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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0.1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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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도 아니고 일제강점기도 아닌 지금, 농민 수탈이
▲ 정군수 석정문학관장

지난 9월 20일 제 19회 ‘지평선축제’가 김제 아리랑문학관이 있는 벽골제 행사장에서 열렸다. 들녘은 가을걷이를 기다리는 황금물결로 지평선을 이루고 있었다.

벽골제 행사에 참석하고 난 뒤 가을들녘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행사장을 빠져나와 들길로 들어섰다. 한 마장을 걷지 않았는데도 행사장의 소란함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민속농악경연대회의 풍악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눈이 모자라 못 본다는 김제평야는 나를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징소리 꽹과리소리 북소리가 하늘과 땅이 맞붙은 들녘으로 가뭇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들길을 걸으며 나그네의 낭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알았다. 달리는 차속에서 멀리 바라본 들녘은 풍요롭고 아름답기만 하였다. 생을 찬미하는 노래처럼, 푸른 초원을 그린 한 폭의 그림처럼 아늑한 정서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논 가운데서 만져본 벼이삭은 냉정한 이성으로 농촌을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 벼 포기에는 농민들의 힘든 삶이 젖어있었고 벼 알맹이에는 주름진 농부의 얼굴이 서려있었다. 조상 대대로 숙명처럼 참고 살아온 삶의 흔적들이 수그려진 벼이삭마다 새겨져 있었다.

이 길은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친 황토현 들녘으로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흰옷 입은 동학농민들이 달려갔을 길일 것만 같았다. 일어서면 백산이요, 서면 죽산이라는 농민군의 거점산성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의 할아버지도 논에서 김을 매다가 신발을 벗은 채 이 길을 달려갔을 것이다.

벼는 무엇이기에 이들에게 목숨도 마다하지 않고 동학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게 했을까. 벼이삭이 출렁이는 들녘으로 한없이 날아가던 꽹과리 징소리는 그들이 지어내던 울분과 탄식이 아니었을까. 들은 들로 이어지고 길은 길로 이어져 끝닿는 데를 모를 김제평야에서 나는 할아버지의 함성을 듣고 있었다.

여러 곳에 벼가 쓰러져 있었다. 벼는 쓰러져도 함께 쓰러진다는 것을 알았다. 벼는 어깨를 껴안고 같이 자라고, 쓰러질 때는 부둥켜안고 함께 쓰러진다는 것을 알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몸을 맡기고 쓰러진 벼를 보며 동학농민들을 생각하였다. 함께 일어섰다가 함께 죽어간 동학농민들. 벼와 함께 살아온 그들의 몸속에는 순박한 벼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벼 포기에는 아직도 그들의 굳센 어깨뼈와 마디 굵은 손가락뼈가 남아있었다.

벼는 아버지의 눈물이었고 한숨이었다. 벼는 아버지의 눈물을 먹고 한숨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지게를 지면 소가 먼 길을 가듯 말없이 걸으셨다. 한가위 대보름에도 아버지는 휘엉청 밝은 보름달 대신 한숨 같은 쭉정이를 지고 오셨다.

농경사회에서 농민의 비극은 벼의 수탈로 시작되었다. 양반과 지주와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그러했고,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가 그러했다. 그들에게 착취의 대상은 언제나 가난한 농민들이 피땀 흘려 거두어들인 벼였다. 그러나 조선사회도 아니고 일제강점기도 아닌 지금에도 벼의 수탈은 계속되고 있다. 인건비도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벼농사를 농민들은 지을 수밖에 없다. 농사는 천직이다. 농민들은 흉년에도 울고 풍년에도 운다. 흉년이 들면 쌀을 수입해오고, 풍년이 들면 재고량 운운하며 농민의 목줄을 죄는 것이 농수산 정책이기 때문이다.

내가 농민의 자식이라서 이럴까. 코스모스길이 아름다운 지평선축제장에 와서도 내 몸에는 아직 묽어지지 않는 농민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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