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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외출
어느 날의 외출
  • 기고
  • 승인 2017.04.1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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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인순

보드라운 햇살이 내리는 휴일 오후, 아지랑이에 실려 온 봄이 나른한 여유를 싣고 부유하던 날,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어디로 갈까 잠시 생각하다가 떠오른 곳은 고인돌, 정확히 말하자면 고인돌을 왕복하는 탐방 열차 일명 모로모로 열차를 타보고 싶어서 망설일 겨를도 없이 고인돌 유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자동차를 개조해 운행하는 탐방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마치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왜 나는 이렇듯 타는 걸 좋아하는 걸까? 아주 어릴 적엔 아버지 어깨에 올라앉아 무등을 타며 신이 나 했고, 놀이공원에서의 회전목마라든가 여러 가지 탈것들에 환호했었다. 특히 여고시절 학교 수업이 없는 날에는 걷는 것보다는 조금 나은 느린 전차를 타고 친구들과 함께 끝없이 떠들어대고 까르르 웃어대던 일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러 탈것이 흔치 않은 이곳에서 탐방 열차를 타려고 줄을 서있는 내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감돈다. 짧은 기다림 끝에 탐방 열차에 올라앉아 흔들거리고 있노라니 또 하나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 버스를 타고 등하교 하던 그 시절, 나는 늘 교복 상의 주머니에 옷핀을 꽂고 다녔다. 차장의 손에 떠밀려 겨우 올라탄 버스는 숨을 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승객들이 꽉 찼는데 그 사이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못된 손, 음흉하게 뻗어오는 치한의 손을 힘껏 찌르기 위해서였다. 그 시절엔 성추행법이라던가 여성을 보호할만한 특별한 법이 없었기 때문에 만원 버스를 타는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그런 방법으로 자신을 보호했었다.

싱그러운 풀 향이 코끝에 스치는가 싶더니 열차는 어느새 고인돌 유적지 앞에 다다랐다. 고인돌 중에서도 특히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고창 고인돌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이후 많은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청동기시대에 이미 취락을 이루고 생활하여 왔음을 엿보게 하는 이곳엔 내 키의 열 배는 됨직한 커다란 고인돌을 위시해 아주 작은 고인돌, 납작한 고인돌, 뾰족한 고인돌 등 각양각색의 고인돌이 산등성이를 휘감고 산재되어 있다.

가장 큰 고인돌은 어쩌면 그 옛날 천하를 호령하던 권세가의 것일지도 모르고, 가장 작은 고인돌은 빈한하지만 청렴하게 살았던 어느 선비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왕후장상일지라도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결국 말 없는 돌무덤으로 남아있을 뿐인 것을….

녹아내린 사연이 너무 많아/굽이굽이 감아 도는 산등성이에/이끼 낀 몰골로 오도카니 서있다/안간힘 쓰고 살았어도/후회뿐인 지난날의 상념들은/땀방울 떨군 들녘에 뿌려버리고/영원할 것 같던 시간이 정지되던 날/그 자리에 선채로 돌이 되었구나/내려놓지 못한 전생이 하도 무거워/구부정하게 선 너는/혼령들의 한숨소리 듣고 있는 것인지

희뿌연 하늘에 솔개 한 마리가 난다. 천 년의 세월을 지켜온 듯 크게 두어 바퀴를 돈 후에 선인들의 편안함을 확인했는지 산기슭 너머로 사라진다. 태고의 깊은 혼은 몇 천 년이 지났어도 살아 숨 쉬고 세계인의 보물로 찬란히 빛을 발하는데 일백 년 인생사 내 모습은 훗날 어떤 흔적으로 남아있게 될까? 어느덧 시간이 흘렀는지 싸늘한 바람이 볼을 때린다. 고인돌 사이를 오가던 관람객도 저마다 갈 길을 가고 그 자리엔 무거운 침묵만이 내린다. 부드럽던 봄 햇살도 어느덧 서녘 하늘로 잠을 청하고 삶에 대한 존경과 가치의 숭고한 정신을 떠올리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귀가를 서두른다.

△문인순은 대한문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무장면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문인협회 고창지부장과 평통자문위원, 고창군체육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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