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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세계 4대 혁명으로 승화
'4·19혁명' 세계 4대 혁명으로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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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4.1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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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춘택 4·19혁명 유공자
4·19혁명은 국민이 민주주의를 쟁취한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다. 그 주체는 해방이후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학생과 대학 교수 시민들이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은 부정, 불법으로 대리투표까지 구사하여 민주주의의 초석인 선거제도를 파괴하였다. 12년간의 장기 집권으로 민심이 이반되어 자유선거로 정권을 연장 할 수 없어서였다.

이승만 정권은 야당의 선거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책동을 다했다. 2월 28일 대구의 중고등학생들에게 야당의 유세운동에 참석하지 못하게 일요일에 등교를 하게했다. 이에 경북고 학생들은 결의문을 발표하고 봉기했다. “백만 학도여! 정의가 있는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생들은 이승만 정권의 불의를 물리치기 위해 나섰다.

3·15 선거일 마산에서는 투표 시작 전 투표가 이루어졌다. 민주 당원과 학생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들어가 사전투표를 확인 하려 했다. 경찰의 저지로 수 십 명이 부상 죽음을 당하였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학생복 차림의 시체가 떠올랐다. 남원의 김주열 학생이었다. 금지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봄 마산상고에 입학하러 가서 시위에 참가해 경찰의 총탄에 실종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 경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4월 18일 서울에서 고려대 학생 데모로 이어졌다. 4월 19일 조간신문에 보도되자 서울 시민과 학생들은 분노하여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부정 선거 없애라” 등 구호를 외치며 국회의사당을 거쳐 경무대로 향했다. 4월 20일에는 지방 대학, 중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나섰다. 당황한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사태를 진압하려 했지만 되지 안했다. 4월 25일 서울의 교수단과 시민이 합세하여 거리 데모에 나섰다. 나라 안은 이승만 장기 집권과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국민의 소리로 들끓었다.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4월 26일)하였다.

4·19혁명은 자유 민주 정의를 토대로 제2공화국이 탄생되고 내각 책임제로 되었다. 세계 3대 혁명인 영국의 명예혁명(1688년)과 미국의 독립혁명(1776년 7월4일), 프랑스의 자유 민주 이념 혁명(1789년)에 더불어 4대 혁명으로 추진되고 있다.

영국의 명예혁명은 전제정치를 단행한 제임스 2세를 추방하고, 윌리엄 공을 국왕으로 권리 장전을 제정했다. 이 조치는 의회를 중심으로 입헌군주제로 되었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경제적 불평과 과대한 세금요구에 견딜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 영국의 기성 지배체제에 편승한 식민지인들의 기득권 세력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에 미국 독립선언가 발표되어 자유와 독립이 이루어졌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로 자본주의 발흥기로 시작했다. 혁명의 원인은 3신분제로 제 1신분의 귀족과 제2신분의 승직 자들이 대 토지를 소유하고 관직을 독점하여 면세까지 했다 . 제 3신분의 농민은 봉건적 부담과 특권세력을 혁명으로 없애고 자유민주주의를 이루어 냈다.

1960년 4·19혁명은 서양의 3대 혁명처럼 신분계급이나 정치적 경제적 자리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 민주 정의의 정신으로 이루어진 혁명이었다. 근대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세계 최초의 민주혁명이었다. 2016년 12월 13일에는 여의도 국회의원 별관에서 원로 정치인들과 함께 4·19혁명이 세계 4대 혁명의 반열에 올라서야 하는 토론회도 있었다. 국민 모두가 4·19 혁명의 역사적 가치를 공유하여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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