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이 사람의 풍경
금보성아트센터 제1회 한국작가상 수상한 작가 유휴열씨 "척박한 땅 생명력 불어넣는 잡초처럼…내 그림이 삶에 활력이 되길"되돌아봐야할 시점에서 큰 힘이 된 상 / 자만하지 않고 더 성실하게 걸어갈 것
김은정 기자  |  kimej@jjan.kr / 등록일 : 2016.07.14  / 최종수정 : 2016.07.14  22:35:55
   
▲ 금보성 아트센터 제1회 한국작가상 수상자로 선정된 작가 유휴열씨가 완주군 구이면 항가리에 위치한 모악재 작업실에서 작품을 보고 있다. 안봉주 기자
 

그의 그림을 만난 것은 80년대 초반, 인후동의 한 아파트 지하실에서였다. 햇빛 들지 않는 지하, 눅눅한 습기와 퀴퀴한 냄새가 가득찬 좁은 작업실에 강렬한 채색의 그림과 설치 작품이 꽉 차 있었다. 그때 주인 없는 그 작업실을 어떤 연유로 가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지만, 세상을 향한 날선 발언과도 같았던 익숙하지 않은 낯선 화폭들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이후로도 그의 작품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그때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작가가 새로운 정신으로 구현해내는 또 다른 작품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왜 그 시절 기억이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일까, 늘 그것이 궁금했다.

2014년, 전북도립미술관이 기획한 〈유휴열의 신명난 생·놀이〉에서 그 답을 얻었다. 도립미술관 전관을 다 채운 그의 작품들은 서로 다른 듯 보이면서도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였다. 입체든 평면이든 소재나 형식에 관계없이 그가 구현해내는 세계는 신기할 정도로 톱니바퀴처럼 그만의 세계를 견고하게 구축해가는, 그래서 그 생명력을 강하게 키워가는 생명체와도 같았다. 초기의 작업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화력 40여년의 시간이 빚어낸 성취, 유휴열만의 독창성이었다.

지난 봄, 서울의 한 미술관이 제정한 미술상(금보성아트센터의 한국작가상)에 미술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1억 원이란 상금 규모도 그렇지만 60세 이상의 작가를 대상으로 수개월동안 10여명의 평론가들을 동원해 후보들을 대상으로 작업실 현장까지 찾아다니며 작가와 작품을 평가하는 과정을 통해 수상자를 선정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지난 6월 말, 금보성 아트센터는 제 1회 한국작가상 수상자로 작가 유휴열씨를 선정했다. “ ‘우리다움’을 통해 찾아낸 ‘우리 것’을 보여주는, 그리하여 비로소 한국의 상징으로까지 존재하는 대(大)작가의 탄생을 염원”해온 아트센터가 찾아낸 수상자였다.

선정의 이유는 명쾌했다.

“천년 도시 전주에서 현대미술을 상징한 한국작가상으로 유휴열 작가가 선정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역사와 전통을 현대성으로 재해석하고, 놀이로 승화한 미학을 구축했던 것이 인정되었다. 전주의 특화된 한지라는 재료 대신 알루미늄 판이라는 현대 재료로 작업의 틀을 벗어났으며, 색채 구성 작가정신 등 모든 면에서 그의 밀도 있는 작품세계는 숨겨져 있는 보물 같았다.”

작가 유휴열씨(67)를 만났다. 완주군 구이면 항가리, 올해로 31년째 살고 있는 모악재는 2-3년 전부터 수장고를 늘렸다. 그 규모가 거대하지만 수장고 안은 셀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안채보다 몇 배 더 커 보이는 작업실 역시 벌써 근작들이 차있다.

인터뷰가 있던 날, 장대비가 여러 차례 쏟아졌다. 빗소리 때문일까, 여기저기 놓여있는 그의 작품들이 움직였다. 작가의 삶과 작품 이야기가 그 안에서 출렁였다.

-큰 상을 수상하셨습니다.

“감사한 일이죠. 혼자 정신없이 언덕배기 올라오면서 지칠 즈음 누가 등이라도 떠밀어 주면 오르는 길이 훨씬 가볍게 되잖아요. 제가 딱 그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 뒤를 좀 돌아봐야할 시점이 아닌가 싶었던 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자만하지 않고 천천히 뚜벅 뚜벅 갈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지요.”

-언제부터 심사를 했습니까.

“6개월 쯤 된 것 같아요. 여러 명 평론가들이 작업실을 다녀가면서 심사를 하더군요. 후보자를 세 명으로 압축하고 다시 두 명으로 압축해서 최종 선정하는 방식이었어요.”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워낙 많은 것 같습니다.

“초기 작품은 없어요. 20대 시절의 작품은 어느 해인가 모아서 불태웠고, 그 이후 작품은 84년에 미국을 다녀오니 아파트 지하실 작업실이 물에 잠겨 다 훼손되어버렸더라고요. 지금 갖고 있는 작품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전시실에 걸려있는 작품은 거의 근작들이겠습니다. 저 작품은 알루미늄이 소재인 모양인데 색을 거의 입히지 않았군요. 느낌이 참 좋습니다.

“욕심을 내지 않은 작품이 확실히 좋은 것 같아요. 담담하게 표현해내는 그런 작품이 길게 가더라고요.”

-욕심이라면 무엇인가를 많이 표현하려고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인가요.

“그렇죠. 아마추어와 프로가 다른 점이 바로 그 지점일 것 같은데, 붓을 떼는 순간을 아는 것이 프로가 아닌가 싶어요. 어디서 멈춰야 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때로는 보는 사람 몫으로 돌려서 무한한 상상도 할 수 있게 하는, 관객으로 하여금 비로소 완성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한데, 사실 그 지점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아요.”

-그동안 작품 변화가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작업에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궁금합니다.

“몇 번의 계기가 있었죠. 첫 변화는 82년에 파리를 다녀온 이후예요. 당시 파리에는 김창렬 이성자 이응로 선생님 같은 분들이 있었는데, 피악 등의 아트페어에 그 분들 말고는 우리나라 작가가 거의 없더군요.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이나 미국의 화단이 궁금했습니다. 파리에서 돌아온 직후 우연인지 일본의 갤러리에서 초대를 받았어요. 그 다음해에는 미국을 가게 됐지요.”

-그때가 80년대 중반쯤이었겠군요. 화력으로 보자면 그즈음이 가장 중요한 시기였군요.

“파리 일본 뉴욕의 경험이 제 삶에서 가장 크게 작용했죠. 오늘까지 이어진 그림의 핵이 될 만한 것들이 그 무렵 다 싹을 틔웠으니까요.”

-작가로서의 삶을 지켜가는 데에는 그런 계기들이 반드시 필요할 것 같습니다.

“미국은 마음먹고 떠난 유학이었어요. 정말 고생을 많이 했죠. 가져간 돈이 없으니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어요. 그래도 가장 의미 있는 동력을 그곳에서 얻었어요.”

-선생님 작업의 화두가 된 생놀이는 언제부터 붙잡은 주제였습니까.

“82년부터일 겁니다. 그때 삶은 놀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놀이의 개념이나 의미가 궁금합니다.

“간단한 개념인 것 같지만 제가 생각하는 놀이는 양면성을 갖습니다. 저는 굿이나 연희의 과정 속에 녹아 있는 놀이의 의미를 주목했습니다. 고통과 억압 자유로움 해방과 같은 전 과정을 놀이로 보는 것이죠. 한편으로는 모든 살아있는 것의 움직임이 곧 놀이라고 봅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작가들은 한번쯤 자신을 스스로 내려놓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주 중요한 시간이 되니까요. 저는 젊은 세대들에게 시야를 넓혀볼 기회를 꼭 만들라고 권합니다. 밖에 나가 뭘 보고 느꼈냐고 물으면 정작 펴 보일 것은 없지만 스스로에게 스며드는 그 어떤 것이 있거든요. 미술이라는 것이 얼마나 넓고 다양한 것인가를 확인하는 일만으로도 의미 있고요.”

-구체적으로 선생님은 어떤 변화를 얻었습니까.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모노톤 화풍이 유행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체질적으로 색깔을 쓰고 싶어서도 단색작가는 될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지인들에게 우스갯소리로 ‘나는 현대작가 못하겠다’고 했었어요. 작가마다 내재된 개성들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그런데 그런 개성들이 집단적으로 유행처럼 번지는 사조에 묶이는 것이죠. 그런데 밖에 나가보니 그런 선택이 얼마나 소모적인 것인가를 알게 되더군요. 제가 지향하는 세계를 더 단단히 구축해갈 수 있는 힘을 그때 얻었죠.”

-어느 자리에서인가 신석정 선생님과의 인연을 들었습니다. 스승이셨습니까.

“제가 북중학교에 다닐 때 신석정 선생님은 전주고에서 국어를 가르치셨어요. 북중과 전고는 같은 울안에 있어서 선생님들끼리 교류가 활발했죠. 그때 부모님이 학교 매점을 운영하셨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빵 굽는 기계를 들여오신 거예요. 미술시간에 그 풍경을 그렸죠. 선생님이 그 그림을 교무실 뒤에 붙였는데, 석정 선생님이 내려오셨다가 보시고 저를 부르신 겁니다. 그때 말씀이 ”중학교 2학년이 그리는 정물화는 대개 화병이나 과일을 그린 것이어야 하는데, 너는 아버지가 먹고 살기 위해 들여놓은 빵 굽는 기계를 그렸더라” 며 “아름다운 것은 그렇게 생활 가운데 있는 것이다”고 하셨어요. 그때 해주신 그 말씀이 지금까지 화두가 되었지요. 이후부터 대학의 실기 대회를 나가면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대학 안의 공사현장 같은 것을 그리게 되었어요. 관점 자체가 달라진 것이죠.“

-화폭의 변화는 외부로부터도 오지만 내부로부터도 오는 것 아닐까요. 선생님의 작품에서도 그런 변화가 보이는데요.

“큰 딸을 잃었을 때 그렇게 큰 충격이 없었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시기였는데, 그 시절 그림은 내가 봐도 암울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고통의 힘이 그림을 바꾸게 하는 동력이 된 것 같아요. 그 변화가 자연스럽게 오더군요.”

-모악산에 들어온 것도 또 하나의 기점 아니었을까요. 전업 작가로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그 힘이 아닐까 싶고요. 작업실에 놓여있는 누드크로키만으로도 엄청나더군요.

“이번에 심사한 평론가 한분이 우리나라 작가들은 대개 기본적인 것을 쉽게 놓아 버린다며 지금도 누드 그림을 날마다 그리는 이유를 묻더군요. 저는 비구상 계열의 작업을 하더라도 인체가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화면에 안정감 있게 구성하는 요소가 화면 구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봐요. 순간적인 것을 포착해 구사하는 능력은 늘 기본이 되어야하죠. 그런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언제부터인가 누드그림을 꼼꼼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어느 시기인가 타일 작업도 하셨는데요.

“2000년 즈음 일거예요. 당시 우리나라 조각품은 돌이나 브론즈 일색이었는데 돌은 너무 차갑고 브론즈는 침침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입체물에 색깔을 입히는 방식을 찾다가 타일 작업을 찾아냈어요. 파편을 구워서 붙이는 형식이었는데 그 후에 가우디의 여러 작품을 보고 나서는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가우디 아류도 안 되겠다 싶어 과감하게 때려 치웠어요.”(웃음)

-알루미늄 작업은 80년대 초반부터 시작했으니 오랜 작업입니다. 입체에서 평면까지 옮겨온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지금 사용하는 빗살무늬 판은 우리나라 전통 토기의 전통문양과도 같잖아요. 그런 특성도 있지만 이 소재를 선택한데는 더 큰 이유가 따로 있어요. 평면 작업에서 가장 큰 고민이 입체적인 표현의 한계거든요. 그래서 피카소도 옆에서 뒤에서 그리는 형식을 들여온 것 아니었겠습니까. 입체파라는 새로운 장르도 만들었고요. 그러나 그런 형식조차 평면이라는 이미지는 바꾸어지기 어렵죠.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어느날 이 빗살무늬 판이 빛을 받는 방향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 보이는 거예요. 평면에 붙여놓아도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혹은 빛이 어느 쪽으로 비치느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는 겁니다. 표현의 통로를 찾았죠.”

-선생님 작품은 큰 이미지 속에 다양한 언어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소재들을 찾는 것이 마치 숨은 그림 찾기와도 같습니다.

“제가 의도하는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이 한 화면에서 서로 어우러져 하나로 보이게 하는 그림이죠. 수덕사 현판에 만공 스님의 법어 한대목이 쓰여 있어요. ‘세계일화’죠. 법어를 제 식으로 쉽게 풀면 ‘꽃으로 피어나되 좀스럽게 니 것 내 것 가리지 말고 그냥 하나 되어 꽃 한 송이 피워내라’는 말씀일터인데 그 의미가 강하게 와 닿더라고요. 제 그림도 그런 메시지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세상의 다양한 언어가 조화를 이루어 한 화면에서 한세상 이루어지는 그런 세계. 더 깊게 고민하고 더 열심히 그려내야 이루어질 과제겠지요.”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열린 제 1회 한국작가상 수상 기념전 개막식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본디 잡초라는 것 중에서 괜찮겠다 싶은 것을 화분에 잘 올려 거름을 주고 사랑과 물을 주고 가꾸면 그것이 화초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화초가 그렇듯이 잡초 또한 아주 중요한 역할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그 척박한 황무지에 씨앗으로 뿌리를 내리고 그 척박한 땅을 숨 쉬게 해 그 위에 다른 많은 생명을 자랄 수 있게 하는 역할을 잡초가 합니다. 저는 촌에서 그림 그리면서 ‘그려 내 그림이 생명력을 가지고 잘 견뎌줘서 오래도록 잡초여도 좋겠다. 그 역할로 충분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 고개까지 왔습니다. 이제 어찌하다 화분에 올려졌지만 앞으로도 잡초의 역할을 잊지 않고 같은 길 열심히 걸어가겠습니다.”

작품을 빼 닮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앞으로 만나게 될 그의 〈생·놀이〉가 더 궁금해졌다.

   

● 유휴열 화백은

- '우리다움'통해'우리 것'보여준 한국 대표화가

작가 유휴열은 정읍이 고향이다. 소성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녔으니 그가 품고 있는 정서와 감성은 어린 시절, 그곳에서의 시간들로부터 이어졌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컸던 그는 늘 바깥세상을 동경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전주의 중학교에 합격한 형들 덕분에 가족 모두가 전주로 이사를 나오지 않았다면 ‘가출청소년’이 되어 지금쯤 다른 길(?)을 걷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풍남초등학교 4학년 때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미술반 교사는 늘 그를 옆에 두고 그림 심부름을 시켰다. 미술실기대회에 나가 상을 타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북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였다. 그에게는 특기가 또 하나 있었다. 탁구였다. 전국체전에 전북 대표 선수로 뽑혀 나갈 정도로 운동에도 능했다. 전주고에서는 탁구 특기생으로, 영생고에서는 미술 특기생으로 그를 불렀다. 부모님들은 전고를 권했지만,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영생고를 선택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전북일보에 ‘전국의 미술실기대회서 최고상만 10회 돌파한 천재소년’으로 소개될 정도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워낙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그는 2년쯤 꿇고서야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미술로 이름을 알린 대학들의 실기대회 최고상을 휩쓸었으니 대학 입학은 어렵지 않았으나 애당초 대학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에서 임용하는 강사제도로 중학교 미술강사가 되었다. 스무 살 갓 넘은 시절이었다. 3년 가깝게 강사생활을 하는 동안 친구의 아버지이기도 한 교장선생님은 그에게 대학 입학을 권했다. 야간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영생대(현 전주대)에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대학은 7년 만에 졸업했다.

작가로서의 삶은 질풍노도, 거친 파도 속에 놓여 있는 듯 보이지만 언제나 충만한 작가정신을 구현하는 일에 몰두해온 궤적은 빛나는 결실로 이어졌다.

82년, 개인전을 계기로 1년 가까이 파리에 머물렀다. 그때 그가 찾아다녔던 갤러리에서 만난 작가와 작품들로부터 큰 충격을 받았다. 광활한 대지 위에 서있는 듯 한 느낌은 그의 정신을 새롭게 일깨웠다. ‘생·놀이’. 그가 평생의 화두로 삼은 주제를 그때 만났다. 파리에서 돌아온 그를 일본 오사카 아마노 화랑에서 초대했다. 일본 미술인들과의 교류가 시작됐다. 84년, 작정하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하면서 열심히(?) 공부했던 1년 동안의 뉴욕생활은 작가로서 살아갈 수 있겠다는 용기를 갖게 했다. 내친김에 제대로 뉴욕에서 활동하고 싶었으나 서울의 아르코 미술관 초대전으로 귀국하면서 유학생활은 끝이 났다. 이후 수많은 개인전과 단체전, 기획전을 이어왔다. 1982년 전주 금하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을 본격적인 작품 발표의 장으로 치자면 올해로 34년, 전업 작가로 살아온 그의 활동은 국내외의 크고 작은 미술관 공간 안에서 쉬지 않고 이어졌다. 80년대, 전주에 얼화랑을 열고 지역 미술인들의 활동을 북돋으면서 청년미술상을 제정해 후배들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일에 나섰던 그는 지난해, 작업실을 겸한 미술관 모악재를 젊은 작가들을 위한 공간으로 내놓고 중단되었던 청년미술상을 부활시켰다.

마니프 국제아트페어 대상, 루벤스상, 예술평론가협회 최우수 작가상, 목정문화상, 전북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 부산 광주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삼성문화재단, 금호미술관, 한솔뮤지엄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올해 새롭게 시도되어 국내미술계의 화제가 된 금보성아트센터 제정 한국작가상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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