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③ 만마관과 풍남문 - 막을 건 막고 품을 건 품었던 '호남제일관'적의 침공 막기 위한 요새 '만마관' / 동학농민혁명군들은 만민평등의 꿈 안고 만마관 지나 풍남문 입성 / 정유년, 어려움은 막아내고 번영과 행복 맞는 해 되길
기고  |  desk@jjan.kr / 등록일 : 2017.01.19  / 최종수정 : 2017.01.19  22:39:55
   
 

“층층 성벽 굽은 보루 강을 베고 누웠는데 만마관을 지나오니 광한루 여기 있네

유수의 진영에는 정전 이미 묵히었고 대방의 나라 요새 예로부터 철벽이라

쌍계의 푸른 풀에 봄 그늘 고요하고 팔령의 만발한 꽃 전장 기운 걷혔네

봉홧불 들 일 없고 노래와 춤 성하거니 수양버들 가지에다 배 매고 머무노라.”

다산 정약용 선생이 남원 광한루에 올라 지은 시구에는, 그가 광한루에 오르기 전 지나왔다는 만마관이 등장한다. 과거 만막관이라고도 불렸던 만마관(萬馬關)은, 일만 마리의 말 곧 천군만마라도 다 막아낼 수 있다는 뜻의 관문이다. 지어질 당시 전주와 호남평야의 미곡과 재산을 약탈하는 왜적으로부터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해 지은 요새의 출입구였기에 그 의미와 더불어 중요한 곳 이었다. 왜적이 남원을 거쳐 임실 그리고 전주로 들어올 때 침공을 저지하는 1차 방어요새가 바로 이 만마관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약용의 시구 속 언뜻 스치는 만마관 이름에는 “봄 그늘 고요하고 만발한 꽃기운으로 전쟁 대신 노래와 춤이 성한” 노래 속 평안이 층층 성벽의 철벽 요새와 그 문인 만마관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고마움이 담겨 있기도 하다.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의 군사적 요새지역으로서 만마관은 축조시기와 기원에 대한 여러 주장들이 공존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동여지도> 17첩 4열이나 1872년 <지방도> 임실현지도 등 옛 지도와 문헌 그리고 최명희 작가의 소설 <혼불>에도 만마관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중기 전주와 완주 일대의 뛰어난 경치를 꼽은 완산승경(完山勝景) 32경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그 중요성과 역사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호남제일관(湖南第一關)이라고도 불렸던 만마관의 ‘관(關)’은 본래 문의 빗장을 가리켰다. 즉 빗장으로 문을 닫아서 “막을 사람을 막는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라에서도 관문 위에 성벽이나 대문을 세우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는데, 이곳은 “호남 제일”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수비적으로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남원 방면에서 전주를 향하던 길손들은 관문이 닫히면 문이 열리는 다음날 아침까지 문밖에서 하루를 지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만마관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이러한 길손들로 인해 관문 밖 마을에는 주막이나 여인숙이 성업을 이루었고, 병졸과 부대원들 거처를 중심으로 바로 아래 쑥재에 마을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문이 무조건 사람을 막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관문은 문(門)으로서 사람을 “지나가게 하고” 또 “통과하게” 한다. 농민들이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악랄한 행동에 저항해 일으킨 갑오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에서, 농민들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통과했던 길이 바로 이 만마관이었던 것이다. 농민혁명군은 그렇게 호남제일관을 지나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주성의 풍남문(豊南門)에 도착했다. 세워졌을 당시 명견루(明見樓)라고 불리웠던 풍남문의 명칭은, 한나라 고조 유방이 태어난 풍패를 빗대어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풍패지향(豊沛之鄕)으로 부른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 주요 성읍이나 산성에는 서울의 4대문처럼 4방문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전주성도 마찬가지여서 1389년 축성 당시 성의 동서남북 네 곳에 문루가 세워졌고 이중 남문을 풍남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앞서 만마관을 지나왔던 농민혁명군은 성 안의 백성들에 의해 활짝 열린 풍남문을 통과하여 전주성에 입성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비록 지금은 풍남문을 제외한 세 방향의 문들이 모두 사라져 이후 보물 제308호로 지정된 풍남문만이 남아 호남의 사통팔달을 기원해주고 있지만, 이처럼 관문은 때로는 막고 때로는 통과하게 하여 우리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과 함께 하고 있다.

만마관 이야기로 돌아오면, 만마관이 있던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 일대는 현재 제17호선 국도가 지나고 있다. 상관(上關)이라는 지명 자체가 관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남쪽에 있는 마을은 반대로 남관이 되었는데 모두 만마관이 있었기에 유래한 이름이다. 이처럼 이 지역을 대표했던 만마관은, 성곽이 도로를 지나고 있었던 까닭에 세월의 풍파속에 소실돼 성벽을 쌓았던 돌무더기만이 남아있다. 풍남문의 경우 조선시대 대화재를 겪고 근래에 들어 노후화되어 몇 차례 모습을 잃을 뻔 했음에도 복구와 보수를 거쳐 그 이름과 모습을 이어오고 있는데, 만마관과 주변 천연요새 지역 역시 과거 성곽을 쌓았던 형태로 복원할 수 있기를 기대해보게 된다. 이는 그 자리를 든든히 지키고 열어주었던 만마관의 모습과 함께 일대의 역사적 가치 및 문화적 기억을 함께 되살리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덧 첫 달의 절반을 지난 2017년 ‘붉은 닭’의 해인 정유년(丁酉年)의 의미 속에도 문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닭 유(酉)’자는 상형문자의 기원상 술을 빚어 담은 항아리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술 주(酒)’의 기본이 되는 글자이기도 하다. 한편 유(酉)의 상형자는 같은 십이지의 ‘토끼 묘(卯)’의 상형자와 함께 문(門)을 닮은 형상으로도 해석되는데, 유(酉)가 문이 닫혀 있는 형태인 것과 달리 묘(卯)는 문이 열려 있는 형상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태양은 묘방(토끼의 방향)인 동쪽에서 떠올라 유방(닭의 방향)인 서쪽에서 지기 때문에, 마치 관(關)과 문(門)처럼 열고 닫는 의미를 취한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정유년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함께 있어 왔다. 1597년 정유년은, 당시 임진왜란때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해이자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순신 장군이 남은 배 13척을 수습해 10배나 넘는 일본군을 물리치는 명량대첩의 대승을 거둔 해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300년 뒤 1897년 정유년에는 고종이 삼한(三韓)을 아우른다는 뜻의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로 등극해 이때 지은 국호가 대한민국의 모태가 되었지만, 반대로 그 해는 외세와 일제의 간섭 앞에서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2017년 우리가 맞이한 정유년 역시 세계사의 굵직한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탄핵의 여부에 달렸지만 프랑스도 대선이 예정돼 있고, 새로운 리더가 미국을 이끌게 되고, 의원내각제를 택하고 있는 독일과 네덜란드는 총선이 실시된다. 정유년의 유(酉)가 품고 있는 의미처럼, 결국 통과해야만 하는 중요한 지점의 관문으로서 반드시 막아야 할 재난과 국가적 어려움은 막아내고 번영과 행복을 맞아들이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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