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최진석의 노장적 생각
문명은 용기의 소산'사람'을 채우는 진실은 '모르는 곳'으로 덤비는 무모함에 있다
기고   |  desk@jjan.kr / 등록일 : 2017.04.24  / 최종수정 : 2017.04.24  23:13:32
   
▲ 송필용, 사유의 시선, 캔버스에 유채 72.7x53cm 2017.
 

인간이 삶을 꾸리는 하나의 무대는 ‘문명’과 ‘자연’이라는 두 개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장되어 있는 스스로의 법칙에 따르는 저절로[自] 그러한[然] 세계고, 문명은 인간이 그려 넣은[文] 세계다. 인간이 그린 세계를 문명이라고 할 때,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의도를 개입시켜 제조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을 제조하는 의도를 의지나 의욕, 욕망 혹은 영혼 등등으로 다양하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통괄하여 일단 ‘생각’이라고 하자. 그래서 각자 누리는 문명의 수준이나 내용은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의 그것들에 좌우된다. 나는 이것을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고 표현하였다. 당연히 앞 선 문명은 앞 선 생각이 만들고, 뒤따라가는 문명은 생각이 뒤따라간 결과다. 먼저 생각을 하여 문명의 새 길을 내는 일이 창조고, 창조의 의지가 발휘되는 일이 바로 창의다. 창의를 통해서 새로운 길을 열어 흐름을 만들면, 그것을 ‘선진’이라고도 하고 ‘일류’라고도 하며 선도력을 가졌다고도 한다. 이미 있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길을 열어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창의는 결국 삶의 영토를 확장하는 셈이다. 따라서 창의적인 인간은 영토를 확장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언제나 높은 자리에 올려 진다.

생각은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한다. 무엇을 만들거나 개척하려면, 그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 하는 것이 일정한 높이에서 초점을 맞춰 작동해야 한다. 높이와 초점을 맞춘 생각을 시선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왜 시선이 중요한가? 사람은 자신이 가진 시선의 높이 이상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기관이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시선은 삶과 사회의 전체 수준을 결정한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그래서 보통 일컫는 발전이나 진보라는 것도 사실은 시선의 상승이 이뤄낸다. 여기 있던 이 시선이 한 단계 더 높이 저 시선으로 상승하여 이루는 구체적 결과가 바로 발전인 것이다. 그런데, 이 발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지배하는 정해진 생각의 틀을 벗어나는 도전이 감행되어야 한다. 익숙함과의 결별이다.

『장자』의 「소요유」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혜자(惠子)가 위(魏)나라 왕으로부터 큰 박이 열리는 박 씨를 선물로 받아와서 뒤뜰에 심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라나 엄청나게 큰 박이 열렸다. 그런데 크기가 너무 커서 물을 담자니 무거워서 들 수가 없을 지경이고, 쪼개서 바가지로 쓰자 해도 납작하고 얕아서 한 방울도 담을 수가 없었다. 위나라 왕이 말한 대로 박이 크기는 컸지만 아무 쓸모가 없어서 부숴버리고 말았다. 헤자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장자(莊子)가 말했다. “그렇게 큰 박이 열렸다면 어째서 그 속을 파내 큰 배로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 놓고 즐기려 하지 않고, 납작하여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다는 걱정만 하셨소? 선생은 생각이 꼭 쑥대 대롱에 난 작은 구멍만큼이나 좁디좁군요.”

우리는 보통 익숙한 생각에 갇힌다. 혜자가 그랬던 것처럼 ‘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물을 담아 다니거나 쪼개서 바가지로 쓰는 일을 먼저 떠 올리고, 그 생각에 ‘박’의 용처를 제한해버린다. 이러면 ‘박’은 물을 담고 뜨는 기능에만 갇혀 그 이상으로 확장되기 어렵다. 갇힌 생각은 이처럼 갇힌 세계를 조성한다. 세계를 일정한 틀로 가두어버린다. 이미 있는 익숙한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우리는 부단히 새로운 환경을 접한다. 인간의 역할은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렸을 때 적절한 대응방안을 찾느냐 찾지 못하느냐로 수준이 결정된다.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으로 새로운 세계를 관리하려고 하는 일은 보통 누구나 하는 일이다. 새로운 영토를 확장하는 역할은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렸을 때 새로운 적응 방법을 찾아내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 이야기에서 예상 밖으로 ‘큰 박’은 이전에 대면해 본 적이 없는 새로 맞닥뜨리는 세계다. 기존의 생각에 갇혀있는 혜자는 이 ‘큰 박’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적응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가 혜자에게는 ‘없는 세계’가 되었다. 박을 깨서 새로운 세계 자체를 부정해버린 것이다. 장자는 새로운 세계에 맞는 새로운 적응 방법을 만들어 냈다. 창의가 일어난 것이다. 이제까지 세계에 존재해본 적이 없는 ‘박 배’가 탄생하였다. 바로 창조다. 이런 창조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장자가 ‘박’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일은 기존의 관념이 주는 무게감을 이겨낼 수 있는 단련된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못한다. 자아가 이념과 관념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단련된 상태, 사실은 이것이 모든 창의적 활동의 핵심이다.

창의는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이 부과하는 무게를 이겨내고 모르는 곳으로 과감하게 넘어가는 일이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에다 ‘과감’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가 있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은 일종의 모험이자 탐험이기 때문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곳’은 명료하게 해석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이상하고 불안한 곳으로 남는다. 그래서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위험한 곳으로 넘어가는 탐험과 모험의 여정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모든 창의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넘어가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철저히 탐험의 결과다. 장자의 ‘박 배’도 장자가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 아니라, 그의 탐험 정신이 만들어냈다. 그 탐험 정신은 장자를 여기서 저기로 성큼 건너가게 만들었다.

탐험 정신이 살아있는 문명은 강하다. 새로운 이론이나 지식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문명을 강하게 만드는가? 문명은 생각이 만든다. 생각이 문명을 통제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문명을 확장하고 통제하는 매우 효율적인 생각의 얼개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지식이자 이론이다. 앎의 체계인 것이다. 당연히 지식이나 이론을 생산하는 문명은 문명의 통제력이 클 수밖에 없고, 통제력이 큰 문명은 강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지식이나 이론을 수입하는 문명은 종속적이기 때문에 주도권이 없어 강한 면모를 보이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안다고 할 때, 보통은 그것에 대하여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앎을 매우 좁게 이해하는 것이다. 앎이 문명을 통제하고 확장하는 이론을 생산하는 기초인데, 앎을 이렇게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이론의 생산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론의 생산까지 보장할 수 있는 앎은 어떤 것에 대해서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고 몸부림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이 사는 무대는 ‘문명’과 ‘자연’으로 되어 있다. 문명은 인간이 만들고, 자연은 저절로 그러하다. 그래서 인간은 이 두 세계에 대해서 제대로 알면 지적으로 완벽해진다. 자연은 내장되어 있는 자연 그대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므로 인간은 그것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추면 되지만, 문명 세계는 인간이 계속 만들어 나간다. 어쩔 수 없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 혹은 아직 모르는 곳을 열며 나아간다. 이것을 장자는 「대종사」편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즉, “인간의 일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곳을 기른다.”(知人之所爲者, 以其知之所知, 以養其知之所不知) 장자에 의하면,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발버둥이 문명을 전개시키는 토대다. 이렇게 되면, 지적인 최고 단계는 엉뚱하게도 지식의 영역을 벗어나서 ‘태도’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확장성을 포기한 앎은 이론의 구축이나 생산까지는 엄두를 낼 수도 없다. 이론의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진보적인 선진 문명을 꿈꿀 수는 없다. 앎의 진보는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는 바로 그 ‘발버둥’이나 ‘몸부림’에 있기 때문이다. ‘발버둥’이나 ‘몸부림’은 지적인 영역 밖의 것으로서, 차라리 인격적인 활동이나 ‘태도’나 기질’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문명이 다른 문명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인 과학 기술 문명을 가졌다는 것은 그런 과학 기술을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상위의 지식과 이론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위의 지식과 이론을 가졌다면, 분명히 그들은 지적인 ‘발버둥’이나 ‘몸부림’을 훨씬 더 강하게 발휘하였을 것이다. 더 탐험적이었고 더 모험적이었을 것이다. ‘발버둥’ ‘몸부림’ ‘탐험’ ‘모험’이 없이는 새롭고도 높은 지식과 이론을 생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생각-지식-이론은 문명을 확장하고 통제하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다. 이런 것들이 세계를 새롭게 열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새롭게 열 때 인간이 발휘하는 능력을 ‘창의’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창의’는 인간의 능력 가운데 고도의 어떤 것이 분명하다. 절대 평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더 나은 삶을 도모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두들 창의력을 발휘하자고 서로 독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창의력이 나타나는 일은 그렇게 일반적이지 않다. 왜 그런가? 발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혜자로 살기는 쉬워도 장자로 살기 어려운 이유다. 보통은 창의력을 발휘한다고 하는데, 이는 틀렸다. 창의력을 기능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냥 해버리면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 듯이 창의력은 발휘하려 한다고 해서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창의력은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적으로 단련된 어떤 사람의 내면에서 튀어나오는 것이지 해보려고 맘먹는다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의력이 튀어나올 수 있는 내면이 준비되어있지 않으면 그것은 이 세상에 나타나지 못한다. 이렇게 하여 창의력은 기능적인 범위를 넘어서서 인격적인 문제로 바뀌어버린다. 결국 사람의 문제다.

장자가 지적인 상승과 확장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는 일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을 피력하고 난 후, 바로 이어서 한 말은 그래서 더욱 울림이 크다. “참된 사람이 있고 나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有眞人而後有眞知)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론이나 지식이나 관념이나 이념의 수행자에 제한될 수 없다. 그것들의 생산자이거나 지배자일 때만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을 채우는 진실은 차라리 ‘모르는 곳’으로 덤벼드는 무모함에 있다. 탐험이고 모험이고 발버둥이고 몸부림이다. 이것을 우리는 용기라고 말한다. 이렇다면, 문명은 사람이 발휘하는 용기의 소산일 뿐이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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