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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남북간 대화의 역사
[남북정상회담] 남북간 대화의 역사
  • 연합
  • 승인 2000.05.2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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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간의 대화와 협상의 역사는 6.25 전쟁으로 인한 단일 민족의 분단과 함께 시작됐다.

분단으로 인한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그리고 국제사회에 남북한이 단일 민족임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지금까지 3백50여회의 남북 대화가 꾸준히 전개됐다.

그러나 남북회담은 남북한 양측의 정치적 상황변수에 커다란 영향을 받으면서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제자리 걸음을 걸어온 것이 사실이다.

6.25 전쟁 이후 첫 남북대화는 전쟁으로 인한 실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3년 12월 11일부터 54년 3월 1일까지 휴전협정 제3조 59항에 따라 열린 '실향민간귀환협조위원회'.

이어 62년 북한이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동경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참가를 주장하고 판문점 체육회담을 제의함에 따라 그해 12월 스위스 로잔과 홍콩에서 회담을 가졌지만 이후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종료됐다. 이 두 회담의 목적과 성격은 70년대와 80년대 다양한 형태의 회담을 거치면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70년대는 7.4 남북공동성명과 조절위원회, 적십자회담이 대표적인 남북회담으로 기록되고 있다. 71년 8월 판문점에서 열린 적십자 파견원 접촉으로부터 시작된 남북적십자회담은 현재의 남북회담의 형식과 틀을 만들어낸 모태. ▲판문점 상설연락사무소 설치 및 연락관 상주 ▲직통 전화가설 등 오늘날 남북회담 운영의 기본이 되는장치들이 이 때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이어 판문점 예비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의제로 정한 남북 양측은 72년 8월부터 73년 7월까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7차례의 적십자 본회담을 가졌지만 이산가족문제를 공동의 문제로 인식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소득없이 회담을 끝냈다.

남북 적십자 접촉 및 회담과 병행해는 71년부터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간의 비밀교섭이 진행됐다. 이후 이 부장의 평양방문과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의 서울 방문이 이어지고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3개항으로된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됐다.이어 남북조절위 회의가 개최됐지만 국내 및 국제 정치적 사건들로 인해 성과를 얻지 못했다.

80년대 남북회담의 물꼬는 '86 서울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으로 텄다. 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과 서울에서 열리는 두 게임에 단일팀을 출전시키자는 남측의 제의에 북측이 호응함에 따라 판문점에서 체육회담이 세 차례 열렸고 85년 10월부터 87년 7월까지 네차례의 회담이 로잔에서 열렸지만 아무런 소득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어 84년 여름 남한에서 발생한 수해에 대해 북측이 구호물자 지원을 제의했고 남측이 이를 수용함에 따라 적십자 접촉이 판문점에서 열리면서 남북대화가 본격화됐다.

이를 기회로 73년 중단됐던 적십자 본회담이 재개되면서 85년 5월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에 합의했다. 6.25 전쟁 직후 시작된 남북간 이산가족문제의 해법 논의가 첫 성과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이 합의에 따라 85년 9월 20일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의 동시 교환방문이 실현됐다.

또 당국간에는 84년 11월부터 경제회담이 열렸다. 남북간 교역과 경제협력을 추진하는 상설기구 설치 등을 논의한 이 회담은 남북간 경제협력문제를 대화 테이블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평가할만 하다.

90년대는 고위급 회담으로 남북대화의 문을 열었다. 서울과 평양을 8차례 오가며 열린 이 회담에서는 92년 남북 문제해결의 '권리장전'으로 평가되는 기본합의서가 체결돼 군사, 교류ㆍ협력, 화해, 핵 통제의 4개 공동위를 가동키로 했다.

고위급 회담이 가동중이던 91년 북한은 그동안 입장에서 후퇴해 유엔에 남한과 동시에 가입하는 등 남북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듯 했다.

하지만 남북회담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북한의 핵위기로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94년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평양방문으로남북정상회담이 합의되고 남북간 실무절차 합의 등으로 역사적 정상회담이 기대를 모았으나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불발되고 말았다.

이어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98, 99년 비료지원과 이산가족문제를 연계한 차관급회담이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잇따라 열렸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베이징특사접촉을 거쳐 새 천년 첫해 남북은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것이다.

적대적 상대방과의 정상회담은 최고지도자의 결심을 직접 이끌어 낼 수 있단 점에서 현안 해결의 지름길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남북이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상호 불신과 반목을 종식시키고 이산가족문제 해결과 더불어 경제협력 등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는지 회담결과에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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