%라는 차이만으로도 아메바는 맘먹고 관심을 표하기 전에는 인간에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인간과 원숭이 사이는 더 하다. 겨우 2%다. 그것도 커봐야 그렇다. 사실은 2%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원숭이는 동물원에 갇히고 인간은 유유자적 구경한다. 신분이나 계급적으로는 98% 이상의 차이가 난다. 이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다. 미미한 유전자적 차이를 거대한 신분의 차이로 바꿔버리는 요인은 무엇인가. 문화다.동물이나 식물은 자신의 진보를 전적으로 진화에 의존하지만 인간은 문화에 더 의존한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문화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은 문화적 활동에 철저한 사람이다. 문화(文化)는 글자 그대로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혹은 그려서(文) 변화를 야기(化)하는 일이다. 변화를 야기하는 인간이 더 인간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인간으로는 상급이라는 말이다. 변화를 야기하는 동력을 흔히 창의력이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창의력은 가장 문화적이며 인간적인 활동력이다. 창의력을 통해 인간은 변화를 야기한다. 변화를 야기하려고 시도하는 인간에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주체적이라고 말해준다. 그렇지 않고 누군가 야기해놓은 변화를 수용하거나 답습하기만 하면 종속적이다.그렇다면, 변화를 야기하고 수용하는 일은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어디서 출발하는가. 과거 아프리카의 타조 사냥은 이렇게도 했다고 한다. 타조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쫓는다. 타조와 쫓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유지되는 일정한 간격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존재하게 되는데, 쫓고 쫓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쫓기는 쪽의 긴장감은 커지기만 한다. 타조가 쫓기고 쫓기다가 긴장감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지면 도망가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대가리를 뜨거운 모래땅에 처박는다. 사람들은 그냥 가서 꼼짝 않고 머리를 박고 있는 타조를 잡아오면 되었다. 타조들은 다 그래왔다. 그리고 또 다른 타조들도 그렇게 잡혀죽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그런 집단적으로 속성화 된 습관에 갇혀서 함께 어울리던 타조 가운데 어느 한 타조가 자폐증을 앓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다른 타조들을 따라서 머리를 처박지 않고 무리에서 이탈하여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쫓아오는 사람들을 노려보는 일을 저질렀다. DNA에 박혀 있는 일정한 방향을 지키다가 돌발적으로 선회(旋回)하여 습관적이고 집단적으로 공유하던 방향을 혼자서 바꾼 것이다. 모든 타조들과 공유하던 언어와 문법들에서 이탈하여 친구 하나 없는 곳으로 스스로 던져진다. 세계는 인간에게 항상 무엇인가 반응을 강요한다. 우리 삶은 모두 그 강요에 대한 나름대로의 반응일 뿐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타조고, 타조를 쫓아가는 사람들은 인간에게 반응을 강요하는 세계 전체로 비유된다. 내내 쫓기기만 해왔던 무리에서 이탈한 어떤 한 타조가 뒤를 돌아보고 갑자기 이전에는 있어 본 적이 없는 전혀 다른 반응을 시도했다면, 이것이 바로 새로운 도전이다. 일단 뒤돌아보면 그 이전의 관행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시도될 것이고 그것은 세계에다가 이전에 있어본 적이 없는 어떤 무늬를 그리게 될 것이다. 문화적 활동의 결과를 수용하던 타조가 주도적으로 문화적 활동을 하는 타조로 변했다. 창의적인 타조다.타조가 한 미증유의 창의적 도전은 어디서 출발하는가? 집단적으로 함께 내달리던 정해진 방향에서 급선회하던 바로 그 지점이다. 대가리를 처박도록 길이 잡힌 방향을 향해 앞으로만 달리던 타조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뒤로 돌았다. 전진(前進)하다 역진(逆進)하는 타조는 두 방향을 다 경험하지만, 이 경험의 여정에는 전진과 역진이 교차하는 신비한 지점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여기가 바로 문화적이고 창의적이며 인간적인 활동의 자궁이다. 이 신비한 지점에서는 세계에 내몰리느라 떼를 지어 달리면서 나누던 수없이 많고 부산스러운 말들이 갑자기 끊긴다. 익숙한 모든 행위와 언어가 갑자기 사라지며 정적에 휩싸이는 순간이 있다. 언어의 길이 끊기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지경이며 어떤 문자나 표지판도 더 이상의 쓸모가 사라져버리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상태다. 언어의 길이 끊기는 바로 거기서 새로운 언어가 태어나서 새 길이 난다. 그러니 새 길은 당연히 언어가 끊기던 바로 그 찰나에 뿌리를 둔다. 무너진 표지판 곁에 새 표지판은 아직 서지 않고, 어떤 말도 의미를 담지 못한 미숙의 상태, 어떤 숫자도 얹혀있지 않은 좌표답지 못한 좌표, 방향을 잃은 아둔한 의식, 이것을 우리는 침묵(沈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전진의 문법과 역진의 언어가 사멸과 탄생으로 운명을 달리 하며 서로 등을 대는 바로 그 교차점이다. 여기는 새 언어가 태어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철지난 언어가 사라지는 곳이 아니던가. 언어가 끊긴 곳에서는 유령처럼 침묵만이 태어난다. 모든 방향의 선회는 침묵을 지나간다.건명원(建明苑)을 열어 새 시대를 여는 창의 전사를 양성하고 있다. 역진(逆進)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강한 기운을 갖게 해주고 싶다. 반역의 기운이다. 그런 충동적 기운을 배양할 목적으로 구성된 프로그램 가운데 ‘걷기명상’이 있다. 모든 원생(苑生)들이 함께 5시간 정도를 걷는다. 핵심은 1시간 정도를 빼서 ‘묵언)’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걷는다. ‘침묵’을 지나가보라는 것이다. 뜨거운 모래 바닥에 머리를 처박도록만 훈련된 사람들에게는 함께 어울려 부산스러운 잡담을 나누는 일이 더 익숙하고, ‘침묵’은 큰 곰을 어깨에 앉혀놓고 걷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나 한 번 ‘침묵’을 내면 깊숙한 곳까지 끌고 가 본 사람은 - 전진과 역진 사이의 교차점에 서 본 사람은 - 그 ‘신비한 유령’을 피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법의 양탄자’ 같아서 ‘침묵’을 경험한 그 사람을 새로운 어딘가로 반드시 데려간다. 그 사람은 가는 내내 알 수 없는 힘을 발휘하며 새 길을 낸다. 이것이 침묵의 힘이다. 원래 있었던 것이라도 이제는 더 이상 원래의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재탄생하여 현현한다. 잡담과 부산스러움을 극복하고 원래 있었던 것의 감춰진 진실을 등장시킨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저 멀리 산이 있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 산을 고압선을 놓을 자리로도 보고, 돌을 캘 곳으로도 보고, 산삼을 감추고 있는 곳으로도 보고, 전원주택을 지을 곳으로도 본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산의 진실이 아니다. 그렇게 보는 그 사람의 진실일 뿐이다. 조작된 것이다. 잡다하고 폭력적인 ‘소유’적 발상일 뿐이다. 산의 진실은 고압선이나 돌이나 산삼이나 전원주택으로 보는 시각이 끊긴 곳에서 드러나는 그 무엇일 뿐이다. 그런 잡다한 시각이 끊긴 곳에서 ‘침묵’이 유령처럼 등장한다. 그 침묵의 유령만이 감춰진 산의 진실을 영접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산을 어떤 특정한 소유적 시각으로 제한하지 않고 그저 한마디 할 뿐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의 진실은 우리가 정하지 않고 산이 스스로 드러낸다. 드러나는 그것은 산을 산이게 하는 것으로서 산에만 있는 성스러움이다. 이 성스러움은 침묵의 간이역에만 등장한다. 당연히 침묵은 또 외부의 성스러움을 영접할 수 있는 준비다. 그런데 침묵으로 외부의 성스러움을 받아들여본 사람은 또 자신의 성스러움을 깨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이태리 가서 메디치 가문을 보고 온 부자들이 많다. 메디치 가문에 대해서는 이태리 사람보다도 더 많이 알기도 한다. 세 번을 보고 왔다는 사람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메디치 가문을 보고 이해하는 대열 속에서 계속 경쟁적으로 ‘전진’한다. 그런데 메디치 가문을 세 번이나 보고 와서 그 사람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메디치 가문에 대한 지식이 증가한 것 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메디치 가문을 구경하는 ‘전진’만 있었지 ‘역진’으로 선회할 ‘침묵’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침묵’을 경험하면 ‘역진’으로 선회하여 내가 내 나라에서 할 수 있는 메디치 가문 같은 역할은 무엇일까를 고민한다. 이 반성만이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그가 다시 태어나면서 그가 속한 사회도 비로소 달라진다. ‘전진’하던 사람끼리 공유하는 문법과 언어의 잡다한 수다를 끊고, 스스로 무리에서 이탈하여 고독 속으로 자폐하는 것이다. 그 자폐의 통증을 동력삼아 ‘역진’하여 그는 아직 열리지 않은 새 세상의 문고리를 잡는다. ‘역진’의 기운이 꿈틀대는 ‘침묵’ 속에서 삶이 확장성을 회복한다. 자신의 감춰진 성스러움이 서서히 현현한다. 이제 무엇인가를 그려서 변화를 야기하는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힘은 인간에게는 성스러움 그 자체다. 그러니, 인간은 ‘침묵’의 간이역에서만 성스러워질 수 있다. ‘침묵’은 스스로를 성스럽게 하는 힘이자 외부의 성스러움을 영접하는 장치다.장자는 말한다. “참된 인간(眞人), 즉 무엇인가 그려서 변화를 야기하는 인간, 창의적 인간, 모험하고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은 고요하다. 외부 세계를 소유적 시각으로 제한하지 않으니 어디에 갇혀있는지 알 수가 없다.”(是之謂眞人. 其容寂....與物有宜, 而莫知其極. 『莊子·大宗師』) 참된 인간은 고요하게 침묵을 지나간다. 침묵은 자신의 성스러움을 드러내며, 외부의 성스러움을 영접한다. 여기서 위대함이 자란다. 새 세상을 꿈꾸는 자, 우선 침묵하라.·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기획 | 기고 | 2017-12-05 23:02

몇 마디 말을 나눠보지도 않았지만, 괜히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 많은 말을 나누고도 뭔가 허전한 느낌만 남기는 사람이 있다. 여럿이 모여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마지막 매듭을 짓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꼭 있다. 강의를 듣고 나서 강의 내용을 물고 늘어져 자기 멋대로 다음 이야기를 구성해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의 내용을 기억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듣고 나서 죄다 흘려보내버리는 사람도 있다.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들어도 사람마다 반응은 모두 다르다. 같은 내용에 각자 다른 반응을 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같은 일에 각기 다른 깊이로 반응하는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근거, 즉 그 사람만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일에 분개하면서 정작 자신도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 버리는 일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봉지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서는 사람도 있다. 기차를 탔을 때 전화가 오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로 나가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하무인격으로 앉은 자리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의 글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날을 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묵묵히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밖에서는 민주를 외치지만, 집에 오면 독재자로 변하는 사람도 있다. 책을 읽을 때 질문이 마구 샘솟듯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 내용을 수용하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환경 보존을 외치면서 일회용 컵이나 접시들을 마구 쓰는 사람이 있는 있는가 하면 철저히 자제하는 사람도 있다. 주장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각각이 따로 있는 사람도 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달라지는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근거, 즉 그 사람만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다.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끌고 온 차들 때문에 주변 도로의 교통 상황은 엉망이 된다. 도로 양쪽에 모두 불법주차를 하는 바람에 상당한 거리의 차도가 극심하게 좁혀져서 오가는 데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교회에 나와 모두 이웃 사랑에 관한 설교를 듣고 결심하고 다짐하는 일을 하느라 이웃에 큰 폐를 끼친다. 이웃을 사랑하는 그 다짐과 이웃에 폐를 끼치는 일 사이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제대로 사는 일. 힘들고 불편하다. 쓰레기 함부로 버리는 일을 비판하기는 쉽고, 자신이 직접 그것들을 줍는 일은 힘들다. 이웃은 아랑곳하지 않고 편리를 위해 차를 끌고 오는 것은 쉽고,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오면 불편하다. 이웃 사랑을 말하기는 쉽다. 그것을 실천하려면 반드시 일정 분량의 불편과 노고를 감당해야 한다. 일회용 물건을 쓰기는 쉽고, 그것들을 안 쓰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컵을 가지고 다니는 등의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기능적인 일은 쉽다. 사람의 본바탕이 작동하는 일은 어렵고 불편하다. 대답은 기능적 활동이고 질문은 그 사람에게만 있는 내면의 호기심이 발동하는 일이라 인격적 활동에 속한다. 당연히 질문은 어렵고 대답은 쉽다. ‘따라 하기’는 쉽고 창의가 어려운 이치다. 우리는 쉬운 쪽으로 쉽게 기울게 되어 있어 질적인 상승이 더디다. 그래서 제대로 사는 일은 언제나 어렵기만 하다. 간단히 정리하면, 인간으로서 제대로 사는 일은 스스로 불편을 자초하는 일과 같기도 하다. 불편의 최고 단계인 ‘장애’의 지경으로까지 끌고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다양한 수행의 모든 과정은 사실 ‘불편’한 것들로 짜여 있다. ‘장애’를 내면화하여 그것과 일치되는 경험을 유도한다. 불편과 장애와 한 몸이 되는 단계에서 인간의 본바탕이 구출되곤 한다. 편하고 자극적인 기능에 갇히지 않고 ‘장애’의 상태를 자초하면서 성숙은 시작된다.아주 오래전 중국 노(魯)나라에 형벌을 받아 발 하나를 잘린 왕태(王?)라는 사람이 있었다. 덕망이 높아서 따르는 제자가 공자만큼이나 많을 정도였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상계(常季)가 공자에게 묻는다. “왕태는 외발이 장애자입니다. 그런데도 따르는 제자 수가 선생님만큼이나 많습니다. 그는 가르치는 것도 없고 토론도 하지 않는데, 빈 마음으로 찾아갔다가 무언가를 가득 얻고 돌아간다고들 합니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가 답한다. “그분은 성인이시다. 나도 찾아뵈려했지만 꾸물대다가 아직 뵙지 못했을 뿐이다. 나도 그분을 스승으로 삼으려 하는데, 나만 못한 사람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느냐. 노나라 사람뿐이 아니라 온 천하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가서 그를 따르려 한다.” 장애인인데도 모두 그를 따르려 한다면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진 것인지를 상계가 묻자 공자는 ‘근본’을 지키고 있다고 말해준다. 왕태는 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본마음을 터득한 것이다. 이에 상계가 또 묻는다. “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본마음을 터득했을 뿐인데 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지요?” 그러자 공자가 답한다. “사람은 흐르는 물을 거울삼지 않고 잔잔하게 가라앉은 물을 거울삼는다. 올바른 본심은 뭇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장자·덕충부』) 도가에서는 이런 본마음, 즉 존재의 근본 상태를 ‘덕’(德)이라고 표현한다. 덕이 있는 사람은 타인을 압도하는 힘을 갖는다. 타인들은 이 사람을 추종하고 싶어 한다. 중후함이 경박함을 흡수하는 이치다.기능적인 활동에 갇힌 사람은 편한 것을 추구하며 가벼운 잡담과 비교 욕망에 빠져서 자신의 본바탕을 놓치고 가볍게 흔들린다. 하이데거는 이런 상태를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고 말한다. 가벼운 기능과 비교와 잡담에 빠져 인간으로서 가져야하는 성스러운 어떤 본바탕을 상실하였다고 비판한 것이다. ‘장애’의 상태를 자초하여 불편을 감수하면서 ‘덕’이라고 불리는 본바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을 키우는 일이다. 이 ‘덕’의 유지가 바로 인간을 기능적 활동에서 벗어나 본래적인 인간으로 서게 만든다. 기차 안에서도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는 기능에 빠지지 않고 인간으로서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통로로 걸어 나가는 불편을 감수한다. 교회에 갈 때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차를 몰고 가지 않는 불편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아는 것에 매몰되지 않고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불편한 몸부림을 친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질량이 커지고 또 커져서 다른 가벼운 것들을 제압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매력이고, 존경을 유발하는 요소다. 장애인 왕태가 존경을 받고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이유다.또 아주 오래 전 중국 고대의 위(衛)나라에 애태타(哀??)라는 추남이 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지낸 남자들은 그 곁에서 떠나지 않으려 하고, 그를 본 여자들은 다른 이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그의 첩이 되겠다고 한다. 그는 자기 의견을 내 세우지도 않고 늘 다른 이에게 동조할 뿐이었다. 군주의 자리에 있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준 것도 아니고, 쌓아둔 재산으로 남의 배를 채워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흉한 몰골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다. 지식도 사방 먼 곳까지 미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남녀가 그를 따르려 모여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장자는 이것을 온전한 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드러나게 하지 않는[德不形] 깊은 내공 때문이라고 한다.(『장자·덕충부』) ‘덕’을 갖추고 있음에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비유하여 말하면 물이 잔잔하게 멈추어 수평을 이룬 상태다. 안에 깊은 고요를 간직하고 출렁이지 않는다. 덕이 출렁출렁하게 드러나지 않을 정도가 되면 사람들은 거기에 이끌려 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외적으로 출렁이는 모습은 기능에 갇혀 경박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말한다. 쓰레기를 버린다는 비판을 하면서도 자신 역시 버리는 이중적 가벼움 같은 것이다. 아는 것을 지키기만 하지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는 지적 부지런함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눈앞의 편리함을 위해 공공의 책임감을 포기하거나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경박함이다. 이런 경박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감당하며 인간으로서 품격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가 덕이 있는 자다. 여기서 매력과 존경이 생길 뿐 아니라 비범하고 특별하며 위대한 일들도 덩달아 일어난다.하이데거의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는 문장에서 ‘존재’는 바로 존재자의 고향이자 ‘덕’이 활동하는 곳이다. 가볍고 번잡한 기능들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비밀스런 곳이자 일상 속의 다양한 이중성 속에서 인간으로서 더 나은 선택을 하는 힘이 드러나는 곳이다. 창의적이고 비범하며 특별한 일들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래서 ‘존재’, 즉 ‘덕’의 활동은 성스러운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사는 사람을 우리는 인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 즉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왕태나 애태타는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잘 지킨 사람들이다. ‘불편’, 심지어는 ‘장애’적 상황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감수한 사람들이다. 경박하지 않고 성스러운 삶은 스스로 ‘불편’과 ‘장애’를 자초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시민으로 사는 일도 마찬가지다. 불편을 자초하며 경박함을 벗어나면서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을 우리는 시민의식이라 하지만, 사실은 인간으로서의 성스러움을 지키려는 태도다. 성스러운 삶은 불편을 감수하거나 자초한다.

기획 | 기고 | 2017-11-07 23:02

철이 나기 전, 아주 어릴 적에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다. 출가(出家)를 하면 어떨까? 출가를 해볼까? 원래 출가의 근기를 타고 난 사람이라면 절대 입 밖에 내지 않고 혼자만 품은 채 열병을 앓고 또 앓다가 결행하기 직전에 공표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볍기가 한량없어서 생각이 들자마자 몇 밤도 넘기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말해보았다. 초여름의 이른 오후였다. 적당히 데워진 마룻장에 등을 대고 누워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며 종알댔다. 그런데 의외로 어머니께서 내 말을 너무 진지하게 듣고 놀라시자 얼른 포기했다. 훗날 어머니는 내가 등산 가는 것도 싫어하셨다. 저 높은 산에 들어가 어머니 본인이 살고 계시는 낮고 거추장스런 이곳으로 내려오지 않을까봐 걱정하셨던 듯하다. 당신이 낳고 당신이 기르면서도 그 아들의 성정이 얼마나 폴폴 가벼운지는 내내 모르셨던 것 같다. 자식에게 사랑과 기대만 퍼 부으시느라 정작 본바탕을 애써 외면하셨던 그런 분을 괜히 괴롭혀 드렸다. 그렇게 하여 나는 성불(成佛)의 길보다 효자(孝子)의 길을 택했다. 성불은 저 먼 곳에서 빛나는 이상적인 달관의 경지로 보였고 효자는 구구절절 생활의 때가 묻은 이곳의 일 같았다. 그 뒤로 내 어깨와 견줄만한 높이에 있는 것들은 어쩐지 하찮고 심드렁했다. 아주 특별하고 높은 곳에서만 빛나는 어떤 것을 포기한 사람이 갖는 약간 비굴해진 느낌이랄까. 그것을 감추느라 내 어깨 아래의 삶 속에서 얼마간은 더 뻣뻣했는지도 모르겠다. 효성은 어쩐지 땔감들 사이를 직선으로 헤집고 들어와 잠든 먼지들을 다 깨워놓은 석양빛 드는 부엌의 아궁이에서나 일어나는 평범하고도 평범한 일 같았다. 밥은 나오지만 눈길은 머물지 않는... 어쩔 수 없이 한동안 내 눈길은 차라리 파르스름한 빛이 남몰래 감도는 젊은 탁발승의 쓸쓸한 ‘삭발’에 닿으려 했다.노자나 장자를 많이 읽는다는 것을 아는 친구들은 내게 항상 크고 특이한 얘기들을 듣고자 했다. 일상의 규칙들을 무시하면 더 환호하고 내가 학문적으로 이해한 것을 몸소 실천까지 한다고 인정해주기도 했다. 시험을 열심히 준비해도 친구들은 노장(老莊) 학도답지 않다고 했다. 성공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비치면 장자의 소유유(逍遙遊)를 배운 사람이 왜 그러냐고 했다. 신발과 옷가지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성선(成仙) 차원 정도의 얘기는 되어야 다들 만족했다. 볕이 낮게 들어오는 봄날 오후, 어느 맥주 집 창가에 앉아 수업에 들어가지 않은 날이었다. 먼저 일어서면서 친구들은 나를 널리 이해한다는 뜻으로 말했다. “쟤는 도가 철학을 하니까 저래. 괜찮아.” 이 일탈은 도가 철학과 아무 상관없다. 게으름이자 방종일 뿐이다. 그저 각자 한 편으로 치우쳐 있는 사람들끼리의 부족한 교류였을 뿐이다.구작자(瞿鵲子)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름에는 깜짝 놀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까치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장오자(長梧子)라는 사람이 있었다. 아주 오래 산 오동나무라는 뜻을 가졌다. 오동나무[梧]는 깨달음을 나타내는 글자인 ‘오’(悟)자와 발음이 같아서 가끔 섞어서 쓰기도 한다. 여기서 장오자는 깨달음에 이른 도가적 인물을 나타내고, 구작자는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 즉 유가적인 인물을 나타낸다.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제 스승에게서 들은 얘깁니다만, 최고 높은 수준에 이른 사람인 성인은 세상일에 빠지지 않고, 이익을 좇지 않으며, 해가 닥쳐도 피하지 않고, 무언가 추구하는 것도 없고, 정해진 길을 따르지도 않고, 말을 하지 않아도 무언가 말해지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말한 바가 없으며, 이런 식으로 하면서 이 세상 밖에서 유유자적 한다고 합니다. ‘도’(道)를 실천한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얘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여기에 장오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런 말은 황제(黃帝) 정도 되는 사람이라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 당신 스승인 공자가 어찌 알 수 있겠소. 또한 당신도 이런 얘기를 ‘도’를 실천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지나친 단견이오. 달걀을 보고 새벽을 알리기를 바라고, 탄알을 보고 곧바로 새 구이를 찾는 것처럼 급하오. 그냥 당신을 위해서 내 생각을 아무렇게나 말해볼까요? 그러니 편하게 아무렇게나 들어주시오. 해나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채, 만물과 잘 맞아 서로 어그러지지 않고, 모든 것에 억지로 자기 뜻을 부과하지 않은 채 그대로 놓아두고, 가치 판단 기준으로 귀천을 나누지도 않소. 세상 사람들은 온 힘을 들여 힘들게 살지만 성인은 우둔하며, 오랜 세월동안 세상사에 섞여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순수함을 지키고 있소.”(『장자 · 제물론』) 가장 높은 경지나 깨달음 혹은 절대 성숙은 ‘이곳’을 떠나서 훨훨 높이 날아올라, 이곳과 전혀 다른 저 먼 곳의 어디에 안착해 있으면서 이곳을 내려다보는 어떤 것이 아니다. 장오자가 말하듯이 세상사와 함께 하면서 그것들과 어그러지지 않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함께 나아가면서 자신만의 ‘보물’만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 보물을 장자(莊子)는 ‘순수함’(純)이라고 말했다. 바로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질인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 평생 수행해야 할 ‘사명’이 나온다. 그럼 자신의 ‘순수함’을 지키는 바로 그 ‘우둔한’ 성인은 어떤 높이에 있는 사람인가. 장자는 말한다. “해나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정도의 사람이다. 지식이 되었든 사고의 폭이 되었든 감각이 되었든 간에 해나 달이나 우주의 높이 내지는 넓이에 닿아 있다는 뜻이다. 그런 후에야 세상사와 어그러지지 않을 사고의 두께를 가진 자로서 자신만의 편협한 잣대로 귀하고 천한 것을 나누어 세상을 대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우둔함’이다. 자신만의 잣대가 없기 때문에 속세에서는 그를 바보나 우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도시에서 지친 사람들은 오지의 발길 끊긴 산 속을 꿈꾼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들여 숨어들 곳을 찾아 헤맨다. 도시에서의 일을 끊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승리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 속이라도 자신만의 ‘순수함’을 지키지 못한다면, 방만과 게으름을 벗어날 길이 없다. 지력이나 감각이 꼭 ‘해나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정도가 될 것까지야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만 유지되어도 매일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삼겹살을 구워먹는 한가한 유흥으로는 자유나 자족의 경지를 맛볼 수 없다. 자족이나 자유의 중심 자리는 항상 ‘자기’(自)가 차지한다. ‘자기’가 지켜져야 자연스럽기도 하고 자유스럽기도 하고 자족하기도 한다. ‘자기’가 지켜지지 않은 자유가 방종이고, ‘자기’가 지켜지지 않은 ‘자족’이 나태함이고, ‘자기’가 지켜지지 않은 ‘자연스러움’은 촌스럽다. 최종 승리의 길은 자신만의 순수함을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가 결정한다. 자기가 굳건하게 지켜지는 사람은 절대 어느 한 쪽으로 쏠리지 않는다. 도시에 있던 시골에 있던 자신이 중심을 지키면 된다. 자기가 중심을 지키는 한 도시에서도 시골을 살 수 있고, 시골에서도 도시를 살 수 있다. 도시도 이상향이 아니고, 시골도 그 자체만으로는 절대 이상향이 아니다. 자기가 약한 사람은 도시에 있을 때 시골을 꿈꾸고, 시골에 있으면서 도시를 꿈꾼다. 자기의 순수함을 지키는 사람은 도시에 있건 시골에 있건 자신이 있는 곳에서 두 세계를 ‘우둔’하게 실현한다. 자아의 실현이나 완성은 장소에 좌우되지 않는다. 오히려 장소를 지배하는 자신의 사명이 결정적이다. 자기 자신만 가지고 있는 고유한 그 ‘순수함’이 바로 이상향을 좌우하는 손잡이다. ‘순수함’이 장소를 지배하게 해야 한다.인간의 삶은 따로 있지 않다. 유동적 우주에 섞여가는 한 형태인데,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것 자체가 바로 우주적이다. 이런 점에서 자연과 인간은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성 안에 자연성이 들어있고, 자연성이 인간성의 토대다. 이렇다면 인간이 하나의 관점을 고집하며 자기 정체성(整體性)을 주장한다면 매우 정체적(停滯的)이거나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장자는 세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아지랑이나 먼지, 이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물이 서로 입김을 내뿜는 현상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늘이 새파란 것은 진짜 원래부터 그 색깔인 것일까? 아니면 멀리 떨어져서 끝이 없기 때문일까? 9만리 높은 하늘을 나는 대붕 또한 위에서 내려다보면 파랗게 보일 것이다.”(『장자 · 소요유』) 야마(野馬)로 표현되는 아지랑이과 진애(塵埃)로 표현되는 먼지는 정해진 방향 없이 계속 움직인다. 정해놓은 방향이나 목적도 없이 그저 움직일 뿐이다. 왜 움직이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자연이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면서 우주의 완결성을 이루는 것과 같다. 여기서 자유가 태어난다. 장자는 이 문장을 통해 특정 지점에서 결정되는 관점의 기능을 철저히 무화시킨다. 하늘은 여기서 올려다 볼 때만 파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한 가지 기준으로 나를 고정시켜 우주 운행에 방해를 주면 안 된다. 이것이 우주적 원리이고 거대한 성취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이제 나는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의 일을 열심히 하면 바로 여기서 저 세상이 구현된다는 것을. 저 세상은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짜 자유인은 도시에 살면서도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자신을 관조하며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이란 것을.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왜 나를 살리는 일인지를. 용서하고 용서 받는 일이 왜 인간의 편협성을 벗어나는 우주적인 사건인지를. 서울 시내의 호텔과 나무 위의 새둥지가 그리 크게 다른 것이 아님을. 협력이라는 것은 나를 줄이고 반대하는 쪽을 수용하는 일이란 것을. 부엌 흙바닥에 쭈그려 앉아 석양빛을 모로 받으며 어머니를 위해 아궁이 불을 살리던 일이 바로 성불(成佛)의 길이었음을.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기획 | 기고 | 2017-08-15 23:02

인간에게는 초월의 욕구가 있다. 초월이 다 언어를 벗어날 정도로 어려운 것은 아니다. 초월은 지금의 나를 넘어서는 것, 지금의 나보다 더 나아지는 것, 더 확장되는 것, 더 넓어지는 것, 더 높아지는 것 등등을 한꺼번에 가리켜 하는 말이다. 가장 높고 크게 확장되어 있는 존재로 인간은 일단 ‘신’(神)을 모셔 놓고, 부단히 그곳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초월의 욕구다. 외재적 초월도 가능하고 내재적 초월도 가능하다. 내면으로도 가능하고 외면으로도 가능하다. 정신으로도 가능하고 물질로도 가능하다. 초월의 정도가 자기 통제력의 두께다. 통제력의 내용은 복잡 다단에게 현현한다. 얼마나 초월되었느냐가 얼마나 크게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 개인적인 초월의 여정에 사회가 있고 국가가 있고 세계가 있고 우주도 있다. 여기에 환경도 있고 인권도 있고 자유도 있고 혁명도 있고 저항도 있고 역사도 있다. 학습도 바로 여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학습과 역사는 매우 밀접하게 붙어있다. 역사적 경험에서 학습에 성공하면 그 역사는 빛나고, 학습에 소홀하면 그 역사는 찬란하기 어렵다. 동아시아의 근대 역사는 서양 침탈로 시작한다. 서양에 대한 반응이 곧 동아시아 역사의 많은 내용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한국도 이렇다. 중국의 개항은 1842년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난징조약이 시작이고, 일본의 공식적인 개항은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 시작이다. 우리는 서양의 대리인 격인 일본에 의해 강제개항을 당하는데, 바로 1875년 일본이 강화 해협을 불법 침입하여 이듬해에 강제로 맺은 강화도 조약이 그 시발이다. 그러니까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을 당하고 나서 22년 만에 힘을 키워 다른 나라를 강제 개항시킬 정도가 된 것이다. 물론 강제 개항의 그 시점에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벌써 국력에서 큰 차이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22년이다. 이 22년 동안 일본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바로 학습이다. 서양에 당하고도 그 서양을 배우려는 열기가 왕성했다. 이것은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표어에 집약되었다. 이런 점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도 영국을 필두로 한 서양에 굴욕을 당하고 나서 나라 전체가 “서양을 배우자!”(“向西方學習”)라는 구호로 가득 찼다. 조선은 굴욕을 당하고 나서 서양(일본)을 배우자는 자발적 열기가 성숙되지 않았다. 막부정권의 쇄국정책으로 일본은 220여 년간이나 닫혀 있었다. 1853년 7월 8일 오후 5시경 매튜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함, 소위 흑선(黑船, 쿠로후네) 4척이 에도 앞바다에 들어오면서 일본은 엄청난 변화 앞에 직면한다. 쇄국을 유지하려는 막부와 개방을 요구하는 거대국가 미국과의 대결로 판이 전개된 것이다. 물론 막부가 전면적인 쇄국을 시행하면서도 네덜란드를 예외로 두고 서양 연결 통로를 열어둔다거나 1814년에 영일사전을 편찬한다거나 하는 등의 미래를 향한 개방적인 도전을 제한적으로나마 시행한 점이 훗날의 역사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던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이때 시대적 사명감을 가진 예민한 지식인들의 투쟁과 학습에 대한 열망은 일본으로 하여금 ‘당황스런 새 판’을 적극적이고 생산적으로 맞이할 수 있게 하였다. 뜻있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도전적인 자세로 과감하게 역사 속으로 뛰어든다. 여기에 일본 발전의 핵심이 있다. 그들은 역사를 위하려 하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조국을 위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바로 자신이 역사 자체가 되려 했고 자신을 ‘일본’ 자체로 만들려 했다. 이들 가운데 앞장서서 스스로 일본의 ‘역사’로 완성되려 했던 젊은이가 그 시대의 중심에 살았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다. 요시다 쇼인은 우리에게 큰 고통과 치욕을 안겨준 일제 식민지 침략의 이론적 근거인 정한론(征韓論)을 완성하고,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의 기초를 다진 장본인이다. 궁극적으로는 침략자 일본의 심장이다. 흑선을 직접 본 쇼인은 큰 충격에 휩싸인다. 그 전에도 서양 문명의 강대한 변화를 듣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구미 열강과의 격차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배도 대포도 적수가 안 된다’라는 위기감을 친구에게 편지로 쓸 정도였다. 그러나 기득권과 타성에 젖은 막부는 쇼인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개혁을 도모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강국을 직접 경험하고 싶어 마침내 시모다 항에 정박 중이던 미군의 함선에 접근하여 밀항을 시도하기까지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국법을 어긴 죄로 감옥에 수감된다. 출옥 후에도 일본의 미래를 향한 착실한 행보를 이어간다. 고향 하기(萩)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운영하며 근대형 인재들을 배양하는 데에 힘을 쏟은 것이다. 3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여기서 배양된 인재들이 메이지 유신의 주력으로 성장하여 일본 근대를 튼튼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토 히로부미도 요시다 쇼인의 제자며, 아베 신조 현 총리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을 들면서 그를 계승하는 일을 사명으로 하고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심지어 이들은 쇼인이 강조했던 가르침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기까지 하다.근대 이후로 일본과 한국의 국력 차이가 난 근본적인 이유를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일본에는 요시다 쇼인이 있었고, 한국에는 요시다 쇼인 같은 인물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내면에 있는 무엇이 ‘요시다 쇼인’을 만들었을까? 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을 밀항까지 감행했던 그의 도전 정신에서 찾는다. 도전은 ‘초월’의 동력이다. 도전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밝고 강한 미래를 보장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결정한다. 페리도 이 점을 주의 깊게 본 듯하다. 요시다 쇼인이 밀항하려고 그의 제자와 함께 군함에 접근한 것을 보고 페리는 말한다. “이 사건은 우리를 매우 감격시켰다. 법을 어기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식을 넓히려는 두 청년의 뜨거운 열정에 놀랐다. ... 지금은 엄격한 법에 억눌렸지만 만약 모든 일본인이 이 두 젊은이와 같다면 일본은 미국만큼 강대해질 것이다.”(Japan Expedition, 1854) 페리는 도전과 발전을 일치시켜 보는 안목이 있었고, 페리의 말대로 일본은 강대해졌다.전번 주에 14명의 한국 젊은이들과 함께 하기 시에 갔다. 하기 시의 거리 곳곳에는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거나 같이 활동했던 인사들의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재밌게 그려진 캐릭터는 매우 친근감을 주게 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 써진 업적들은 그들을 존경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일본은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역사 학습의 지속성을 전혀 잃지 않고 있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 역사속의 인물들과 그들의 업적을 어려서부터 매우 친근감 있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있었다. 요시다 쇼인 빵도 있고 과자도 있고 책받침도 있다. 생활 속에서 역사를 학습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역사를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가. 역사 학습이 사라졌다. 하기 시에 가려면 후쿠오카 공항을 거치는데, 그 도시에는 구시다 신사(櫛田神社)가 있다. 이곳은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할 때 사용했던 칼이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신사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소원을 써서 걸어 두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한국인들의 소원패도 많이 걸려 있었다. 우리가 역사를 조금이나마 학습했다면, 어떻게 구시다 신사에다가 자신의 소원패를 걸 수 있겠는가. 일말의 자존심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학습은 도전을 하게도 하지만 최소한의 기품을 지킬 수도 있게 해준다. 초월의 욕구는 자신을 점점 높고 넓게 확장하므로 시대 의식을 포착하게 한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은, 즉 초월의 욕구가 살아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으려 애쓰기 보다는 시대의 병을 함께 아파할 수밖에 없다. 시대의식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대 의식은 나를 보편의 단계로 확장시키는 방아쇠다. 이 방아쇠를 당기는 일을 도전이라고 한다. 젊은이들과 얘기를 하면서 도전을 강조할 때가 있는데, 그 때 나오는 대부분의 질문들이 다음과 같다. “도전을 했다가 실패하더라도 사회에서 그 실패를 허용하거나 보살피는 시스템이 준비되지 않았다. 도전하다 실패하면 어떻게 하는가? 그 위험을 누가 책임지는가?” 도전, 모험 그리고 탐험을 말할 때는 항상 나오는 질문이다. 이것은 나의 매우 협소한 경험인데, 다른 나라 젊은이들에게 도전에 대해서 얘기하고 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오곤 했다. “도전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내게 도전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도전할 마음이 생기는가?” 초월의 견지에서 볼 때, 도전해서 실패하였을 경우를 걱정하는 질문과 도전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질문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크다. 도전은 우선 뒤를 돌아보는 조심성이 결여되어 있어야 미덕이다. 이런 미덕이 갖춰져 있어야만 ‘초월’의 확장이 실현된다. 학습을 통해 두텁고 두터워진 존재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 그가 당기는 도전의 방아쇠는 역사의 순방향에 조준되어 있을 것이 거의 분명하기 때문이다. 긴 시간 스스로 역사가 될 준비를 진실하게 한 사람은 항상 옳다. 스스로 역사가 되었기 때문에 보상을 기대하거나 결과에 전전긍긍 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유롭다. 두려움도 없다.절대 자유와 한계 지우지 못하는 큰 업적을 이루는 경지를 장자(莊子)라는 철학자는 ‘소요유’(逍遙遊)라 말했다. ‘소요유’의 상징은 ‘대붕’(大鵬)이다. 대붕은 원래 작은 물고기였다. 우주의 바다에서 긴 시간 학습한 공력(積厚之功)이 극한까지 커져서 질적인 전환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던 찰나에 바다가 흔들리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9만리를 튀어 올라 새가 되었다. 이것이 ‘대붕’(大鵬)이다. 대붕은 9만리를 튀어 오르는 내내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

기획 | 기고 | 2017-07-18 23:02

어떤 모임에서나 앉자마자 정치나 종교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촌스럽다. 무지하고 강박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을 선(善)으로 확신하고 들이미는 행위다. 신념을 전면에 내 세우면서도, 전 인격으로서의 자신은 뒤로 감추고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큰 실례다.보통의 경우 정치와 종교를 주제로 하는 대화에서 논리적으로 합의점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합의점을 찾았다면 아마 논리 너머의 다른 어떤 요인들이 개입되어서일 것이다. 정치와 종교는 기본적으로 신념의 활동이다. 매우 세련되고 현란하며 또 권위까지 갖추고 있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게다가 보편성으로 해석될 무늬의 외피까지 두르게 되었지만 일상 안에서는 신념의 차원을 넘지 못한다. 가끔 정치와 종교의 최고 지도자들 가운데 높은 차원의 포용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분명히 자신의 신념을 조금이나마 양보했을 때다. 신념은 각자에게 진리다. 진리를 양보하고 마음 편할 수는 없다. ‘자기 진리’를 양보하고 여유로울 수 있는 것, 아마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일지 모른다.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 모두 순교자가 있고 또 그들이 떠받들어지는 한 그것들이 강력한 신념 체계라는 것을 부인 하지 못한다. 신념이 맹목적인 방향으로 자가 발전하면 타협이 원천 봉쇄되는 근본주의로 흐른다. 그런데,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거수일투족은 다 정치행위다. 말 한 마디도 모두 정치행위다. 상황을 자신의 의지대로 끌고 가려는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한 이 정치 행위를 벗어날 수 없다. 삶이 정치 행위라면 인간은 모두 크거나 작거나 혹은 강하거나 약하거나 하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각자의 신념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판단 기준을 갖는 것이다. 이것을 장자는 ‘정해진 마음’(成心)이라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정해진 마음을 스승처럼 모시고 산다. 현자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다 똑같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정해진 마음을 기준으로 해서 시비판단을 한다. 그래서 정해진 마음이 없이 시비판단을 한다는 말은 오늘 월(越)나라로 떠났는데 도착은 어제 했다는 말만큼이나 이치에 맞지 않다.”(『장자 · 제물론』) ‘정해진 마음 - 시비판단- 정치행위- 삶’이 하나의 유기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삶의 형태에서라면 어떤 합의도 애초에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각자의 기준은 각자에게 진리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말하는 장자의 얘기를 들으면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나와 당신이 논쟁을 한다고 합시다. 당신이 나를 이기고, 내가 당신에게 졌다면 당신은 옳고 나는 틀렸을까요? 내가 당신을 이기고 당신이 졌다면 내가 옳고 당신은 틀렸을까요? 한 쪽은 옳고 다른 쪽은 틀린 경우일까요, 아니면 두 쪽 다 옳은 경우일까요? 두 쪽 다 틀린 경우일까요? 이런 일은 둘 다 알 수 없소. 제3자는 더 알 수 없소. 그렇다면, 누구를 불러 이를 판단하게 할 수 있겠소. 당신과 입장이 같은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한다면, 그는 당신과 같으니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없소. 나와 입장이 같은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하면, 나와 같은 입장이라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 둘 모두와 입장이 다른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하면, 그는 나하고도 다르고 당신하고도 다르니 역시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소. 우리 둘 모두와 입장이 같은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하면, 그는 우리 둘 모두와 같기 때문에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소. 그렇다면 나도 당신도 그리고 제3자도 모두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는 거요. 그런데 누구에게 기대한다는 말이요?”(『장자 · 제물론』) 이처럼 ‘정해진 마음’에 갇혀 사는 것이 세상 속 인간이다. 이 ‘정해진 마음’을 치장하는 데에 거의 대부분을 쓰는 존재가 또 인간이다. 자신만 모른다. 이 ‘정해진 마음’을 치장하며 사는 한 자신은 한 곳에 뿌리를 내린 결박된 존재가 되고, 자신이 하는 일은 대부분 과거를 지키는 일이 된다는 것을 알기 어렵다. 어쩌랴. 새롭고 신선한 일은 죄다 자신의 ‘정해진 마음’에서 이탈해서야 가능한 일인 것을...한 농부가 있었다. 하루는 밭에서 일을 하다가 내달리던 토끼가 밭 가운데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쳐 죽는 것을 보았다. 죽은 토끼를 주워 집으로 돌아 온 농부는 그 다음 날부터 농사는 짓지 않고 그루터기만 지켜보며 또 그런 토끼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다. 하지만 그 뒤로 한 마리도 보지 못하고 결국에는 온 동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말이 출현한 이야기다.어떤 검객이 배를 타고 양자강(陽子江)을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강 중간쯤에서 물결이 크게 출렁거리던 차에 차고 있던 칼이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놀란 검객은 급히 작은 단도(短刀)로 칼을 떨어뜨릴 때 앉아있던 뱃전의 한 곳에 표시를 하였다. “이곳이 칼을 떨어뜨린 곳이다.” 건너편 나루터에 도착하여 여유가 생기자 검객은 칼을 찾기 위해 뱃전에 표시한 바로 그 밑의 물속으로 들어갔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말로 회자되는 고사다. 이 두 고사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비웃음을 사지 않을 수 없다. 비웃음이라는 것은 어디서 오는가. 바보 같은 상황에 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알아채지 못한 채 어떤 고정된 행위를 벗어나지 못하면 비웃음을 살 수 밖에 없다. 달라진 상황에 다르게 반응하지 못하고 계속 같은 반응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도 같은 일이다. 다른 시대에 다른 비전을 생산하지 못하고 고정되고 철 지난 틀로 새 시대를 맞자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웃음이 비웃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비웃음을 사는 행위 때문에 비효율이 발생되어 힘 자체가 빠지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이처럼 ‘정해진 마음’은 한 번 토끼를 얻은 기억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박혀서 계속 토끼만 기다리게 한다. 토끼를 기다리는 동안 이 농부는 어떤 생산 활동도 하지 못한다. 막연한 심리적 기대가 객관적 사실로 착각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토끼를 주워서 먹을 수 있다는 기대와 확신이 너무 커서 지금의 배고픔을 불평할 틈도 없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고 있다가는 굶어 죽을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오히려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을 무지하거나 사악한 부류로 몰아붙이기 까지 할 것이다. ‘정해진 마음’에 지배되는 상태가 되면, 그 사람의 온 마음과 행동이 이 ‘정해진 마음’의 변주에 불과해진다. 한 사람이 하는 모든 심리적 활동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로는 ‘심리적 기대’와 ‘심리적 확신’인데, 그것을 ‘객관적 사실’로 믿는다. 이처럼 ‘정해진 마음’은 한 사람을 과거에 묶어두고,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다. 토끼를 기다리는 이 농부의 이야기는 『한비자(韓非子)』의 「오두」편에 나오는데, ‘오두’는 나라를 망가뜨리는 다섯 종류의 ‘좀 벌레’를 말한다. 즉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다섯 가지 요인이라는 뜻이다. 비효율적으로 운용되는 나라에서는 심리적 기대와 객관적 사실을 혼동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우리 경제는 선진국의 문턱에서 몇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007년에 2만 달러대에 진입하고 나서 선진국 진입의 경계선으로 여겨지는 3만 달러의 벽을 여태껏 넘지 못하고 있다. 심한 정체에 빠져 있다. 무엇이 정체되어 있다는 것은 새로움이 시도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과 같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선진국 진입을 기대하면서 중진국에 이를 때 사용하던 방법을 계속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한다. 게다가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이르는 일과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후진국에서 중진국에 오르는 일은 선진국에서 먼저 닦아 놓은 길, 즉 있는 길을 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은 없는 길을 열면서 가야 한다. 있는 길을 가는 것과 없는 길을 열면서 가는 길은 차원이 다르다. 뱃전에 긁어놓은 표식만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가는 자신이 배를 타고 얼마나 흘러왔는지를 망각한다. 이 망각은 사람을 맹목적인 상황 속에서 헤매게 만든다. ‘정해진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염치(廉恥)가 없어진다. ‘정해진 마음’이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는 덩어리가 크면 클수록 ‘정해진 마음’이 주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 ‘정해진 마음’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자 진실을 지키는 일로 바뀐다. 따라서 아무리 크고 중한 일이라도 그것이 ‘정해진 마음’을 발휘하는 데 방해가 되면 바로 사소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럴 때 사용하는 비굴한 논리들은 모두 상황을 상대적인 묘사 속으로 끌고 간다. “다른 사람보다는 그래도 덜하다”고 하거나 “나만 그런 것이냐”고 하는 식으로 자신을 정당화 한다. 남보다 더 낫기만 하면 된다는 종속적 사고에 빠져 있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남보다 더 나은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남과 다를 뿐만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것이 있어야만 만족할 것이다. 비굴한 논리를 사용하는 것도 자신을 자신의 존엄 위에 세우지 못하고 ‘정해진 마음’ 위에 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불행하게도 염치를 잃어버린다. 자신이 뭐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일이 있다고 하자. 법을 어긴 사람을 법무장관으로 추천하고, 악의적 표절을 한 사람을 교육부 수장으로 추천한다. 법무장관은 법을 관장해야 하고, 교육부 수장은 표절을 하지 못하도록 감독해야 할 직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한 사람들이나 추천된 사람들이나 모두 아무렇지 않은 양 당당하다. ‘정해진 마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 말한 원칙을 스스로 깨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소위 ‘정치’를 버리고 ‘정치 공학’을 선택하는 것이다. 게다가 ‘정해진 마음’을 공유한 사람들은 객관적 비판 능력보다는 감성적 동질감에만 의존하면서, 갑자기 호위무사로 등장한다. 자존감이나 품격이나 진실성은 사라진다. 오직 ‘정해진 마음’들의 굳건한 연대만 남는다. 참 무섭고 슬픈 일이다. 이처럼 무섭고 슬픈 풍경 안에서 아무도 몰래 비효율은 두꺼워진다. 우리가 ‘정해진 마음’에 좌우되는 감정을 극복하고 과학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 ‘정해진 마음’에 갇힌 자기를 장례지내라.”서강대 철학과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

기획 | 기고 | 2017-06-20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