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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가야 디지털콘텐츠 워크숍] "장수가야, 백제와 힘 겨뤘던 가야문화권 중심이었다"
[장수가야 디지털콘텐츠 워크숍] "장수가야, 백제와 힘 겨뤘던 가야문화권 중심이었다"
  • 김보현
  • 승인 2018.02.21 2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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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유일 봉수 운영 장수 '반파'였을 가능성 커 / 대적골, 체계적인 철 생산 이뤄졌던 제철유적지
▲ 조명일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 연구원이 20일 장수 한누리전당에서 최근 발굴조사를 시작한 ‘장수지역 산성 및 봉수 현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동안 지표조사로 추측만 했던 ‘봉수 왕국 장수가야’가 고고학적으로 입증됐다. 당시 백제와 힘을 겨룰 만큼 강했던 가야문화권의 중심이 대가야가 아닌 장수가야라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됐다.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소장 곽장근)와 성결대 창의문화공작소(소장 윤영훈), 전주대 글로컬창의학과가 주최해 20일 장수읍 한누리전당에서 열린 ‘장수가야 디지털콘텐츠 워크숍’에서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 연구원들이 최근 가야 유적 발굴 현황에 대해 발표했다.

‘봉수·철의 왕국’으로 불리는 장수가야는 오늘날 장수·장계분지를 중심으로 72개소(현재 밝혀진 개수) 봉수가 분포하고 주변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봉수로가 형성돼 있다. 봉수는 변방에서 발생한 병란 등을 빠르게 중앙에 알리던 통신제도로, 그 자체가 독자적이고 강력한 국력을 증명한다.

장수 일대의 봉수는 그간 장수가야 때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실체적인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최근 봉수 발굴을 시작한 결과, 영취산 봉수와 봉화산 봉수 등의 외곽 석축에서 가야 고분에서 나온 토기와 같은 유물이 출토됐다.

조명일 연구원은 이를 토대로 가야문화권의 중심은 장수가야였다는 주장에 힘을 실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513년부터 백제와 반파가 기문과 대사를 두고 대립했으며, 이 과정에서 반파가 봉수를 쌓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기문은 남원 운봉가야인 걸로 학설이 모아졌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강력한 국가였던 백제와 봉수를 쌓으면서 대립했던 ‘반파’는 어디일까요?”

그동안은 ‘반파’가 대가야라는 게 정설이었다. 하지만 봉수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다. 금관가야, 대가야 등 가야문화권에서 봉수가 발굴되고, 이를 운영했던 세력은 ‘장수가야’가 유일하다. 또 기문(남원 운봉)과 인접하고 봉수로가 하나로 모아지는 중심지가 장수인 것도 ‘장수가야’가 ‘반파’임을 뒷받침 한다.

조 연구원은 “백제의 웅진 천도 직후 혼란한 시기를 틈타 봉수제를 운영하면서 주변 지역으로 확장하려 했을 것으로 추측한다”며, “장수가야는 강력한 정치체였다”고 말했다.

유영춘 연구원도 제철 유적지 발굴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대적골은 제철유구의 잔존현황, 제철로의 구조, 퇴적구의 규모 등을 통해 높은 기술이 필요한 제련공정(철 생산)이 이뤄졌던 곳이다”며, “동시에 이를 가공해 완제품(철제솥)을 생산, 관림 감독하는 공간도 발견돼 하나의 유적에서 체계적인 제철공정이 이뤄졌음을 파악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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