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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노을 - 김연주
기고   |  desk@jjan.kr / 등록일 : 2018.01.11  / 최종수정 : 2018.01.11  22:55:26
   
▲ 김연주
산책은 몸과 마음을 한결 가뿐하고 개운케 한다. 나는 가끔 황방산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산책을 한다. 그런데 매일 같이 다니면서 가끔 산의 모습이 다른 걸 느끼게도 한다. 여느 날과 달리 발걸음을 재촉하며 하산하는 산모롱이에서 서녘 하늘의 노을 지는 풍경을 만났다. 우연히 마주친 일몰의 풍광. 발걸음이 멎었고 내 가슴은 벅차올랐다.

서해의 낙조도, 망해사의 일몰도 아니지만 참으로 아름답다. 오늘 하루의 시름을 안고 산 너머로 떨어지는 또렷한 윤곽의 붉은 해,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모습이 아닌가. 지는 해가 가슴에 불을 놓는 듯하여 오늘 하루도 무사함을 감사하며 완전히 기울 때까지 바라보았다. 화가라면 한 폭의 그림으로, 시인이라면 한 편의 시를 남길 수 있을 텐데…. 노을에 사로잡힌 마음을 추스르며 내려오니 대지의 미물들은 귀가를 서두르라고 덩그런 조명들을 켜 준다.

일몰에 취한 나는 마음까지 노을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일몰인가, 일출인가 분간할 수가 없다. 절정에 달한 붉은 일몰을 보노라니 일출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우연히 볼 수 있는 일몰에 비해 일출은 기다림이 따른다는 것 외에 거의 같았다.

너무도 아름답게 내리는 낙조의 찬란함은 밝음의 끝이고, 어둠의 시작이다. 내일을 열기 위해 고요를 꿈꾸며 사라지려는 찰나다. 한 폭의 거대한 그림이 덮인다. 장편의 시를 읽은 것 같다. 이 순간을 홀로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구름밭 같기도 하고 해면 같기도 한 산 능선 너머로, 주황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노을 속으로 태양이 미끄러지듯 잠겨 버린다. 순간 서서히 어두운 빛이 내리기 시작하고 허정 무심한 마음이 된다. 산의 정적을 뒤로하고 차들이 숨 가쁘게 달리는 신작로로 내려왔다. 차들의 소음과 전조등이 얽히고설키는 대로를 향해 나왔다. 귀가를 서두르는 차들의 불빛 행렬과 아파트 빌딩 사이로 스러져 가는 노을빛이 번득인다.

인생의 황혼도 저처럼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풍경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새삼스레 내 인생의 황혼빛은 어떤 색깔일까. 생각해 보며 그저 꿈에 그리던 고고 지순한 삶이 어른거린다. 삶은 연습이 아니다. 정말 내 인생의 황혼에 서서 당당하게, 후회 없이, 아름답게 살았노라 말할 수 있을까.

어느 여름날, 후배의 시집 출간 기념 모임이 있었다. 뒤풀이로, 청운사 하소백련지에 다녀오는 길에 선생님의 노모를 뵈러 갔다. 가지고 간 시집을 드렸더니 책표지의 소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 “이건 그냥 노송이 아니다.”고 말문을 여셨다. 노송의 등걸과 가지마다 한 여자의 일생이 살아 숨 쉬는 게 보이시는 듯 “자식은 여자가 가르치는 거지. 노송 한 그루에 길이 있고, 자식이 있지. 어머니의 마음 씀씀이를 보면 자식들의 사람 됨됨을 알 수 있는 거야.” 소곤소곤 속삭이듯, 소나무 등걸을 마디마디 짚으신다. 그 모습이 꼭 친정어머니 같았다. 그림은 글을 쓰듯 그리고, 글을 그림 그리듯 쓰라는 말같이 책 표지만 보시고도 한 편의 수필을 줄줄 읊으신다.

요즘 노인들을 볼 때마다 ‘저게 바로 내 자화상이지’하고 생각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 느끼는 그 많은 자화상을 보며 스스로를 반추해 본다. 향기롭게 늙어 가는 선생님의 노모. 그 모습이 먼 훗날 내 모습이라면 좋겠다. 그러면 열심히, 멋지게 살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노을에 묻혀 집을 향해 걷는 동안 노을 덕분에 노년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김연주 씨는 교직에서 퇴직한 수필가·아동문학가다. 소년문학 신인상과 작촌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전북문인협회, 색동어머니 동화구연가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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