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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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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9.0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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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를 기억한다면 어찌 공영방송 사장들이 권력의 끄나풀이 되겠나
▲ 이재규 작가

MBC와 KBS가 4일부터 파업을 하고 있다. 오랜 시간 쌓여온 문제들이 터져 나온 것이라 그 결과가 어찌 될지 관심이 크다. 공공재인 방송사의 파업은, 주로 노동현장의 처우와 권리를 쟁점으로 벌어지는 여느 파업과 달리 언론의 자유와 임무라는 공적 ‘명분’을 놓고 대치선이 그어지기 때문에 시민들도 한 마디씩 거들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요 몇 년간 매일 거리에서 스스로 뉴스를 생산하는 즐거운 시민의 한 사람이었던 촛불정국의 몇 달을 제외하곤 거의 TV를 켠 적이 없기 때문에 “끔찍한” 방송 현실을 예전처럼 실감하지 못하고 살아 왔다. 꽤 알려졌다는 유명 앵커나 기자들도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어서 한 편으로는 속이 편안해지기도 했다. 나라 안팎의 소식이나 뒷담화들은 주로 페이스북 등 친구들의 입과 글을 통해서 들었기 때문에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어울리게 되는 친구 관계의 필터링으로 어떤 이슈든 ‘편파적’으로 수용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방송사의 일방적인 편집과 보도 시선의 수용자가 되기보다는 그 편이 훨씬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청한 편파인 셈이다. 나처럼 SNS가 갖는 미디어적 기능을 실감하고 사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래도 매스미디어가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가는 우리가 발 붙이고 살아가는 이 시스템에서 여전히 매우 중요한 공적 영역이 아닐 수 없고, 그래서 개인의 차원에서는 TV를 끄고 안 볼지라도 부단히 말하고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방송현실에 대한 자료와 주장들을 챙겨 읽는데 이럴 때면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진과 영상이 하나 있다. 불타는 방송사를 찍은 한 컷이다. 최근 많은 관람객이 밀려든 <택시 운전사>에서 그것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도 해서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광주시 궁동에 있던 광주문화방송 사옥은 5·18 민주화운동이 한창 진행중이던 1980년 5월 21일 밤 8시 40분경, 왜곡방송을 내보낸 데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불타버렸다. 황석영 작가 등이 광주항쟁의 나날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는 이 대목을 이렇게 썼다.

시민들은 혹시나 자신들의 운명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TV를 통해 방영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모두 열심히 시청했지만, TV에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연속극이나 오락 프로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한쪽에서는 죄 없이 같은 동포가 절규하며 죽어가고 있는데, 저 텔레비전의 다리를 흔들어대는 춤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배신감이었다. 시민들은 이제 어느 누구도 이 싸움이 더 이상 젊은 학생들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절감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감정들이 다음날 문화방송국을 불질러 버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985년판 77쪽.

MBC에서 방영한 <제5공화국>에서도 ‘불타는 광주MBC’라는 자막과 함께 “이날 밤, 언론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충격과 분노가 광주MBC를 불지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도통제로 재갈이 물린 언론은 광주의 진실을 은폐하고 있었고, 광주시민은 언론의 거짓말을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라는 내레이션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타버린 궁동 구 사옥은 5·18 사적지 제7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다른 용도로 쓰이는 건물 앞에 안내 표지가 서 있다.

그 화재로부터 37년이 지났지만 우리 방송은 그 현장에서 어디쯤 걸어온 것일까. 내가 방송사의 사장이라면, 기자라면, 매일 드나드는 사옥 현관 한중앙에 불타는 1980년의 광주문화방송 사진을 걸어두겠다. ‘그날’을 기억한다면 저토록 오만방자한 권력의 끄나풀이 여직 회전의자에 앉아 있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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