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⑤ 동학농민혁명군 루트와 전봉준 공초-'평등 세상' 외치던 뜨거웠던 정신…유산계승에 힘 모아야
진영록  |  chyrr@jjan.kr / 등록일 : 2017.02.23  / 최종수정 : 2017.02.23  22:56:21
   
▲ 세월호 고래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일러스트레이터 석정현 작가의 ‘의연한 녹두장군’. 전봉준 장군의 재판장에서의 모습을 그렸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를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발표한 격문의 내용이다. 짧게 쓴 문장이지만 그 결의가 실로 절실하게 와 닿는 글이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3년째 되는 해이다. 고부(현재의 정읍)군수 조병갑(趙秉甲)의 수탈과 횡포에 항거해 발발했던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한 혁명이 되었지만 봉건주의와 오랜 억압속에 살던 농민들의 저항의식을 일깨우고 한국의 근현대사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대사건이었다.

역사의 전말은 이렇다. 어릴적부터 체구가 작아 녹두(綠豆)라 불렸던 전봉준 장군은 고창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고 여러 곳을 거쳐 살다 고부에 정착했다. 그런데 당시 고분군수 조병갑은 온갖 명목으로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 농민들을 착취하고 백성들에게 거짓 누명을 씌우는 등 폭정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정읍천 하류에 농민들이 잘 사용하던 보가 있었음에도 굳이 핑계를 만들어 “흉년이 들어도 만석이 난다”는 이름의 만석보를 쌓고 세금(水稅)을 거둘 정도였다. 민심을 파악한 조정에서 조병갑을 익산으로 전출을 시켰으나 쉽게 수탈을 일삼던 고부를 떠나기 싫었던 조병갑이, 조정에 손을 써 다시 돌아오면서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전봉준과 1000여 명의 분노한 농민들은 말목장터 감나무 아래에 모여 뜻을 같이 하고 관아를 습격했다. 옥을 열어 죄 없는 농민들을 풀어주었으며 곳간을 열어 세미(稅米)를 빈민에게 나누어주었다. 횡포를 상징하는 만석보를 파괴하고 만석보 혁파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관리들의 만행은 계속되어 전봉준과 농민들은 다시 봉기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각지에서 1만 여명의 동학농민혁명군이 봉기해 차례차례 관군을 격파했고 급기야 전주에 입성해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기까지 하였다. 비록 조정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이를 구실로 들어온 일본군이 관군에 합세하면서 결국 동학농민혁명군은 패배하였고 전봉준 장군은 붙잡혀 사형을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 전봉준 장군이 1895년 2월 27일 서울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서 관청인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이송되는 모습.

역사의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물이나 유적, 그리고 다양하게 남겨진 기록과 기억으로 전승되는 흔적 덕분이다. 고창에는 전봉준 장군의 생가터와 부친 전창혁이 아이들을 가르친 서당터가 남아있고, 정읍에는 전봉준 장군의 고택이 사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정읍의 동학농민혁명기념관 근처에는 우물물로 농민혁명군의 밥을 지어 먹여 동학농민혁명군 우물로 지칭되는 우물과 관아터도 있다. 만석보가 있던 터에는 설명판이 있고, 비문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된 만석보 혁파비엔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비각(碑閣)을 세워 놓았다. 말목장터의 감나무 역시 100년 이상 자리를 지키다가 2003년 태풍 매미때 쓰러진것을 보존처리하여 동학농민혁명전시관으로 옮겨놓았고 다른 감나무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기록물로써 대표적인 것은 체포 압송될 때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사발통문 그리고 전봉준 장군의 재판기록인 ‘전봉준 공초(全琫準 供草)’가 있다. 사진은 당시 한국에서 활동했던 일본 사진기사 무라카미 덴신이 촬영한 것으로 전봉준 장군이 1895년 2월 27일 서울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서 관청인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이송되는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안도현 시인은 이 사진에 대한 인상을 시(詩)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남겨 1984년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작가로 우리 곁에 있다. 1968년 정읍시 고부면에서 발견된 사발통문도 있다. 고택 마루 밑에 70년 동안 묻혀 족보 속에 있었던 이 사발통문은,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여 명이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이하 악리들을 제거하며 이어 전주감영을 함락시키고 서울로 직향할 것을 결의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추정된다.

‘문) 너의 성명은 무엇이냐? 답) 전봉준이오’

‘문) 나이는 몇 살인가? 답) 41살 이오’

‘문) 사는 곳은 어디인가? 답) 태인 산외면 동곡리오’

‘문) 직업은 무엇인가? 답) 선비를 업으로 삼고 있소’

   
▲ 재판기록을 담은 전봉준 공초

간단한 문답으로 시작된 ‘전봉준 공초’는 31일간에 걸쳐 5번 열린 심문에 275개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법정 심문기록이다. 법무아문의 관원과 일본영사가 함께 재판에 참여한 것으로 전봉준 장군이 의연하게 답한 과정을 볼 수 있다. ‘전봉준 공초’는 동학농민혁명의 의미와 전개 과정, 그리고 전봉준 장군의 사상을 이해하고 관련지점 및 인물에 얽힌 그의 심리와 고증의 기준이 되는 가치있는 고문서이다. 재판 후 사형판결을 들은 전봉준 장군은 ‘나는 바른 길을 걷고 죽는 자다. 그런데 역률(逆律:역적을 처벌하는 법률)로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고 개탄하였다 한다. 고종실록에 사형판결일만 나와 있고 집행일이 명시되지 않아 사형일이 판결 당일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경성신보, 시시신보, 동경조일신문 등에 전봉준 장군의 사형집행이 판결 다음 날인 4월 24일(음력 3월30일)로 기록되어 있다. 필사본으로 기록된 ‘전봉준 공초’는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 청포장수 울고 간다

전체 가사는 몰라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랫말은 우리나라 전역에 널리 퍼진 전래민요다. 그 노랫말에 나오는 파랑새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청나라 군사 혹은 푸른 군복을 입은 일본군인이라고도 하고, 전봉준의 성인 ‘전(全)’자를 풀어 ‘팔왕(八王)새’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부안출신 신석정 시인은 전북일보 1963년 9월 29일자를 통해 ‘갑오동학농민의 노래’를 발표했다. 1963년 정읍 덕천면에 있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 건립 당시 건립위원장인 가람 이병기 선생의 위촉으로 신석정 시인이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쓴 시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너 어이 나왔느냐/ 솔잎 댓잎 푸릇푸릇/ 봄철인가 나왔더니/ 백설이 펄펄 흩날린다/ 저 건너 청송녹죽이 날 속이었네.” 전원시인으로 알려졌지만 일제시대부터 저항시를 써왔던 신석정 시인의 면모가 돋보이는 시이다. 비록 실패한 혁명이 되었지만 평등한 세상을 꿈꾼 수많은 농민들의 염원은 민족 정신문화의 상징으로 우리 땅에 남아 있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을 기리고자 관련 지자체나 유관기관들은 유적을 보존·복원하고 관련 예술활동을 지원하고, 유적지 답사와 테마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 유산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루트로의 연결성과 정확한 고증에 따른 지원 그리고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 뜨거웠던 정신이 아직까지도 따스한 온기로 남아 있을 때 유산 계승에 힘을 모아야 한다. 평등사회를 꿈꾸며 나아갔던 동학농민혁명군의 발자취를 의미있게 복원하고 잇는다면 크나큰 자산이 될 것이다.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는 민족정신의 구간으로 올곧이 되살려 그곳에서 살아갈 힘을 얻고 환한 미래를 함께 그려보는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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