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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만세운동과 6월 민주항쟁]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잇다
[6·10 만세운동과 6월 민주항쟁]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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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6.1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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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다가서기

1926년 6월 10일은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장례일이자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또한,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되었던 날이다. 3·1 운동이 고종의 장례식에 맞추어 일어난 것이라면, 6·10 만세운동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에 맞추어 전개되었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6월 10일에 예정대로 서울 거리로 뛰쳐나왔다. 61년이라는 역사가 흘러 1987년 6월 10일 정부의 무자비한 독재와 탄압을 참지 못한 학생과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다. 이것이 바로 ‘6월 민주항쟁’이다. 그래서 6월 10일은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잇는 뜻 깊은 날이다. 1926년과 1987년의 6월 10일 그날의 사건을 재조명하여 소중한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그 의미를 새겨봤으면 한다.

■ 주제 관련 신문기사

[읽기자료 1] 뉴시스, 2012년 6월 10일, “영원히 계승해야 할 민주정신”, ‘군사독재’ 몰아낸 6·10민주항쟁

[읽기자료 2] 대경일보, 2016년 5월 24일, 제2의 3·1만세운동 6·10만세운동(90주년)

[읽기자료 2] 뉴시스, 2009년 6월 10일, 6월10일은 韓 근현대사에서 어떤 의미?

■ 신문읽기

[읽기자료 1]

“영원히 계승해야 할 민주정신”

6·10 민주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큰 분수령이었다. 국민의 힘으로 서슬 퍼런 군사독재를 몰아내고 민주화의 서막을 알리는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전국적으로 연인원 500만 명 이상이 20여 일 동안 자발적으로 거리로 몰려나와 독재정권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역사적으로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국민 스스로 주인임을 자각했다는 점에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79년 12·12사태(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로 정권을 잡은 제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은 1985년 간선제로 선출됐다. 전 대통령의 군부 정권은 도덕성 결여와 비민주성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이는 야권과 재야세력의 직선제 개헌 공세 대상이 됐다.

1986년 개헌 서명운동에 1000만 명이 동참하는 것은 물론 여야가 헌법 개정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 대통령은 1987년 4월13일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이른바 ‘4·13 호헌(護憲) 조치’를 통해 독재군부정권 유지 뜻을 천명한다.

이 와중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서울대 학생 박종철 씨는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을 당하던 중 1월14일 숨졌다.

당시 경찰은 “조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탁’치며 혐의사실을 추궁하자 ‘억’하며 쓰러졌다”고 발표하며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축소 발표했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의해 만천하에 드러났고, 이 소식을 접한 국민들의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6월9일 연세대 2학년이던 이한열은 학교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진 뒤 사경을 헤매다 7월5일 끝내 숨졌다.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은 길거리로 나섰고, 꽃다운 두 젊은이의 희생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5월 27일 꾸려진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는 6월 10일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를 개최했다. 박 군의 고문치사 사건 조작·은폐를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국민대회였다.

주요 도시 곳곳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로 거리가 메워졌다. 주요 도로 곳곳의 교통이 마비됐지만 시민들은 시위대를 지지하며 손수건과 자동차 경적으로 호응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는 전국에서 울려퍼졌다. 이날만 22개 지역에서 24만여 명이 참가한 것으로 주최 측은 추산했다. 경찰에 연행된 시위대도 수천 명에 달했다. 구속된 이들은 국본 간부를 포함한 220여명이다.

대항쟁은 멈추지 않았다. 5일여 동안 명동성당에서 집회가 이어졌고 낮에는 넥타이부대와 일반시민들이 지원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6월15일 다시 전국적으로 되살아난 시위 불씨는 26일 전국 30여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까지 계속됐다. 이 때까지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50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

결국 전 대통령은 이에 굴복, 민주정의당(민정당) 노태우 당시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골자로 한 6·29민주화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는 민중의 힘으로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킨 1960년 4·19혁명과 같이,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에 저항한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과 같이 민중 역사의 한 획이 그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된 6월 항쟁은 그해 12월 16년 만에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면서 미완의 역사로 마무리됐다.

‘6월 항쟁 25주년 행사 국민추진위원회’ 서우영 조직팀장은 “6월 항쟁은 민주화를 간절히 열망했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와 경찰의 최루탄 가스와 폭력에 맞서며 거세게 저항한 투쟁의 역사”라며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며 이뤄낸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환점”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와 제도가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6월 항쟁의 민주정신은 단순하게 기록된 역사 정도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함께 영원히 계승해야 할 살아있는 민주주의 역사”라고 덧붙였다. 〈뉴시스, 2012년 6월 10일, 박성환 기자〉

[읽기자료 2]

제2의 3·1만세운동, 6·10만세운동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융희황제(순종) 인산일, 곧 장례일을 기해 일어난 제2의 만세운동이다. 4월 25일 융희황제가 서거하자 6·10만세운동이 추진됐다. 이를 이끌어 낸 인물이 바로 경북 안동의 권오설(權五卨, 1879~1930,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과 김천 출신의 김단야(金丹冶, 1900~1938, 본명 김태연,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다. 원래 이들은 5월 1일 서울에서 메이데이 시위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순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일에 대중적 시위를 일으키는 쪽으로 운동 방향을 바꿔 4월 말부터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권오설은 1926년 5월 1일 상주 차림으로 변장하고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갔다. 안동(지금의 단동)에서 김단야를 만나 활동 방향을 논의했는데, 만세시위 곧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국내로 돌아온 권오설은 조선공산당의 동의를 얻고, ‘6·10투쟁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만세 준비에 나섰다.

만세운동을 펼칠 조건은 3·1운동 때보다 훨씬 나빴다. 3·1운동을 경험한 일제는 순종의 장례에 있을 저항을 미리 막고자 군대와 경찰을 모두 동원해 물샐틈 없는 통제를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장례일에 맞춰 시위를 일으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권오설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전 민족이 참여한 독립만세를 이끌어 내기 위해 통일전선체 조직에 나섰다. 권오설은 ‘6·10투쟁 특별위원회’를 만들고, 이를 3·1운동 때와 같이 전 민족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사회주의·민족주의·종교계·청년계·학생계를 망라한 통일전선 조직을 구상했다. 그 결과 국외에서는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와 상해의 임시정부 및 그 외곽단체인 병인의용대, 국내에서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천도교·조선노농총동맹, 그리고 일본유학생과 국내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비롯한 학생 등 다양한 주체들이 정치적 이념을 초월해 연대를 이뤘으며, 그 지도기관으로 ‘대한독립당’도 만들었다. 상해에 있던 김단야는 민중들에게 알리는 격문을 직접 썼다. 그리고 5천매를 인쇄해 국내로 들여보냈다.

그런데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3일 전인 6월 7일 ‘격고문’이 발각돼 권오설은 체포되고 말았다. 이어 이튿날인 6월 8일, 일제는 거의 전 지역에서 철야 경계에 돌입했다. 장례에 참여코자 서울로 오는 사람들을 미리 막아, 만세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될 여지를 막기 위함이었다. 끝내 200여 명이 체포되고, 6·10만세 추진위원회가 구상했던 지방으로의 연락 계획도 좌절되고 말았다.

더 이상 만세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6월 10일 기습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권오설과 함께 만세를 준비했던 학생들이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추진한 것이다. 여기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경북 안동 예안면 부포마을 출신의 이선호(李先鎬, 1904.7.12.~?,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다.

장례 행렬이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나자 중앙고보생이었던 이선호가 길 가운데로 뛰어나오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6·10만세운동의 신호탄이 됐다. 이선호의 뒤를 이어 중앙고보생들이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와 격문을 뿌렸으며, 만세소리가 거리 곳곳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관수교觀水橋·경성사범학교 앞·훈련원·동대문·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에서도 많은 민중이 호응했다. 이 과정에서 안동 출신의 권오설, 권오상(權五尙), 권오운(權五雲), 권태성(權泰晟), 류면희(柳冕熙), 이선호(李先鎬), 이수원(李壽元)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철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일제 당국은 기습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있자, 7천여 명의 보병·기병·포병을 각 요소에 배치했다. 그리고 더 이상 사태가 커지지 못하도록 무차별 검거에 나섰다. 검거된 중앙고보 학생 가운데 하나는 매를 맞아 머리에 선혈이 흐르기도 했다. 만세 현장에서만 100여 명이 체포되고, 이들 가운데 이선호를 비롯한 대표자 11명이 기소됐다.

이선호의 법정투쟁은 6·10만세운동의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잘 보여 주고 있다. 동아일보(1926.11.4)에 따르면 이선호는 법정에서 “자유를 부르짖으면 반드시 자유가 온다는 굳은 신념 아래 자유를 얻기 위하여 한 것이다”라고 명쾌하게 답변했다. 또 이듬해 3월, 복심법원 공판에서도 “나는 자유의 나라를 동경하고 있다. 신학기를 맞아 공부하고 싶어서 양심에 없는 답변이라도 하고 싶으나, 지금도 역시 마음은 변하지 않았노라”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선호는 국권과 자유를 회복키 위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의 취지와 뜻을 끝내 꺾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징역 1년형을 받았으나, 실제로 그가 풀려난 때는 1927년 9월 20일이다. 1년 3개월도 넘는 동안 감옥에서 고생한 것이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선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으로 건너가 1930년대까지 항일투쟁을 이어 갔다.

이날의 만세투쟁은 비록 3·1독립만세운동처럼 크게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3·1운동을 경험했던 일제의 삼엄한 경계 아래 전개됐다는 점.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그 밖에도 독립운동사에서 값진 열매를 맺었다. 첫째, 사회주의운동의 추진 주체들이 민족혁명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민족주의자들과 연대를 이뤄 민족통일전선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점 둘째, 민족통일전선을 이뤄 신간회 설립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 셋째, 학생운동에 영향을 줘 1928년 광주학생운동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발전해 갈 수 있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출처 : 대경일보, 2016년 5월 24일, 안상수 기자〉

[읽기자료 3]

6월10일은 韓 근현대사에서 어떤 의미?

6월10일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적지 않은 상징성을 지닌다.

1926년 6월10일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조선의 마지막 국왕인 융희(隆熙) 순종 황제의 출상일을 기해 일어난 독립운동을 일컫는다. 병인(丙寅) 만세운동이라고도 한다

3·1운동 이후 노골화된 일제의 조선인 학생 차별이 이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연희전문의 이병립·박하균, YMCA 영어과의 박두종 등이 주도해 서울 종로3가 단성사에서 격문을 뿌리며 조선독립을 외쳤다. 이후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당시 전국적으로 1000여 명 이상이 경찰에 체포·투옥됐다.

1987년 6월10일 일어난 ‘6·10민주항쟁’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4·13호헌조치에 반발해 재야와 통일민주당 등이 연대해 만든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이끌어냈다.

국민운동본부는 이날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해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의지를 다졌다.

같은 날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위이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의 간선제 호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급격히 확산됐다.

이후 500여 만 명이 넘는 기록적인 시위인파가 4·13호헌조치 철폐, 직선제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민주화를 요구했다.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이같은 국민적 요구에 따라 직선제개헌과 평화적 정권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6·10민주항쟁은 전두환정권의 권위주의적 권력유지를 민주세력과 시민의 역량으로 저지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민주당과 시민단체 등이 10일 오후 7시 서울광장에서 개최하는 ‘6·10 민주회복 범국민대회’는 6·10민주항쟁 22주년을 기념한 것이다.〈출처 : 뉴시스, 2009년 6월 10일, 변휘기자〉

■ 생각열기

(1) [읽기자료 1]을 읽고 6월 민주 항쟁이 일어나기 전,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을 어떻게 뽑았는지, 전두환 대통령은 왜 헌법을 고치지 않으려고 했는지 친구들과 토의해보자.

(2) [읽기자료 1]과 [읽기자료 2]를 읽고 6월 민주 항쟁과 6월 10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배경과 전개과정, 그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3) [읽기자료 3]를 읽고 6월 민주항쟁과 만세운동이 한국 근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고 친구들과 토의해보자.

■ 생각 키우기

(1) [읽기자료 1]과 [읽기자료 2]를 읽고 6월 항쟁이 일어났던 1987년 당시 사회의 모습과 6월 10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926년 당시 사회의 모습을 비교해보자

(2) 일본에 강제로 합병당한 후 우리는 굴하지 않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계속 독립운동을 해 나갔으며 민주주의 국가에서 독재 정치를 통해 권력을 잡으려는 정부 앞에 우리 국민은 계속해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3.1 운동, 6.10 만세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 4·19 혁명, 6월 항쟁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일본과 독재에 빼앗긴 자유를 찾으려는 꿈이 이어져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음 자료는 6월 항쟁 당시 널리 불렸던 대표적인 민중가요이다. 이 노래가 불렸던 이유를 생각해보고 느낀 점을 친구들과 이야기해보자.

그날이 오면 한 밤의 꿈은 아니리/오랜 고통 다한 후에/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뜨거운 눈물들//한줄기 강물로 흘러/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드 넓은 평화의 바다에/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그날이 오면/그날이 오면//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그 아픈 추억도/아 짧았던 내 젊음도/헛된 꿈이 아니었으리//(중략)/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헛된 꿈이 아니었으리//그날이 오면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6월7일)

(3) 다른 나라의 독립 · 민주화 운동의 사례를 조사해보자. 예를 들어, 영국의 시민혁명, 프랑스의 시민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의 7월 혁명과 2월 혁명,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 등이 있다.

■ 학생의 글

- 6월 10일,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1987년 6월 10일은 민주주의를 향해 가까이 내딛게 했던 6월 항쟁이 일어났던 날이다. 서로서로 희생하면서까지 우리 모두를 위해 운동을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깐 ‘내 나라를 사랑하고 모두의 자유를 위해서’라는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운동들 덕분에 지금 우리가 많은 자유를 얻게 되었고,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있었던 것 같다.

1926년 6월 10일에는 우리나라의 자유를 위해서 독립의 소망을 품고 손을 잡고 한목소리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사람들이 있었다. 6월 10일 만세운동은 민족 대표가 주도했던 3.1운동과는 달리 학생들끼리 계획하고, 추진한 운동이라고 한다.

과거 많은 사람이 그리고 학생들조차도 우리나라를 위해 이런 일을 했다면,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 무엇을 노력해야 할까? 우선 어른들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어리다. 어리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걸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계속해보게 된다.

먼저 우리나라의 기념일들을 찾아보며 감사하는 마음을 기르고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열심히 공부해서 널리 알리고 싶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이렇게 편하게 사는 것도 전부 옛날 분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그것을 머릿속에 새기며 감사해야겠다.

달력을 보면 우리나라 중요한 역사가 있었던 날은 빨간색으로 공휴일 표시를 해둔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날에 놀러 가기에만 급급하기만 하고 그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6월 10일은 공휴일도 아닌데, 사람들은 기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날의 의미도 모른 채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나 또한 이 글을 쓰면서 6월 10일 그날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NIE 시간에 우리에게 던지셨던 ‘우린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마음에 남기며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가꿔 나가야겠다. 최수현(토기장이학교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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