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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편편상(片片想)
연꽃 편편상(片片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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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8.1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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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삶처럼 연꽃은 / 태어남, 성장과 죽음이 / 한 공간서 이루어지고
▲ 정군수 석정문학관장

백련을 보려고 ‘하소 백련축제’가 열리는 김제 청운사에 갔다. 폭염에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습한 날씨라 계속 에어컨만 켜고 갔다. 초입부터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백련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보였다. ‘화중생련(火中生蓮)’이라는 글귀가 여러 곳에서 눈에 띄었다. 행사장 안에도 ‘화중생련’의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이번 ‘하소 백련축제’의 주제인 것 같다. 그러나 과문한 탓일까? 선문답의 주제를 알아내기에 내 속된 지혜는 너무도 설었다.

연지에 핀 연꽃보다 사람의 숫자가 더 많은 것 같았다. ‘무량광전’ 앞에 설치한 무대에서 쏟아져 나오는 노래가 절집 추녀의 풍경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쓰고 백련지로 내려갔다. 거기에서도 연꽃과 우산꽃이 잔치를 벌리고 있었다. 나도 잔치의 행렬이 되어 연지를 돌았다. 옆 사람 우산의 빗물이 옷에 떨어져도, 흙탕물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튀겨도 눈을 흘기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길을 막아도 재촉하지 않았다. 이쪽 연지에서 저쪽 연지로 무질서의 행렬이 질서를 이루고 있었다. 시선만 부딪쳐도 거북해지는 세상에서 내가 얼마나 옹색한 마음으로 나를 가두고 살았는가를 알았다

한 바퀴를 돌면 갓 태어난 간난아이 손만 한 봉오리가, 두 바퀴를 돌면 동자스님의 합장한 손만 한, 세 바퀴를 돌면 목탁을 두드리는 주지스님의 손만 한 연꽃들이 층층이 키를 세우며 태어나고 있었다. 벌써 꽃잎이 다 떨어져 연실을 만들어가는 것도 있었다. 다른 꽃들은 같이 피었다가 약속이나 한 듯이 한꺼번에 지는데, 연꽃은 우리네 삶처럼 태어남과 성장과 죽음이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연지를 돌며 나의 머릿속에서는 ‘화중생련’의 화두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보는 연꽃은 모두 진흙 속에 피는데 (니중생련泥中生蓮), 어찌 불속에서 핀단 말인가? ‘화중생련’이란 성철스님이나 법정스님처럼 다비식의 불속에서 얻은 하얀 뼛가루 같은 구도의 삶을 이름인가? 이 거대한 담론 앞에 나는 연지에서 폴짝거리는 개구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자로 들어가 연잎위로 떨어지는 빗물을 보았다. 수천 마리의 새가 군무를 하듯 연꽃은 하늘을 향하여 날개를 펴고 있었다. 연잎에 지는 빗소리가 들렸다. 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늘에서 내려오다 연잎에 떨어져서야 비라는 것을 알았다는 듯, 연못 가득 좁쌀 같은 생명의 소리를 퉁기고 있었다

또르르 빗방울은 굴러 연잎 가운데로 모이고 있었다. 빗물이 고여 무거워지면 스스로 머리를 숙여 자신을 비워내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연잎도 모두 몸을 비워내고 있었다. 비우지 않고서는 다시 채울 수 없다는 듯 빗물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연잎은 빗물을 다 비워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몇 방울의 물이 남아 있었다. 차마 다 비워내지 못하고 남겨둔 것은 자신까지 버리지 말라는 계시가 아닐까? 자신을 버리면 세상에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비움과 남김의 역설을 물으며 청운사를 나올 때 쨍쨍한 햇볕이 청하산 언덕에서 초롱초롱깨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불볕더위 속에서 꼬부라진 할머니가 깨밭을 매고 있었다. 문득 저 할머니가 ‘화중생련’이 아닌가, 부질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차는 큰 도로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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