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이 사람의 풍경
전주국제영화제 특별전 주인공 송길한 시나리오 작가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는, 발과 가슴으로 쓰고 만드는 것"
김은정 기자  |  kimej@jjan.kr / 등록일 : 2017.06.01  / 최종수정 : 2017.06.01  21:39:53
   
▲ 송길한 작가가 3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서울시 평창동 골목을 걷고 있다. 안봉주 기자
 

전주시 고사동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1층 전시실에서는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다. 지난 5월 6일 막을 내린 제 18회 전주국제영화제가 마련한 작가 송길한 특별전이다. ‘작가 송길한, 영화의 영혼을 쓰다’란 부제가 붙은 이 전시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원로작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수십 편의 영화가 한국영화사의 기록이 되어 관객들을 만난다.

전시실 입구, 기획자는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 ‘한편의 영화가 이룬 성취가 감독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가치의 장안에서 작가 송길한은 맹렬한 창작의지와 일관된 세계관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냈다.’

70년대 초반, 한국영화의 암흑기로 분류되는 이 시기에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70여 편의 영화로 그 자신 한국영화사의 굵은 궤적이 된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씨(77)를 만났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당선작이자 첫 영화 작품인 〈흑조〉로부터 반공영화의 상징적 이름이 된 〈짝코〉,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주목받았던 〈만다라〉와 〈씨받이〉를 비롯해 시간을 뛰어넘는 수십 편 역작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였던 그의 삶과 영화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인터뷰의 의도는 빗나갔다. 영화 이야기는 순조로웠으나 정작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은 가족사나 사적 공간의 이야기는 완곡하거나 단호하게 비껴가는 그의 화법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인터뷰는 편하고 즐거웠다. 늘 상대방을 살짝 긴장시키는 직설적인 화법이 그의 진정성을 온전히 전해주는 덕분이었다.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작가 송길한 특별전시를 기획했습니다. 전시를 둘러보니 시나리오 작가 40여년 세월의 무게감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73년 첫 작품부터 근작까지 모아놓고 보니 적지 않은 작품을 썼더군요. 돌아보니 분단과 독재와 치열했던 민주화 과정의 시간을 체험한 세대로서 영광이나 자긍심보다는 부끄러운 작업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나의 역사이니 감출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많은 작품을 임권택 감독님과 함께 하셨더군요. 원로배우 김지미씨 역시 80년대 대표작 대부분에 출연했었던데요.

“가족 같은 관계가 되었어요. 김지미씨와 내가 동갑이거든요. 임감독님은 그 이전에 만났지만 김지미씨와 나는 마흔다섯 살 이후 영화인생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서로 개성을 존중해주면서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마음을 모았고, 지금까지 큰 갈등 없이 같이 늙어 간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큰 축복이고 즐거움이고 행복입니다.”

-시나리오는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원래 문학도이셨습니까.

“중고등학교 시절 영화는 많이 보았지만 시나리오를 쓰겠다거나 문학을 하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가려고 했던 길은 사실 이 길이 아니었어요. 내 삶의 반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가족사가 길을 바꾸어 놓았죠. 그저 앞만 바라보고 살아오다 나이 60이 될 즈음 돌이켜보니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은 초장부터 가로막히고 궁극적으로 내가 하려고 했던 모든 것은 제어 당했는데, 결국 여기까지 왔으니 이 길이 숙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70년대, 시나리오 작가로 등단한 직후부터 놀라울 정도로 다작을 하셨더군요. 그만큼 글쓰기가 자유로우셨습니까.

“젊은 시절에는 무엇을 절제한다는 것에 익숙지 않았어요. 다만 분단민족으로서 안아야했던 사상 검열의 문제가 늘 무거운 과제였죠. 나의 30대와 40대 한국 영화의 생태 현장은 군부가 거의 장악하고 있었어요. 영화도 철저하게 사전 검열하던 엄혹한 시절이었죠. 참으로 어려웠어요. 예술은 자유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늘 감시당하고 있다는 강박 속에서 창작정신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었겠습니까.”

-작가로서 겪어야 했던 내적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이런 상황을 어떻게 피해나가느냐는 것도 또 하나의 예술이라고 생각했어요. ‘멋모르고(?) 읽히게 하되 그 안의 뜻은 잃지 말자’는 의도가 은연중에 담겨 있었고, 숨겨진 메시지를 담고자 했어요. 워낙 반골 기질이 있었는데 엄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그것을 들키지 않아야 하니 괴로운 시절이었습니다.”

-70년대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는데도 엄청난 양을 쓰셨습니다.

“생계를 위한 일이었으니까요. 거의 주문 생산하는 글쓰기로 작품을 냈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공장과도 같았죠. 그런 싸구려 글쓰기로 70년대를 보냈어요. 그러면서 문득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차라리 길거리에서 생선장사를 하던 튀밥장사를 하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양심적이고 나답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작가로서의 자존심이나 명예로움 이런 것은 아예 잊고 살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을 겪으셨으니 영화다운 영화에 대한 갈증이 더 컸겠습니다.

“그랬던 것 같아요. 임권택 감독님을 만난 이후 우리만의 고유한 작품, 세계적으로도 우리가 보여줄 만한 작품을 만들자는데 마음을 모았어요. 그런 과정에서 나온 영화가 〈길소뜸〉입니다. 분단국 영화로서 각광받았던 영화죠. 이어진 〈만다라〉도 그렇고요. 아쉬운 것은 우리가 당시 해외영화제에 대한 정보도 없고, 스킬도 부족해 우리 영화를 돋보이게 할 만한 전략이 없었다는 것인데, 어느 해인가 베를린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한국에 왔을 때 ‘그때 그랑프리는 〈만다라〉였어’라고 하더군요.”

-〈길소뜸〉이나 〈만다라〉는 한국영화사의 굵은 족적이기도 하지만 한참 지난 세대들에게도 주목받는 역작이지요. 80년대 사회적 이슈가 됐던 〈비구니〉는 어땠습니까.

“ 김지미씨가 왕성하게 활동을 하다가 한동안 영화계에서 물러나있던 시기가 있습니다. 〈비구니〉는 김지미씨가 그 휴지기를 딛고 재기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통로였고, 임감독님이나 내게도 의미가 큰 영화였어요. 당시 문을 연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에게도 창립 영화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지요. 사실 〈비구니〉는 김지미씨가 제안했던 영화였습니다. 원기획자라고 할 수 있죠. 어쨌든 이 영화에 대한 기대나 열망은 컸습니다. 나와 임권택 정일성 감독은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며 취재했어요. 동국대 승가대 학생들의 관심도 컸는데 그들이 제공해준 책과 자료로 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이 사람들을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강박감을 안게 되었지만 그만큼 제대로 해볼 만한 소재라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사회적으로도 큰 이슈가 되었었죠.

“당시 촬영이 5분의 1 정도 되었었는데 비구니들이 거리 시위에 나섰어요. 제작을 중단하라는 것이었죠. 여기에 맞서고 영화인들은 창작의 자유를 들고 나서고……. 그러다 법정까지 갔어요. 엄청난 사건이었죠. 결국은 영화사측이 제작을 포기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는데 안타까운 것은 영화의 본질이 왜곡되었다는 것이에요.”

-화제를 좀 바꾸겠습니다. 고향을 떠나신 지는 오래되었죠.

“대학에 가면서 떠났으니 50년대 후반인데 그래도 어머님이 계셨으니 자주 오갔습니다. 나는 고향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냉담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더구나 전주영화제가 만들어지면서 전주에 대한 애정이 더 뜨거워졌지요.”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선생님의 삶을 결정짓게 한 가족사를 짐작하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던 청년기의 좌절감이 오히려 글을 쓰는데 는 단단한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요. 시나리오를 쓰게 된 특별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한심한 시절이었어요. 조선일보사 옆에 동시상영을 하는 극장이 있었는데 빵값만 있으면 하루 종일 극장에서 영화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어느 날부터인가 영화 대사를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그 무렵 동아일보 신춘문예 공모가 났죠.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써서 응모했습니다. 당시 오영진 김정옥 선생이 심사위원이었어요. 신선했는지 습작도 안 해본 초짜의 글을 당선시킨 겁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면 삶이 달라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1년이 지나도록 찾아오는 사람 한명 없는 거예요.(웃음) 어느 날 찾아 오긴 했는데 〈흑조〉(신춘문예 당선작) 수준을(?) 좀 낮춰 영화로 만들자고 하는 거예요. 못한다고 했죠. 또다시 1년 정도 잠잠했는데 이번에는 제작자가 원작 그대로를 영화로 만들자고 왔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첫 영화 〈흑조〉예요.”

-신춘문예 작품이 영화화 되는 예는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겠습니다.

“그렇죠. 신춘문예는 우선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어야 하는데 그 당선작이 영화화 되었으니까요. 그 뒤로는 의뢰가 오면 무조건 썼어요. 주문 받아 원고를 써주는 소규모 공장을 차린 셈이었죠.”

-갈등은 없었습니까.

“왜 없었겠어요. 정신없이 10여년 지나고 보니 뭐하는 짓인지 싶었어요.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있었는데 80년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 내 삶이 비루하게 느껴졌어요.”

-그즈음 임감독님을 만나신거군요.

“영화제작사에 한동안 몸담았다가 그만두고 임감독님을 만나 10년 동안 10개 작품을 스트레이트로 만들었죠. 그 첫 작품이 〈짝코〉였습니다. 반공영화로 잘 만들었다하여 두 번씩이나 상을 받았으니 대표작이라 할 만하죠. 그런데 사실 그 영화는 단순한 반공물이 아니었어요. 소설 원작을 각색한 것인데 남북분단의 상황을 휴머니즘의 가치로 조명한 작품이에요. 당시에는 발상자체가 조심스러웠죠. 다행히 검열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 5분 정도 잘려나간 것이 전부였어요.”

-한국영화의 오늘을 어떻게 보십니까.

“머리로 쓰고 머리로 만드는 이야기들, 상업적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보면 상당한 수준이랄 수 있지요.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란 발과 가슴으로 쓰고 만드는 영화예요. 요즈음 영화를 보면 그래 저렇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다만 내 경우도 기교나 내러티브 같은 부문이 좀 더 젊고 싱싱해질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영화 제작 환경과 관련이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시스템 자체를 요지부동한 자본력이 뒷받침하고 있으니 모두가 각자 도생으로 그 그늘로 못 들어가 안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요. 영화 정신보다는 자본이 우선이 되는 환경은 씁쓸합니다.”

-독립영화 정신을 지켜가는 영화인들도 적지 않은데요.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 아닐까요.

“독립영화 저예산영화를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독립영화가 건강성을 지켜간다면 분명히 독립영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타 시스템에만 얽매여 큰 자본을 들이지 않고 저예산으로 제작한 영화라도 이야기의 질이 어떤 것이냐에 관객들이 따라와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세계 어느 영화사를 보나 소위 뉴웨이브라고 하는 것은 자본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신과 가치로 이어져 왔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그런 면들이 확고하지 못하죠. 그런 점에서 보면 전주국제영화제가 독립영화를 주목하고 지지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제자나 후배들에게도 그런 정신을 강조하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나 경계를 두고 예술영화만 하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상업영화도 알아야죠. 중요한 것은 어떤 정신으로 영화를 만드느냐는 것이니까요. 자신의 가치관, 지향점을 찾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영화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함께 고민하고 치유하고 북돋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그에게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시대정신을 담은 깊고 탄탄한 시나리오와 독립영화 정신을 가진 감독이 만나 좋은 영화 한편 만드는 일’이다. 뚜렷한 작가정신으로 구축한 세계로 한 시대를 지켜온 원로 작가를 작품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일,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 [송길한 작가는] 만다라·우상의 눈물·씨받이 등 80년대 한국영화 대표 거장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씨는 1940년 전주 교동에서 태어났다. 북중을 거쳐 전주고를 졸업한 그는 대학을 위해 서울로 갔지만 아직은 밝힐 수 없는 가족사의 굴레 때문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10대와 20대를 건너던 시절, 그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차라리 잘했다’는 어머니의 위로가 힘이 됐다. 대한석탄공사 시험에 합격하자 노무 행정직이 아닌 현장직을 선택했다. 강원도 도계에 탄광에서 채탄부로 일하다 광업소장의 권유로 행정직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서울로 다시 왔다. 특별한 직장을 얻지 못해 막노동부터 시장 공판장에서 지방에서 올라온 쌀을 내리고 올리는 일까지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서러운 시절이었다.

조선일보사 옆에 있던 코리아시네마 극장을 알게 됐다. 하루 두 번 동시 상영을 하는 영화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 어느 날부터인가 영화 속 대사를 외워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흑조〉를 응모해 당선했다. 2년만에 이 작품을 영화화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73년 발표한 〈흑조〉는 신춘문예 당선작이자 그의 첫 영화작품이 됐다. 이후 10여년 동안 시나리오 주문이 밀어닥쳤다. 무엇을 쓰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는 글쓰는 기계처럼 주문을 받고 생산하는 글쟁이가 됐다. 자성의 시간이 찾아왔다. ‘이대로 간다면 내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혹했던 80년대 초반, 임권택 감독을 만났다. 반공영화 〈짝코〉를 시작으로 의기투합, 시대정신을 함께 한 임 감독과 파트너가 되어 지금까지 가장 많은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만다라〉 〈우상의 눈물〉 〈안개마을〉 〈길소뜸〉 〈티켓〉 〈씨받이〉 등을 발표했던 80년대 그는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우뚝 섰다. 백상예술상과 대종상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화상이 그의 작품을 불러들였고, 주목받는 신인감독들에게도 그의 작품은 시대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2000년 전주국제영화제를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부집행위원장을 거쳐 지금은 고문을 맡고 있다.

2010년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 올리기〉를 끝으로 각색 작업은 중단되었으나 여전히 시나리오 쓰는 일에 마음을 두고 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한국영화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특별전을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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