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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40년, 여진의 40년
조선의 40년, 여진의 40년
  • 기고
  • 승인 2016.06.2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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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성 전주교대 교수

역사는 과거를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과거를 왜 연구할까. 그 주요한 이유는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속의 수많은 교훈 중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교훈 하나를 끄집어내고자 한다. 병자호란의 삼배구고두의 항복 교훈이다.

임난 이후 달라진 두 국가의 운명

많은 사람들은 조선이 인조반정 이후 명과 후금 사이의 중립외교정책을 실시하였다면 치욕스러웠던 항복식을 행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하지만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들 역시 당시 눈에 훤히 보이는 국제상황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서인들도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병자호란은 우리의 외교정책 때문이 아니라, 후금이 중원을 차지하기 위한 야욕 때문에 일으킨 사건이었다. 후금은 명을 지지하는 조선의 손발을 묶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후금의 조선 침공은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일본의 침공을 경계하라는 대마도주와 현소의 여러 차례 경고가 있었다. 심지어 풍신수길이 황윤길과 김성일에게 보내온 답서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지 거의 보름만에 한양을 정복했을 정도로 조선은 전쟁에 대비를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조선은 양난 모두 일본과 후금의 침공을 예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눈 그대로 뜨고 당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양난 당시의 문제라기보다는 조선사회의 오래된 고질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무기체계와 군대의 재편성이 있어야하고, 이런 제도개편을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조세를 증가시키기 위한 대동법으로의 개편이 주장되었다. 대동법은 소유하고 있는 토지결수를 기준으로 세금이 부과되었다. 당연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던 양반들에게 불리한 세금 체계였다. 양반들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혀 겨우 100년만에 전국적인 실시가 가능했을 정도였다. 입만 열면 청렴결백과 백성을 내세웠던 조선 양반들이었지만, 자신들의 이해관계 앞에서는 공론을 표방한 사론을 전개할 뿐 전란 대비는 뒷전으로 미루어졌던 것이다.

말만 앞선 사대부들의 공허한 논의는 병자호란 당시 풍전등화의 남한산성내에서도 여전히 이어졌다. 천도(天道)를 내세우면서 척화와 항전의 논리를 편 김상헌의 당당한 위엄은 때로는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그러나 주화파의 ‘왜 직접 나가 싸우지 않는가’라는 힐책에 ‘왜 나를 묶어서 적에게 넘기지 않는가’라는 반문에서 말장난의 공허함이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여진족은 여러 부족으로 갈라져 통합세력을 형성하기 어려운 유목민족이었다. 후금의 누르하치가 어려움 끝에 중원을 차지할 정도로 힘을 성장시킨 것은 임난 이후 대략 40여 년 만이었다. 이에 비해 임난 이후 조선의 40년은 치욕스러운 항복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같은 40년 동안 두 국가의 운명은 극단적으로 갈라섰던 것이다.

국민 복지 위한 양보·타협 정치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19대 국회가 저물고 20대 국회가 새로이 개원했다. 북핵과 브렉시트, 청년실업과 저출산·노령화, 혁신되고 있는 산업환경에의 적응 등의 대형 과제를 풀어 갈 리더십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대통령과 20대 국회에게 40년 후 국가의 운명을 염두에 두면서 당리당략을 앞세운 견제와 균형의 논리보다는 진정한 국민의 복지를 생각하는 양보와 타협의 정치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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