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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등 주최 ‘호남 3·1운동’ 토론회 내용] "호남 3·1 독립운동, 일반 주민 자발적 참여가 가장 큰 힘"
[전북일보 등 주최 ‘호남 3·1운동’ 토론회 내용] "호남 3·1 독립운동, 일반 주민 자발적 참여가 가장 큰 힘"
  • 김원용
  • 승인 2018.03.22 1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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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화 연구위원 “만세 운동참여자 찾아 역사물로 꼭 기록해야”
성주현 연구교수 “천도교, 도내 3·1운동 주도 관련 연구는 사실상 전무”
최성미 임실문화원장 “임실, 전국서 가장 활발 박준승 등 투쟁 전개해”
▲ 지난 15일 임실문화원 대강당에서 열린 1919년 3·1운동 학술강연회 모습.

호남지방 3·1 독립운동은 일본 자료대로 과연 타지방에 비해 소극적이고 미약했는가. 전북지역 3·1운동에서 천도교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 임실지역에서 3월 만세운동이 활발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소충사선문화제전위와 독립운동가박준승기념사업회, 전북일보 등이 공동으로 지난 15일 임실문화원 대강당에서 마련한 3·1운동 학술강연회는 이런 의문에 답하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내년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지방사적으로 아직 연구가 미흡한 상황에서 이날 강연회는 전문연구자들의 연구물을 토대로 한 것으로, 전북지역 3·1운동사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날 강연회는 이명화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의 ‘1919년 3·1독립운동의 배경과 호남 3·1운동의 전개와 성격’, 성주현 청암대 연구교수의‘전북지역 천도교와 3·1독립운동’, 최성미 임실문화원장의‘임실의 3·1독립만세운동’ 발표로 진행됐다. 김명성 KBS전주방송총국 방송문화사업국장과 김원용 전북일보 선임기자가 토론자로 찬석했다. 강연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

△호남 3·1운동의 전개와 성격

호남지방은 19세기 말부터 일제 식민지시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일본의 경제적 침략과 수탈의 주된 표적이 되었다. 식량자원과 해양자원이 풍부했으며 목포와 군산항 개항 전후로 여러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 창구가 되었다.

일제는 강제 병합에 앞서 식민지 기반을 탄탄하게 갖추기 위해 집중적으로 호남지역의 항일운동을 완전 뿌리 뽑고자 했다. ‘남한대토벌작전’기간(1909. 9 ~ 10) 처절한 항쟁을 벌였던 의병들에게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고 이 과정에서 호남지방 의병들 상당수가 학살되거나 강제노역을 당하였다. 동학농민군 중에 상당수가 의병에 가담한 사실로 보아 농민군 학살과 의병 학살을 그다지 큰 시간적 차이가 아니었으며 이들 학살을 목격한 호남지방민들은 반일의 저항의식과 동시에 공포심 또한 그 어떤 지역보다도 컸을 것으로 사료된다.

조선헌병사령부와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가 작성한 전국 각도별 3·1운동 통계일람표를 보면 다른 시도에 비해 횟수와 참가 시위자수가 상대적으로 적지만, 여러 기록을 참고하여 호남지방에서 전개된 3·1운동을 일자별로 정리했을 때 일제의 보고처럼 호남지방의 3·1운동이 결코 소극적이지 않았다. 3월과 4월 내내 전개된 호남 군중의 3·1운동은 연일 이어졌으며 사회 각계각층의 남녀노소 모두가 참여하였다.

무엇보다도 호남 3·1운동의 가장 큰 힘은 학생도 아니고 기독교나 천도교인이 아닌 일반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만세시위를 적극 계획하지는 않았으나 시위 현장에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호남지방의 종교세력이 타 지역에 비해 약세였고 발전하지는 못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천도교와 기독교 조직이 하나가 되어 3·1운동을 주도하였고 1910년대 내내 폭압적인 무단통치에 시달린 민중도 누구라 할 것 없이 한마음으로 만세 시위에 가담했기에 호남 3·1운동은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호남지방 3·1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3·1운동 이후의 행적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3·1운동에 참여하여 만세시위 현장에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실형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옥중 순국한 이들도 있다. 그리고 태형을 받은 이들 중에 상당수가 후유증으로 많은 고생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러 인물들이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신한 사례가 확인되고 있다. 3·1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해 많이 늦은 감은 있으나 3·1운동 이후의 행적을 추적하여 역사로 기록할 필요가 있다.

△전북지역 천도교와 3·1독립운동

전북은 호남의 관문으로 동학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동학을 창명한 수운 최제우는 1861년 6월 포교를 한 후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동학을 이단으로 탄압하였고, 수운 최제우는 경주를 떠나 호남지방으로 피신하여 남원에 이르렀다. 이는 영남지역에서 호남지역으로 동학이 포교되는 첫 시점이라 할 수 있다. 그 첫 포교지가 전북지역이었다. 이후 전북지역은 동학의 중심지로 부각되었으며,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로써 그 역할을 다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고향을 등지고 피신과 은신 등으로 생활하던 동학교도들은 1890년대 후반들어 동학에 대한 탄압이 수그러들자 고향으로 돌아와 비밀리에 동학조직을 재건하였다. 1904년 ‘흑의단발’이라는 문명개화운동을 전개한 동학은 1905년 12월 1일 천도교로 대고천하를 한 후 근대적 종교로 탈바꿈하였다. 동학의 근대개화운동 역시 전북지역이 그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동학은 한동안 쇠퇴하였지만 1904년 갑진개화운동을 계기로 교세를 다시 확장하는 한편 근대문명운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학은 1905년 12월 1일 천도교로 근대적 종교의 틀을 마련하면서 전북지역에도 교구(敎區) 즉 지방조직을 구축하는 한편 3·1운동 등 민족운동의 중심에 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북지역의 동학과 천도교에 관한 연구는 사실상 전무할 정도였다.

천도교 조직은 1919년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전북지역도 주요 교역자들이 중앙에서 시행하였던 49일 기도에 참여하는 한편 지역에서도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전북지역에서는 전주교구를 비롯하여 10여 개 교구에서 3·1운동을 준비하고 교인들을 동원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조직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데는 미흡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후 예비검속을 당함에 따라 타 지역보다 활발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는데 한계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북의 여러 지역에서 3·1운동을 주도하는데 중심에 있었다. 특히 임실 출신 박준승은 천도교 도사로서 민족대표에 서명하여 독립운동가로서의 사표를 보였다.

이로 볼 때 전북지역 동학, 천도교는 근대사회의 변혁을 이끌었던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로써, 그리고 중심무대로써 그 역할을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3·1운동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임실의 3·1독립만세운동

임실지역의 항일운동은 전국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또한 도내에서도 독립운동 ‘훈포장’수여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이 지역 운암 출신인 전주 최씨 ‘최찬국’이 도내에서 최초로 청웅면 조항치에 들어온 천도교에 일찍(1874년) 입도한 후 진안, 장수, 무주, 용담, 순창, 남원, 구례, 곡성 등 10여 개 군에 잠입하여 포교하면서 교도수가 수천에 달한 게 그 배경이다.

이 지하조직에 동량 역할을 한 김홍기, 김영원, 한영태, 최승우, 최유하, 최동필 등 여섯 분이 결의형제의 의를 맹약하고 포덕사업에 전력하였다. 이들은 1894년 갑오동학 농민혁명 때에는 대접주 신분으로 식량과 무기를 제공하고 임실을 무혈 석권하여 집강소 설치로 민정을 다스리고 남원의 대접주 김홍기(오수 출신)와 합세하였다. 전주에서 전봉준 부대와 만나 손병희 선생과 합류하여 공주 공격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1905년 동학의 명칭을 개칭한 천도교는 전국 72개교구를 창설하였으며, 임실에는 2개교구가 설치됐다. 제1교구는 운암 지천리에 두고 최승우(최찬국의 자)선생이 교구장이 되고, 청웅 성밭에 제 2교구를 건립하여 제2 교구장에 박준승(3·1운동 33인 중의 한 분)선생이 임명되었다.

그 후 1907년경 1교구와 2교구를 통합하여 청웅 구고리에 두고 2대 교구장에 최승우 선생이 임명되면서 배일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사재를 털어 청웅에 삼화(司馬齋)학교를 설립하였고, 전주에 창동(昌東)학교를 설립하여 김영원 선생을 교장으로 모셨다. 이 두 학교에서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니 일본 헌병들은 배일사상이 농후하다 하여 1909년 강제로 폐교시켰고 이어서 전주의 창동학교도 폐교를 당하였다. 그 후 347교리강습소로 이름을 바꾸고 계속하여 학교를 운영하였다.

3·1운동 민족대표였던 박준승 선생과 양한묵 선생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이 학교출신 박용(朴龍)은 일제강점기 경부가 되어 우리 독립투사들을 뒷바라지 했다. 뿌리 깊은 천도교의 조직과 삼화학교에서 배출된 인물들이 각 처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하였으니 타 지역에 비해 많은 항일 투쟁을 전개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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