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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3. 폐허로 남은 그 터, 고군산진 - 지친 이순신 장군 품어준 곳, 이젠 주춧돌만 덤불 밑 흙 속에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3. 폐허로 남은 그 터, 고군산진 - 지친 이순신 장군 품어준 곳, 이젠 주춧돌만 덤불 밑 흙 속에
  • 칼럼
  • 승인 2018.05.17 20:3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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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엔 대외 교류 관문…외교사설 머무는 객관 운영
임진왜란 후 고군산진 설치…전성기 수군 1000명 넘기도
주민들 군역으로 풍요로워…1895년, 271년만에 해체돼
이완용이 일반에 진터 매각…산사태로 흔적들 밭에 묻혀
▲ 한때 크게 번창했던 고군산진터. 1895년 해체된 후 일반인에 진터가 매각됐고 산사태로 유실되며 흔적들마저 민가 위쪽에 묻혀버렸다.
“이봐, 자네들 수로대장(이순신)은 어디로 갔나?” 왜군 신칠량이 통역을 통해 강항(姜沆, 1567-1618)에게 물었다. “알고 싶소? 태안 안행량(安行梁)은 예로부터 물길이 험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야. 이름이라도 좋아야 한다고 안행량이라 한 거지. 그곳으로 말하자면 배가 가는 대로 꼬꾸라지는 망나니 같은 물길이지. 그러기에 그곳을 피해 그 옆길로 명나라 장군이 수만 척을 끌고 내려오는데 벌써 군산포에 와 있다 하더이다! 우리 통제사(이순신)는 워낙 수가 모자라 한때 물러섰지만, 명나라 수군과 합세하여 곧 내려올 걸세!”

명량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왜군들은 전열을 다시 가다듬은 후 설욕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포로로 잡힌 자들 중에 의복과 처신이 벼슬아치 같다고 여긴 강항을 골라 취조하며 물었다. 그러자 강항은 왜군을 따돌릴 양 반 협박조로 명나라 수군에 대한 풍문을 부풀려 보탰고 지레 겁먹은 왜군들은 결국 뱃머리를 돌렸다.

당시 기지 있는 답변을 한 강항은 강희맹의 5대손으로 문과로 급제해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호조참판의 종사관으로 남원에서 호남 지방의 군량을 모으고 보내는 일을 했다. 그러다 남원이 왜군에 함락되자 격문을 띄워 함평, 순창에 이르기까지 의병을 모았지만 고향 영광마저 왜군들의 손에 넘어가자 식솔들을 데리고 피난을 가던 중 왜군에게 생포되었다. 그리고는 일본으로 끌려가 1600년 귀국하기까지 3년여의 포로 생활을 했다.

강항은 “적지에서 임금에게 올린 글로 주상전하께 엎드려 아뢰나이다”라고 하고 자신이 겪은 일들과 적국의 실태를 국익을 위해 세세히 기록하여 비밀리에 본국에 보냈다. 앞선 대화도 그 안에 수록된 글로 강항은 적지에서 체험한 기록을 『건차록(巾車錄, ‘건차’ 죄인이 타는 수레)』이라 책명을 지었으나 후에 제자들이 『간양록(看羊錄)』으로 고쳐 놓아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당시 왜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던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 직후 서해를 거슬러 올라와 고군산진이 있는 선유도에 정박하고 12일간 머물렀다.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의 승전보를 장계로 꾸며 조정으로 올려보냈으며 수군들과 휴식을 취하고 배를 수리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스스로 ‘천행(天幸)이었다’라고 한 명량해전에 온 힘을 쏟은 후 긴장이 풀린 탓인지 이순신 장군은 고군산에 있는 동안 자주 아팠다.

“21일 맑다. 일찍 떠나서 고군산도에 이르렀다. 호남 순찰사는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급히 타고 옥구로 갔다고 한다. 늦게 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다… 23일 맑다. 싸움에서 이겼다는 장계 초본을 수정하였다… 몸이 좋지 못하여 끙끙 앓았다… 밤에 몹시 좋지 않고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몸이 좋지 않아 하루 내내 나가지 않았다…” 『난중일기(원명 정유일기)』에 기록된 말이다. 일기에서도 엿보이듯이 반년 남짓한 기간에 투옥과 고문, 모친의 죽음, 목숨을 건 전투를 연이어 겪다 보니 몸이 급격히 쇠약해졌을 것이다. 비로소 한숨 돌리듯 자신을 추스르며 수군과 휴식을 하는 동안 가족을 챙기려 아들 회를 아산으로 보낸다. “2일 맑다. 아들 회가 배를 타고 올라갔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다. 이 마음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3일 맑다. 새벽에 배를 띄워 변산을 거쳐 법성포로 내려가는데 바람이 부드러워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이순신 장군이 고군산에 머무르던 12일의 시간은 몸을 추스르는 시간이었으나 아산의 본가가 왜적들의 분탕질로 잿더미가 됐다는 비보를 들으며 마음과 몸이 아팠던 시간이었다. 『간양록』에도 기록되었듯이 당시 왜적들의 만행은 해안가는 물론이고 조선 내륙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백성들을 무참히 살육했다. 이순신 장군의 행방을 놓친 왜군의 수군들은 육지의 왜군들과 합세하여 보복하며 아산의 이순신 장군 본가에 화풀이했다. 육지 쪽 사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순신 장군은 10월 3일 12일간의 휴식을 마치고 고군산진을 출발해 남하했고 이듬해 1598년 11월 지금의 남해 앞바다인 노량해전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고군산’으로 처음으로 등장한 고군산진(古群山鎭)은 조선 후기 1624년(인조 2)에 군산 지역의 해상 방어를 위해 군산도(현재 선유도)에 설치한 수군진이다. 고려와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군산도(群山島)라고 불린 이곳은 고려시대 대외 교류의 관문으로 외교사절이 머무는 객관(군산정(群山亭))을 운영했으며 조선 태조 6년에 수군 만호영을 설치했고, 선조 2년에는 수군절제사가 파견됐다. 임진왜란 이후 군산 지역의 군사적, 경제적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자 군산진은 운송을 전담하게 하고, 군산도에 수군 진을 하나 더 설치하여 방어를 전담하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지게 된다. 이에 따라 1624년(인조 2) 별장(別將)을 파견하고, 진의 이름을 기존 진포에 설치된 군산진과 구별하고자 ‘고군산진’이라고 칭한다.

군사적 중요성에 비해 고군산진이 설치된 초기에는 방패선 1척만 배치될 정도로 그 규모나 전력이 미약하였지만, 점차 필요에 의해 강력한 진이 되었다. 전성기에 1,000명 이상의 수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군산진은 크게 번창을 하였고, 고군산진 부근의 주민들도 돈을 받고 수군 역에 종사하게 되면서 타 지역의 사람들보다 훨씬 풍요로운 생활을 누린 것으로 보인다.

1864년에 편찬된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고군산 주민들의 경제적 상태를 “주민들은 모두 부유하고 집과 의복, 음식의 호사스럽고 사치스러움이 성읍(城邑)보다 훨씬 더하다.”라고 기록하였고 고지도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1872년 만경현 고군산진지도』에서 건물의 종류와 배치 살펴볼 수 있고 『호남진지』와 『여지도』에서도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번창하던 고군산진은 설립한 지 271년 만인 1895년 해체되고, 수군진이 없어진 1909년에 내각 총리 대신이었던 이완용의 주도 하에 지방 관청 건물들과 함께 고군산진터 역시 일반인에게 매각되었다. 당시 매각된 선유도 진말의 수군진은 일제강점기인 대략 1930년경 커다란 노거수에서 시작된 불이 번져나가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치른 뒤 지친 마음과 몸을 쉬인 그 고군산진터는 이제 도자기 파편과 주춧돌만을 남긴 채 덤불 속에 애달프게 남아있다.

이순신 장군의 행로를 추적하지 못하게 한 강항 선생의 『간양록』도 일제강점기 금서였다가 해방 후 빛을 보며 수록된 시가 조용필의 노래 ‘간양록’으로 불리고 있지만, 아직 그 진가가 덜 알려진 책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전쟁의 피폐한 환란 속에서 세세한 기록을 남긴 『난중일기』와 『간양록』을 살펴보며 선조가 알리고자 한 과거를 복기해봐야 한다.

고군산진터의 소실에 관한 이야기도 들리는 바에 의하면 땅 주인이 진터를 포크레인으로 다듬은 후 산사태가 났고 남아있던 주춧돌과 진터의 흔적들이 민가 위 밭으로 보이는 곳까지 밀려 내려와 묻혔다고 한다. “그 진말의 집들이 나무의 불에 옮겨 탔는지 부서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불 난 그 큰 나무의 밑동을 잘랐는디 이무기 같은 큰 구렁이가 있었댜~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지다 귀경하고 그랬댜~ 그기 진터 원쥔이 그 뭐가 되려던 이무기였던 것 갑소. 이래 봐도 여그가 이순신 장군이 대승하고 쉬었던 진말이여!”

아름다운 선유도의 해변 길을 앞에 둔 고군산진터는 수많은 사연을 품고 거친 모습으로 남아있지만 진말 어르신의 기억 속에 전설이 되었고 지역의 자부심임엔 분명하다. 특별한 안내판도 없이 언덕에 자리해 모르면 지나칠 곳이다. 폐허 안에 묻힌 그 터를 감히 지역의 자원이라고 말하기가 참으로 송구하고 마음이 아프다.

해상교량으로 섬들이 이어지며 고군산을 찾는 방문객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봄을 지나 여름이 되면 고군산 일대가 휴가객들로 북적이게 될 것이다. 그곳에 가거든 아름다운 풍광 뒤꼍에 있는 고군산진터를 살펴보자. 오래전 전쟁에 지친 이순신 장군을 품고 우리를 지켜낸 고군산진터를 올곧게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선조들이 남겨둔 치유의 장소인 그곳에서 우리도 살아갈 힘을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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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구 2018-05-20 10:16:49
강항 중시조의 사연을 여기서 접하니 더 반갑습니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납치되어 있는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 조정에 밀서를 보낸다는게 매우 어려웠을 텐데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련히 해지는 듯 하고 주자학을 전파하시면서 제자들을 길러 그 도움으로 나중에 생환하셨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rr 2018-05-18 16:51:07
헐. 근방에서 망주봉보고 회만 먹고 왔는데TT 저상태라니 복원되야할 곳이네요 후속보도해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