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18-09-23 20:17 (일)
발랑 까지고 싶은 빨강
발랑 까지고 싶은 빨강
  • 기고
  • 승인 2017.06.13 23: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난 빨강이 끌려 새빨간 빨강이 끌려 / 발랑 까지고 싶게 하는 발랄한 빨강 ….’ 박성우 시인이 쓴 <난 빨강>이라는 시의 일부다. 시인은 수많은 색깔 중 하나인 ‘빨강’으로 ‘발랑 까지고 싶게 하는 발랄한’ 이미지를 시 속에서 재미나게 그려냈다. 빨강은 원초적이다. 빨강 불덩이 태양은 생명의 근원이다. 빨강은 신성한 권위의 상징이다. 괴테는 빨강을 ‘색의 왕’이라고 했다. 교황과 주교들의 귀여운 빵모자도 빨강이다. 은막의 스타들을 영화제에 이끄는 것도 빨강(레드) 카펫이다. 원수들이 의장대를 사열할 때도 빨강이다. 빨강은 사랑을 뜨겁게 달구는 심장이다. 사랑하는 그녀를 향해 불타는 사랑을 전달하는 데는 빨강 장미가 안성맞춤이다. 동가홍상(同價紅裳)이라 했으니 빨강은 또 아름다움 자체다. 매혹과 유혹의 색이다. 에로티시즘이다. 야해 보이고 싶은 여인들은 입술에 빨강을 칠한다. 빨강은 굳은 결의와 죽음을 상징한다. 과거 독립투사들은 거사에 앞서 손가락으로 혈서를 써서 결의를 굳게 다졌다.

노동자들도 파업 때는 임전무퇴의 정신을 가다듬으며 머리에 빨강 띠를 두른다. 사망하면 호적에 빨강 줄을 긋는다. 전과 경력 또한 빨강 줄이다. 빨강은 악귀를 몰아내는 신통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동짓날에는 빨강 팥죽을 쑤어먹는다. 서원이나 향교에는 빨강 문(홍살문)을 세웠다. 점집이나 사찰에서 발급하는 각종 부적도 빨강이다. 다가올 사고를 조심해야 하므로 빨강 신호등이 켜지면 자동차를 세워야 한다.

경기장에서 비신사적 행위를 한 선수에게 심판에 내미는 것도 빨강(레드) 카드다. 언필칭 악귀야, 썩 물렀거라다. ‘좌파’들의 ‘불온서적’도 ‘빨강 책’이라고 했다. 19금 도색잡지 또한 빨강 책으로 비유했다. 마녀사냥을 당한 사람에게 찍는 낙인도 ‘빨강(주홍) 글씨’다. 그림 속의 경고문도 아주 그냥 순전히 빨강이다. 담배 한 대를 맛나게 피우며 비탈로 꺾어진 ‘급커브길’을 지나다가 이렇게 빨강 일색인 경고문을 발견한 운전자는 과연 거기 적힌 대로 ‘천천히 운행’해서 ‘골재’나 ‘토사’가 ‘쏟아지지 않도록’ 더 조심하게 될까. 의문이다.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