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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대중화 꿈꾸는 왕기석 명창 "판소리, 우리 시대 이야기 담는 소통과 감동의 그릇 되어야"
판소리 대중화 꿈꾸는 왕기석 명창 "판소리, 우리 시대 이야기 담는 소통과 감동의 그릇 되어야"
  • 김은정
  • 승인 2018.02.02 23:0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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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형님 따라 창극단 활동 / 소리길 이제 운명으로 정착 / 창극, 정통소리 부정 편견에 / 더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죠 / 판소리, 과거에 얽매여있어 / 창작물 더 많이 만들어져야 / 완창을 위한 완창 탈피하고 / 능력 갖추기 위한 노력 중요
▲ 왕기석 명창이 겨울비 떨어지는 전주한옥마을 김치문화관 처마 아래에서 소리를 하고 있다. 박형민 기자

차고 넘치는 재담과 타고난 목, 지칠 줄 모르는 소리 공력으로 우리시대의 판소리를 이끌었던 소리꾼,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를 만들어냈던 명창이 있었다. 70여년 공력을 소리에만 들이고도 정작 ‘득음’은 언감생심이라며 하루도 소리를 입에 붙이지 않고는 살 수 없고 ‘다시 태어나도 소리를 하겠다’고 했던 명창. 2003년 작고한 박동진 명창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5년, 아직 소리판은 그를 그리워하지만 그 뒤를 잇고 있는 소리꾼들의 대열이 그리 미약하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판소리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한국의 오래된 유산 판소리는 세계가 주목하는 유산이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판소리는 어디쯤 와있을까.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전통판소리와 판소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형식의 무대들은 대중들과 가까워졌을까.

오늘의 판소리 무대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왕기석 명창(55, 정읍시립국악단 단장)을 만났다. 크고 작은 창극 무대를 아우르며 자신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청중들을 기꺼이 찾아가는 우리 시대의 광대. 다른 사람보다 늦게 시작한 소리공부의 부족함을 타고난 재능에만 기대지 않고 노력으로 채워 끝내 오늘의 소리판을 대표하는 명창으로 우뚝 선 그의 길을 들여다보면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여덟 살에 연수단원으로 들어가 30여 년 동안 몸담았던 국립창극단을 떠나온 것이 2013년. 그는 이제 고향인 정읍과 전주를 중심으로 판소리 대중화를 이어내는 통로를 다양한 형식으로 실현해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판소리가 여전히 공간에 갇혀 있고 대중들의 일상에 놓이는 음악이 되기에는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판소리를 우리 시대의 음악으로 들여놓기 위해 누구보다도 깊게 고민하고 있는 그는 3시간 가깝게 이어진 인터뷰 동안 현실적 한계에 때로 좌절하고 때로 울분을 터뜨렸으나 결국 들려준 이야기는 판소리가 지닌 가치와 힘, 그래서 포기할 수 없다는 희망과 가능성이었다.

-지난 연말 바쁘셨더군요. 왕기철 명창과 ‘창극퍼레이드’까지 진행하셨던데요.

“해마다 연말이면 공연이 이어지는데 작년에는 특별히 기획된 공연도 많았고 개인적인 일까지 더해져 분주했었습니다.”

-정읍시립국악단에 오신 후로 자체 제작 무대도 그렇지만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창극 작품 출연도 눈에 띄게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에너지 넘치는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소리꾼으로 무대에 서는 일 못지않게 창작과 제작에까지 나서는 상황이니 앞으로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웃음) 개인적으로 버거운 일정이 되기도 하지만 내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자리는 가능하면 가려고 합니다.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바빠질 수 없게 되지요.”

-소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집안 내력이 있나요.

“부모님은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다만 아버님이 농한기에 사람들이 사랑방에 모여 있으면 책을 읽으며 들려주시고 소리도 한 대목씩 하셨는데 그 소리가 구수했답니다. 그리고 작은 아버지는 상여소리를 아주 잘하셔서 동네에서 선소리꾼을 도맡아 하셨답니다.”

-재능은 유전적으로 타고 나셨군요. 소리는 셋째 형님(왕기창)이 먼저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형님 덕분에 저와 바로 윗 형인 왕기철 명창이 그 길을 가게 되었어요. 기창 형님이 가족들보다 먼저 서울로 갔는데 박초월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했거든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형님은 라면 하나를 쪼개어 끼니를 떼우며 소리를 배우러 다니셨어요.”

-그렇게 지난한 길을 어쩌다가 함께 가시게 되었습니까.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사를 갔는데 생계가 막막했어요. 열네 살 즈음부터 온갖 일을 다 했지요. 그러다 국립창극단 단원이 된 형님을 만나러 갔는데 거기서 남해성 선생님 권유로 소리를 하게 되었어요.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는데 종종 들었던 형님 소리를 흉내 내 불렀지요. 선생님이 형님께 목이 좋으니 소리를 시켜보라고 하셔서 바로 연수단원이 되었습니다. 그때가 열여덟 살, 소리길이 제 운명이 되었지요.”

-형님이 국립창극단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가족들의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형제가 그 길을 가는 것에 반대하지 않으셨나요.

“아주 심하게 반대하셨어요. 바로 윗 형이 왕기철 명창인데 그 형을 기창형님이 먼저 서울로 끌어들여 박귀희 선생님 제자로 넣었거든요. 이미 두 형제가 소리를 하는 판에 저까지 나섰으니......”

-늦게 소리길에 들어섰으나 국립창극단 창극 작품에 대부분 주역을 맡으셨던데요. 타고난 재능도 그렇지만 대단한 노력이 더해졌을 것 같습니다. 첫 작품은 어땠습니까.

“당시 남자 단원들이 부족했어요. 덕분에 제가 일찍부터 주역을 맡을 수 있었죠.(웃음) 첫 주역으로 선 작품이 86 아시안게임문화예술축전 작품으로 제작했던 ’용마골 장사 ‘인데 저로서는 잊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첫 작품 말고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천명’도 그렇고 좋은 작품이 많죠. 그러나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은 첫 작품입니다. 허규 극장장님이 연출 하셨는데 본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재공연할 때 제가 연습시간에 늦었어요. 하루아침에 역할을 박탈당하고 무대 뒤에서 심부름을 해야 했어요. 며칠 지켜보시던 허규 선생님께서 ‘내가 당장 자를 수도 있지만 네 장래를 봐서 자르지는 않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부끄럽고 자괴감이 들어 사표를 써서 일주일 이상 가지고 다녔습니다.”

-어찌됐건 복귀는 했겠군요.

“저 때문에 속상해하시는 선생님들이 많았어요. 선생님들이 저렇게 가슴 아파하시는데 덜컥 그만둔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열심히 심부름을 했죠. 다행히 88년 서울 올림픽 문화예술 축전 때 ‘춘향전’을 공연했는데 그때 허규 선생님이 다시 기회를 주셨어요. 돌이켜보면 정말 감사한 일이죠. 늦게 소리를 시작했지만 어린나이에 주인공을 맡아 혹시 건방져질까 싶으니 한번 꺾어주신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그 이후부터는 비교적 순탄하게 길을 걸어 왔습니다.”

-창극단에서 형님과 함께 활동했다는 것도 특별한 경우 아닌가요.

“좋은 일이지만 제게는 큰 아픔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먼저 소리를 시작한 형님이 아픔을 겪게 되었거든요. 당시 창극단 오디션은 대단했습니다. 열 몇 명씩 탈락하는 일도 있었는데 어느 해인가 형님이 오디션에서 탈락하신 거예요. 통보를 받고 제가 형님을 모시고 가는데 버스 정류장에서 털썩 주저앉으시더라고요. 그때 ‘나는 형님 덕분에 소리를 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동생들에게 치어 빛도 못보고 이런 일을 당하는가’ 싶어 죄송하고 만감이 교차했어요. 형님은 이후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니 도배일 미장일까지 했지요. 다시 복귀는 했지만 또 시련을 겪으셨는데,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50대 초반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셨죠.”

-듣다보니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소리를 늦게 시작하셨고 정통 판소리가 아닌 창극 소리를 먼저 시작한 셈인데, 그 과정에서 혹시 갈등이나 개인적인 고민을 없었습니까.

“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창극단에 먼저 들어갔으니 창극을 위주로 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정통 소리를 공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주위에서는 왕기석 소리는 정통 소리가 아니라 창극 소리라는 얘기가 있었어요. 그 편견을 벗고 싶어 더 열심히 소리 공부를 했어요.”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당시 허규 극장장님이 당대의 명창들인 정권진 박봉술 정광수 강도근 성우향 오정숙 선생님을 모셔다 단원들을 대상으로 판소리 다섯 바탕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단원들 중에는 스승의 유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요. 다행히 저희 선생님은 여러 계보의 소리를 배우라고 권하셔서 다양한 소리를 섭렵할 수 있었어요. 저에게는 엄청난 소리가 되었죠. 돌이켜보면 제가 그나마 지금 이 소리로 버틸 수 있는 것은 그때 그 선생님들에게 배웠던 소리 덕분이에요.”

-전주대사습 도전도 ‘창극소리’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습니까.

“그 이유가 컸습니다. ‘창극소리만 잘하는 소리꾼’이란 편견도 벗고 싶었지만 정통 판소리는 궁극적으로 제가 온전히 감당해야할 과제였으니까요.”

-완창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거의 2년에 한번 꼴로 완창회를 갖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1994년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수궁가’완창을 처음 했어요. 지금까지 ‘적벽가’와 ‘심청가’까지 세 바탕을 완창했습니다. 세 바탕의 제가 다 다르죠. 사실 다섯 바탕을 다 배우긴 했는데 아직 완창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기회가 되면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완창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완창은 판소리가 사라져가는 시점에서 박동진 선생님이 시도하셨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판소리사가 새롭게 쓰인 셈이죠. 완창은 엄청난 시간을 쏟아야만 가능한 대상이지만 꼭 해내야 하는 과정이기도 해서 소리하는 사람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제가 생각하는 완창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완창을 위한 완창이라면 그 굴레에 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죠. 결국 중요한 것은 완창을 할 수 있는 능력이거든요. 그 능력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와 싸우고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노력과 그 노력이 이어내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소리의 공력을 갖추지 못했는데도 완창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풍토는 바뀌어야겠군요.

“소리는 평생을 해야 하는 길입니다. 죽을 때까지 공부해도 소리다운 소리를 못하고 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득음? 그것은 정말 함부로 불러서도 안 될 신성한 영역입니다. 득음은 신이 소리꾼에게 주는 가장 값진 선물이에요. 소리는 어떤 자세 어느 만큼의 노력으로 공부하느냐는 과정이 훨씬 중요합니다. 완창, 그 자체에만 의미를 두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요.”

-판소리가 대중화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하셨는데 가장 큰 과제가 무엇인가요.

“현실적으로 벽이 너무 높습니다. 국악의 많은 부분이 시대와 소통하면서 동시대의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유독 판소리는 과거의 전통을 앞세워 다섯 바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모든 음악은 그 시대에 맞는 음악이 되어야 합니다. 옛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법고 창신, 옛것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음악도 필요합니다. 기악만 해도 그 굴레를 많이 벗었는데 판소리는 여전히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시대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판소리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창작판소리가 많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창작판소리는 판소리의 본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치를 살려내는 그릇입니다. 전통 판소리 다섯 바탕도 따지고 보면 그 시대를 담은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우리시대에는 우리시대의 이야기를 담는 음악이 만들어져야 당연하죠. 형식도 그렇고요. 판소리가 누구나 불러보고 싶고 감동하는 그런 음악이 된다면 대중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지지 않겠습니까. 우리 시대의 광대는 우리시대의 이야기를 담아야지요.”

그가 지난 연말 대한민국예술원상 시상식 이야기를 들려줬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노력을 이기는 재능은 없다’ 고. 제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났어도 노력을 이길 수는 없다는 말씀인데, 저에게는 ‘그러니 죽을 때까지 소리다운 소리를 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인터뷰 말미, ‘그에게 판소리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나에게 판소리는 즐겁게 노는 일이다. 나의 판소리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잘 놀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광대로서의 목표이고 꿈”이라고 했다. 그의 노력으로 빚어지는 새로운 판소리가 우리를 잘 놀 수 있게 하는 판으로 불러낼 날이 머지않았다.



●왕기석 명창은

- 완창만 30회 돌파…창작 창극·판소리 제작 등 영역 확대도
 

왕기석 명창은 정읍 옹동이 고향이다. 6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세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병으로 잃은 큰 딸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았던 그의 어머니는 여덟 남매를 키우느라 생계에 쪼들리면서도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교육시키고 싶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열심히 공부해 성공하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역시 정규 교육으로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그가 다니던 초등학교 졸업생 60명 중 두 명이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는데 그 중 한명이 그였다.

그즈음 그의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했다. 중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당장 먹고사는 일이 힘들었던 가족들 사이에서 그는 어린나이로 노동판에 뛰어 들어야 했다. 열여덟 살 되던 해 소리를 만났다. 가족보다 먼저 서울로 가 국립창극단 단원이 된 셋째 형 기창씨 덕분이었다. 형을 만나러 창극단을 찾아온 그에게 남해성 명창이 ‘너도 소리 한번 해보라’고 권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형의 소리를 흉내내보는 것이 전부였는데, 안목 있는 명창은 ‘목이 좋은’ 그를 창극단 연수단원으로 끌어 들였다.

남해성 명창의 제자가 된 그는 창극단 연수 단원을 거쳐 1983년 창극단 정단원이 되었다.

다른 사람보다 늦게 들어섰지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좋은 소리꾼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 그는 남자 소리꾼이 부족했던 창극 무대에서 돋보이는 재목으로 성장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문화예술축전 참가작인 ‘용마골 장사’를 시작으로 ‘춘향전’ ‘심청가’ ‘천명’ ‘우루왕’ ‘서편제’ 등 150여 편의 창극무대가 그를 주역으로 불렀다.

덕분에 우리 창극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언제나 ‘창극소리 잘하는 소리꾼’으로만 분류되었다. 전주대사습놀이에 도전한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그는 결국 31회 전주대사습이 배출한 ‘명창’이 되었다. 창극무대에서만 빛나지 않고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도 그 이후부터였다. 한해씩 건너가며 이어온 ‘수궁가’ ‘적벽가’ ‘심청가’ 완창 무대는 30회를 넘었으며 2004년 독일 함부르크와 베를린에서 가진 다섯 시간 동안의 ‘심청가’를 시작으로 이어진 여러 차례의 해외 완창 무대는 한국의 판소리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추계예술대와 중앙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창작과 제작에도 열정을 쏟아 <어린이창극>의 영역을 확산하고 전통 판소리 다섯 바탕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내는 작업에 참여해왔으며 ‘논개’ ‘백범 김구’를 비롯한 창작 창극작품과 ‘전주사투리’ ‘녹두장군 비빔밥전’을 비롯한 여러 편의 창작판소리를 만들었다.

2014년 전라북도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KBS국악대상(2014), 대한민국문화예술상(2017) 등을 수상했다.

2013년 국립창극단을 그만 둔 뒤 고향에 내려와 정읍시립국악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가족창극> <마당창극> 등 다양한 형식의 창극 작품을 개발해 관객들과 만나는 판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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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라 2018-02-02 06:23:40
국악에 대해 잘 모르지만 물이 고이면 썩듯이 소비되지 않는 문화는 도태되어 사라집니다. 옛것만 고집하지말고 시대에 맞게 변화하세요. 국악이 외면받는건 국악인들의 보수적 행태때문이라고 봅니다. 판소리로 세상을 풍자할 꺼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정치적인것 사회적인문제 모두 풍자꺼리가 되지요. 세월호 제천참사 최순실국정농단 실업문제 등 이 모든걸 해학적으로 풀어내면 이시대가 가장 적극적으로 소비해 줄겁니다.

ㅁㄴㅇㄹ 2018-02-14 15:11:25
이러니 국악이 망하지 일단 국악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아요 시각적 활자나 그림등을 통해서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플어내야지 고어로 고래고래 소리 들으면 누가 듣습니까? 시대에 맞게 변하지 않으면 그냥 사라지는 게 맞는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