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⑨ 봉천역·오수역] 철길이 관통하는 ‘개와 사람의 시간’
전북일보   |  desk@jjan.kr / 등록일 : 2017.09.01  / 최종수정 : 2017.09.01  18:21:24
   
▲ 지난 8월 18일, 오수역 플랫폼에서 용산으로 향하는 무궁화호에 승객들이 오르고 있다. 김태경 기자


춘향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는 길.

조물주가 처음부터 이 땅을 길로 쓰라고 만들어놓은 듯, 좌우 양쪽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산맥이 늘어서며 춘향로를 호위한다. 섬진강 상류의 한 줄기인 둔남천이 옆에 바짝 붙었다.

철길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는 서편 산기슭을 훑으며 지나던 것이, 산지를 관통하는 터널 속으로 숨었다.

물론 무슨 지하철처럼 땅속으로만 달리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성수면을 지나 오수면으로 접어들자마자, 철길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서 얼굴을 내민다.


△ 봉천, 무역할의 역할

뜬금없게도, 6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는 다리 아래에 역이 하나 있었다. 생긴 것은 서울의 도시철도 역, 그러니까 대충 한 2호선 지상 구간 어디쯤의 역 같은데, 오가는 사람은 없고 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러고 보니 서울 도시철도 2호선에 ‘봉천역’이라는 역이 또 있었지. 아마 ‘봉천역’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그쪽 봉천역을 떠올릴 것이다. 한글로 써놓으면 같은데, 한자가 다르다. 이쪽은 ‘鳳泉’이고, 서울 2호선 봉천역은 ‘奉天’이다.

   
▲ 지난 8월 18일, 쓸쓸히 서 있는 봉천역사. 권혁일 기자

 

   
▲ 봉천역사 한쪽에서, 배롱나무꽃이 때마침 불어온 강풍에 흩날렸다. 권혁일 기자


공사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금속 가림막 앞에 ‘봉천역’이라 적힌 간판이 누워 있었다. 플랫폼으로 올라가려면 철문을 하나 통과해야 하는데, 원래는 있었던 맞이방 같은 시설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붉은 벽돌로 치장한 역사를 등지고 계단을 오르다 보면, 무채도의 콘크리트 구조물 속에서 혼자 맑고 푸른 빛을 뽐내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서대전·익산·전주방면’이라는 표지가 흥미롭다. 종착지가 ‘용산’이 아니라 ‘서울’인 점이.

 

   
▲ 가림막 아래 누워 있는 간판. 권혁일 기자

 

   
▲ 봉천역 플랫폼 아래 계단 구조물. 온통 콘크리트 빛이다. 권혁일 기자

 

   
▲ 봉천역은 사방이 이렇게 콘크리트 빛이다. 권혁일 기자

 

   
▲ 봉천역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길. 회색 콘크리트 속에서 홀로 선명한 빛을 띤 안내판이 인상적이다. '용산'이 아니라 '서울' 방면이라고 적혀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권혁일 기자

 

“(이 역이)지금은 어떤 역할이 있는 건 아니에요. 여객 수요 문제도 있고, 정차역이 점차 줄어든 영향도 있죠.”


바람이 세차게 부는 플랫폼 위에서, 조연호 오수역 시설관리반 선임장(48)의 말이 무덤덤하게 날렸다.

죽림온천역처럼 쌍섬식 플랫폼을 갖춘 선하역사 구조인데, 그래도 얼마간은 승객들이 이용했던 죽림온천역과는 달리 봉천역은 그런 기억조차도 없다.

   
▲ 봉천역 플랫폼. 원래 이 자리에는 버스정류장처럼 생긴(관촌역의 그것과 닮은) 승객 쉼터가 있었다고 한다. 권혁일 기자


2004년, 단선 시절 전라선에 있던 오류역과 봉천역을 합친 새 봉천역이 이곳에 들어섰다. 바로 전해인 2003년 열차를 타거나 내린 이가 오류역이 213명, 봉천역이 660명이었는데, 그러니까 둘이 합쳐도 연간 1000명을 못 넘는 신세였다.

훨씬 전에는 사정이 조금 나았지만(이를테면 1977년에는 오류역과 봉천역이 나란히 4만5000여 명의 이용객 수를 기록했다), 어쨌든 이용객 수로 ‘전라선 최하위권’이었던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별로 중요하진 않은 사실이지만, 서울의 ‘봉천역’은 지난 2016년 한 해 동안 약 840만 명이 이용했다.

그런 고로, 2004년에 여객 취급이 중단돼 버렸고, 새 역은 지어지자마자 버려지는 신세가 됐다.

   
▲ 지난 2004년 7월 14일, 폐쇄 전날의 옛 봉천역 모습. 전북일보 자료사진

 

   
▲ 지난 2004년 7월 14일, 무궁화호 열차 한 편성이 오류역을 출발하고 있다. 오류역은 다음날인 2004년 7월 15일에 폐쇄됐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삼각형 철도청 마크와 노랑+초록 기관차 도색도 이채롭다. 전북일보 자료사진

 

   
▲ 지난 8월 18일, 화물열차 한 편성이 봉천역을 지나고 있다. 철거된 역명판이 누워 있다. 권혁일 기자

 

   
▲ 열차는 기적 한 번 울리고 그대로 지나간다. 권혁일 기자

 

   
▲ 누워있는 봉천역 역명판. 권혁일 기자

 

   
▲ 열차가 들어온다, 봉천역 승강장으로. 그러나 저 열차는 멈추기는커녕, 눈길 한 번 주치 않고 지나간다. 권혁일 기자


원래는 관촌역에 있었던 것과 같은, 버스정류장처럼 생긴 시설도 있었다고 하고, 그 아래 벤치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흔적뿐. 역명판도 뽑혀서 측선 자리 쪽에 누워 있다. 시설물들이 그대로 방치돼 있으면 위험할 수 있어서 철거한 것이라 한다.

/권혁일 기자

 

△ “임실은 안 서도 오수는 선다”

오수면은 2010세대 4392명(2016년 통계 기준)이 사는, 임실군에서 임실읍 다음으로 인구가 많고 번화한 지역이다.

그 중심부는 둔남천과 오수천이 이룬 부채꼴 평야 지대에 있다.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이곳에 있던 오수역은 조선 후기까지도 전라도에서 내로라하는 규모였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오수역’은 철도역이 아니라 역참제의 역을 말하는 것이다.

둔남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 옥색 아치가 보이면, 거기부터가 오수면 중심부고, 이 다리를 건너면 2004년에 새로 지어진 새 오수역이 나온다.

   
▲ 지난 2004년 새롭게 문을 연 오수역사. 권혁일 기자



대명리 수로고개 초입 즈음에서 잠깐 마주쳤다가 헤어진 철길은 터널과 다리를 거쳐 오수역에 이른다.

산과 내를 일직선으로 질러가느라 철길이 지상 십여 미터 위에 떠 있는 탓에, 역도 꽤 높이 돋운 자리에 들어섰다. 오수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의견(義犬) 상징물이 옆에 함께 서 있다.

석재로 외장을 두른, 전형적인 2000년대 초 공공건물처럼 생긴 역사. 그 안 아담한 맞이방에서는 대부분 노년층인 승객들이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 오수역에 서 있는 의견상. 김태경 기자


새마을호 특실 등급인 남도해양관광열차가 플랫폼을 스쳐 쌩 지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용산 가는 무궁화호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오전 11시 50분, 용산행 무궁화호 도착을 5분여 남짓 앞두고 역무원이 플랫폼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열자 승객 10여 명이 줄을 지어 이동했다.

양순덕(74) 씨는 멀리 여행을 떠나듯 보따리가 한 짐이다. 두 손 무겁게 어디로 가는지 물으니 “서울 사는 아들 만나러 가는디, 필요하게 생긴 거 이것저것 챙겼다”며 웃음으로 답했다.
 

“여그서 태어나 이때까지 평생 살면서 기차 많이 탔지. 우리같이 나이 많은 사람들은 멀리 갈라면 기차가 편해. 화장실도 있응게.”

 

   
▲ 지난 8월 18일, 멀리 북쪽에서 달려온 남도해양관광열차가 오수역을 지나치고 있다. 김태경 기자

 

   
▲ 지난 8월 18일, 오수역 플랫폼에 용산으로 향하는 무궁화호 열차가 들어와 있다. 승객들이 열차에 오른다. 권혁일 기자

 

   
▲ 열차가 떠나갈 방향, 역무원은 안전 확인 중. 권혁일 기자

 

오수역에는 전라선의 무궁화호 등급 열차가 빠짐없이 멈추는데, 이는 임실역보다도 상·하행 4편씩이 많은 것이다.

2015년 한 해 오수역을 이용한 이는 모두 8만9305명. 같은 해 임실역은 7만3627명이 이용했다.

/권혁일·김태경 기자

 

△ 레일 잃은 옛 역사엔 추억만
 

“옛날엔 역이 커서 오수, 삼계, 지사면 쪽 사람들이 전부 이 역을 이용했죠. 지금도 많이들 이용하고요.”


옛 오수역사 인근 식당에서 만난 이해숙 씨(60)는 “임실엔 안 쉬는 기차도 오수에는 쉰다”며 이렇게 말했다. “오수면 사람들은 역까지 전부 걸어 다녔다”고도 덧붙였다.

이정표는 없었지만, 옛 오수역사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수면사무소에서 삼일로를 따라 북쪽으로 똑바로 걸어가면 금방이고, 오수초등학교가 바로 앞에 있다. 과연 걸어서 다닐 만한 위치다.

더 쉽게 가고 싶다면, 마을 초입에서 의견로를 타고 직진하면 그만이다. 이 의견로가 바로 옛 전라선 철길이 있던 자리다.

   
▲ 옛 오수역사. 권혁일 기자


식당 맞은편에서 만난 김균자 씨(59)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오수역 원주민’이다. “아버지가 철도와 관계된 일을 하셨다”고 했다.
 

“저 식당이 사택이었어요. 관사. 일본 사람들이 지어놓은 우물도 있었고. 옛날엔 ‘사쿠라 나무’도 많았어요. 나무 올라가서 노는 애들도 많았지. 역무원들이 무임승차자 잡으러 뛰어다니던 풍경도 생각나고.”


‘사쿠라 나무’는 벚나무다. 김 씨는 “사실 어렸을 적엔 ‘사쿠라 나무’랑 ‘벚나무’가 다른 것인 줄 알았다”며 웃었다.

   
▲ 김균자 씨가 말한 '옛 관사'. 일본식 목조 건물의 뼈대에 살갗을 덧댄 구조다. 권혁일 기자

 

   
▲ 김균자 씨가 키우는 강아지들. 김태경 기자


김 씨는 기차가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들리면 “준비, 땅!”을 외치며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는 하교하는 오빠를 마중하러 달려가곤 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어린 날 김 씨는 저녁노을을 배경 삼아 오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옛 오수역사는 고요했다.

1931년 전라선 전주~남원 구간이 개통될 때 처음 문을 열었다가, 한국전쟁 중에 소실된 것을 1958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있는 이 건물은 내년이면 환갑을 맞는다.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벽 위에 ‘오수역’이라는 간판과 옥색 지붕이 올라가 있었다.

한쪽에 ‘오수자율방범대’라고 쓰인 간판이 함께 걸려 있었고 같은 글자가 쓰인 차량도 한 대 주차돼 있었지만, 역사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나가던 주민이 “(방범대가)요즘은 활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옛 오수역사. 권혁일 기자

 

   
▲ 오수역 앞에는 나무가 한 그루,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정자에는 선풍기가 놓여 있었는데, 취재진이 방문한 8월 18일이 매우 더웠기 때문인지 정자엔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권혁일 기자


기차가 다닐 적에는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였을 앞마당에는 마을 주민이 널어둔 듯한 곡식들이 한여름 햇볕을 만나 바삭바삭 마르고 있었다.

이제 더 사람이 떠날 일도, 돌아올 일도 없는 이 건물은 사람들의 온기 대신 먼지와 거미줄로 채워져 있다. 낡아 여기저기 금이 간 벽면과 뜯어져 나간 천장만이 지나간 세월의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 뒤편에는 매끈한 아스팔트 도로와 인도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초가집 식당들이 자리하고 있다.

주민들이 열차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을 나무 벤치와, 한때 여러 소식을 전했을, 옛 삼각형 로고와 ‘한국철도’ 표식이 붙어 있는 게시판, 이용객들이 열차표를 샀을 구멍 뚫린 창 정도를 제외하면 철도와 관련된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건물 한쪽엔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 옛 오수역사 입구에서 옛 플랫폼 방향을 바라본 모습. 권혁일 기자

 

   
▲ 지난 8월 18일, 옛 오수역사 내부가 텅 비어있다. 권혁일 기자

 

   
▲ 길 건너편, 그러니까 옛날 플랫폼이 있던 방향에서 바라본 옛 오수역사. 권혁일 기자


임실군청은 별다른 보존·활용 방안을 세워놓지는 않은 모양이다.

군청 관계자에 따르면, 오수역 이전 이후 옛 오수역 부지는 매입했지만 건물은 매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익산시가 나서서 옛 물건들을 보존하고 각종 사진 자료와 지역 주민 구술 채록 자료 등으로 꾸민 춘포역과 비교하면 좀 아쉬운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김균자 씨는 “오수역에 대한 추억을 가진 사람이 많은데, 레일도 없어지고 관리도 잘 안 돼서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 2004년 7월 14일에 촬영된 옛 오수역 모습(좌·전북일보 자료사진)과 같은 자리에서 촬영된 2017년 8월 18일의 모습(우·권혁일 기자).
“레일을 다시 놓을 수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기서 가까운 서도역과 어떻게 연계할 수는 없을지… 곡성역처럼요. 오수역이 살아있는 역이 됐으면 좋겠어요. 잊히지 말았으면.”


/권혁일·김태경 기자

 

△ 오수義犬, 오수의 犬

오수 주민들의 ‘애견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듯 보였다.

오수역의 어제와 오늘을 사이좋게 둘러보고 돌아가는 길, 오수교를 지나 오수공용버스정류장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정미소 건물에는 개 캐릭터 벽화가 저마다 개성을 뽐내고 있다. 여기도 개, 저기도 개, 전부 개다.

   
▲ 오수면 중심부로 들어가는 길목의 풍경은 이렇게 강아지들이 수놓고 있다. 김태경 기자

 

   
▲ 담벼락을 수놓은 강아지들. 잠깐, 가운데 저 강아지는 좀 낯이 익다. 김태경 기자


고려 후기에 최자가 엮은 시화집 '보한집'에는 당시 김개인(金蓋仁)이라는 사람이 키웠다는 의로운 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김개인은 술에 취한 채 들판에 누워 낮잠을 잔다. 그러던 중 들녘에 불이 붙어 퍼지면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이 상황을 본 개가 냇가로 들어가 물을 적신 후 제 몸을 던져 그 불을 끈다. 그렇게 불길이 잡히고 김개인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지만, 개는 그만 지쳐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

이 같은 개의 충성심이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해져와 많은 이들에게 진한 감동을 새겨준다.

‘오수(獒樹)’라는 지명도 이 이야기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주인이 개를 묻으면서 지팡이를 꽂아 두었는데,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큰 나무가 됐다는 이야기. 개(獒)와 나무(樹). 개의 충성심이 마을 이름까지 선물했다는 이야기다.


이 의로운 오수의 개의 명성은 오수면 곳곳에서 실감할 수 있다.

오수리 시장 옆 원동산 공원에 세워진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호인 의견비가 대표적인데, 이는 말 그대로 주인을 위해 제 한 몸 희생한 개의 충성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 아담한 공원 안에는 비석 말고도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의견 동상이 있는데, 두 앞발을 언덕 위에 '척'올리고 있는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그 기상에서 사뭇 비장함까지 느껴진다.

   
▲ 오수 의견비와 비각. 권혁일 기자

 

   
▲ 오수 의견상. 오수 개는 연구 결과 '티베탄 마스티프' 종의 혈통을 이어받아 한반도 남쪽에서 토착화한 것이라고 한다. 권혁일 기자


임실군문화체육센터 옆 오수의견공원도 빼놓을 수 없다.

연못 주변의 경관과 잘 어우러지는 여러 의견 동상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있다. 이름하야 전 세계를 아우르는 '주인 사랑 챔피언 견들'이다.

신라 시대 오수개, 영국의 보비, 일본의 하찌코, 알프스의 배리, 미국 알래스카의 발토 등. 저마다 제 주인과 아름다운 이야기보따리 하나씩 간직한 친구들이다.

   
▲ 오수 의견공원의 강아지 조형물. 권혁일 기자

 

   
▲ '파트라슈와 네로'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알래스카의 썰매개 '발토'다. 권혁일 기자


공원 바깥쪽으로 나와 의견교를 바라보며 천변을 따라 걷다 보면 강아지풀들이 반겨주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다리 초입에는 이제 오수에서 빠지면 서운할 개 석상도 양옆에 자리해 있다.

이 다리를 지나가는 도로 이름이 ‘의견로’다.

/김태경 기자

 

   
▲ 일러스트=이권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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