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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시래기 밥
추억의 시래기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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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5.0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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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두환

꽃샘추위가 물러갈 무렵이면 까칠한 입맛을 돋우는 소박한 음식이 있다. 한 그릇에 담긴 맛과 정감으로 기운을 돋아주는 게 있다면 시래기 밥이다. 어린 시절, 집집이 처마와 그늘진 곳에 무청이나 배추 잎을 말린 시래기를 매달아 놓고 겨울부터 초봄까지 배를 채워주었다.

긴긴 봄날 배가 고플 때면 어머님께서는 으레, 시래기밥이나 시래기죽을 내놓으셨다. 배고팠던 시절, 우리 가족을 켜켜이 지켜주었던 일등공신을 꼽는다면 단연코 시래기 음식이리라. 시래기는 나물 무침. 비빔밥. 된장국. 죽. 전 등을 만들어 먹던 식재료다. 물고기와도 잘 어울려 물고기 매운탕, 고등어 졸임, 추어탕을 끓일 때면 꼭 들어가야 하는 게 시래기였다.

옛날에는 허기진 배를 달래야 하는 구황식품이었지만 지금은 웰빙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시래기에는 비타민 A와 C가 풍부하여 항암작용과 면역력을 강화하고, 칼슘? 철분? 미네랄 등이 들어 있어 골다공증과 빈혈 예방에도 그만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시래기는 ‘조물주가 우리에게 내려준 보약’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죽(粥)을 즐겨 먹었다. 한문으로 죽을 풀어보면 활궁(弓)자 가운데 쌀미(米)자가 들어있다. 내 생각으로는 배가 불러야 활을 당길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나라에는 죽 요리가 수십 종이 있는데 곡물을 기본재료로 여러 가지 식품을 섞어서 죽을 쑨다. 쌀 이외의 곡물로 쑨 죽에는 율무, 녹두, 팥, 콩 등이 있고, 곡물에다 채소나 나물을 섞어서 쑨 죽에는 시래기, 콩나물, 방풍, 아욱, 호박, 등이 있다. 동물, 어패류, 견과류 등을 이용한 죽들도 있다. 부잣집에서는 보양식이었지만, 우리 집처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서민들에게는 배고픔을 달래주던 구세주였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너무도 가난했다. 산골 다랑이 논 몇 마지기와 산비탈 밭뙈기가 전부였다. 가축이라고는 소 한 마리와 돼지, 닭 몇 마리였다. 아버지는 남의 일을 하면서도 담배 농사에 전념하셨고, 어머니는 비탈밭을 일구면서도 누에치기에 몰두하셨다. 일곱 남매를 키우고 가르치느라 허리 펼 틈도 없었으니 얼마나 고달픈 삶이었을까? 오죽했으면 찬밥 한두 덩이를 시래기나 묵은 김치를 듬뿍 넣고서 끓여 놓은 죽으로 온 가족의 배를 채워야 했을까.

어느새 고희의 나이가 되고 보니 어릴 적 먹었던 시래기 밥과 시래기 음식이 생각난다. 시래기를 푹 삶아서 쫑쫑 썰어서 들기름 국 간장으로 밑간하여 양념이 배게 두었다가 씻은 쌀 위에 올려 밥을 지었다. 밥이 되는 동안 시래기 밥에 넣을 양념장을 만들어 놓았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지은 시래기 밥 위에 고소한 양념장을 넣고 비벼주시던 어머니의 기억이 새롭다. 또 한 가지 추억이라면 시래기나물 무침이다. 시래기를 충분히 삶은 뒤 깨끗한 물에 씻어 놓고 된장과 마늘 다지기를 넣어 조물조물 버무려 밑간을 한다. 촉촉하게 양념이 스며들면 대파를 썰어 넣고 들깻가루를 약간 뿌려 놓으면 끝이다. 투박하긴 했지만, 어찌나 맛이 있던지 지금도 입안에 군침이 고인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 했던가? 예전 같으면 옻닭이나 쇠고기, 돼지고기였지만 지금은 아무리 먼 곳이라도 시래기비빔밥? 콩나물비빔밥? 꽁보리밥 등 웰빙 음식이 있다고 하면 기필코 찾아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미를 그 누가 말릴 것인가.

이 좋은 시대에 우리 모두 팔팔하게 운동하고, 건강식품도 챙겨 먹으며, 아프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또 있겠는가?

△임두환 수필가는 〈대한문학〉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영호남수필문학회, 전북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뚝심대장 임장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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