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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4. 과거의 핫라인, 봉수 - 민족이 바라는 희소식만 전해져 봉화 불빛처럼 퍼져나가길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4. 과거의 핫라인, 봉수 - 민족이 바라는 희소식만 전해져 봉화 불빛처럼 퍼져나가길
  • 칼럼
  • 승인 2018.06.0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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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태평·부안 계화산 봉수대 각각 백제·고려시대에 세워져
19세기 말 봉수제도 폐지까지 적 침입 등 동태파악 위기전파
임진왜란-6·25 등 거치며 훼손…일부 복원했지만 옛 모습 잃어

2018년, 한반도를 둘러싼 다이내믹한 변화들로 뉴스를 따라잡기 벅차다. 각 매체의 뉴스는 물론이고 각종 SNS를 통해 소식을 접하며 일희일비하고 있지만, 이렇게 즉각적인 소통을 누리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몇 세기 전만 해도 대부분의 소식을 인편을 통해 접했고, 국가 방위와 관련된 소식을 전달할 때는 봉수(烽燧)를 올려 상황을 전했다. 당시 통신수단인 봉수는 말 그대로 불을 이용한 선조들의 핫라인이었다.

‘봉수’의 ‘봉(烽)’은 밤에 불을 피우고, ‘수(燧)’는 낮에 연기를 올려 연락하는 것을 합쳐 일컫고 봉수를 올리는 설비인 봉수대(烽燧臺)는 ‘봉우리 봉(峰)’이 아닌 ‘봉화의 봉(烽)’자를 따서 불렀다. 봉수는 고대 중국과 일본에서도 행한 것으로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 의종 때 봉수제가 확립되기 시작했고 봉수대의 시설도 이 시기 확충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봉수제는 고려의 봉수제를 계승하여 태종대에 이르러 시행하였고, 세종 시기에 들어 봉수제가 정착되었다.

봉수대는 목적과 형태에 따라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 봉수인 경봉수(京烽燧)에서 조선 시기 해안을 살피기 위해 단기간 운용한 요망대(瞭望臺)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봉수대는 지형의 조건에 따라 배치와 시설의 유형도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대부분 산봉우리에 위치한 봉수대는 산짐승의 피해와 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축조되었으며 거화시설인 연조(煙竈) 등을 비롯하여, 번(番)을 서는 봉수군의 생활과 업무를 위한 가옥과 우물, 창고 등 부속시설을 갖췄다.

우물이 없는 봉수대는 마을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고 근무지가 험지에 있는 탓에 인근 마을 주민들을 봉졸로 뽑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봉수대에 상주해 교대로 번을 서며 불을 피울 수 있는 재료를 수거 비축하고 망을 살피고 소식을 불과 연기로 매일 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이곳은 자체방호에 필요한 무기와 비품을 갖춘 요새지였다.

봉수는 위급함만을 경고하는 것만 아니라 매일 무사 평안함을 알리는 정기 보고에 쓰였다. 봉수대의 굴뚝을 5개로 두었고 규모에 따라 굴뚝이 하나인 곳은 시간을 조절하여 불이나 연기를 올려 신호했다.

세종 시기의 『경국대전』 규정에 의하면, 평상시 평안함을 표시하여 매일 올리는 봉수를 1거, 적의 모습이 나타나면 2거,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거, 국경을 넘어서면 4거, 접전하면 5거를 올리게 되어 있다. 그리고 비나 구름으로 신호를 할 수 없을 때는 화포 혹은 나팔소리를 이용하거나 직접 파발로 알렸다. 하지만, 봉수군의 근무 태만에 따른 무지와 착오 등 신호오류와 적의 기습을 늘 염려하며 성종 시기에는 한꺼번에 긴급사항을 올리게 하는 등 시기에 따른 변동을 겪었다.

조선의 봉수는 경흥(함경도), 동래(부산), 강계(평안도), 의주(평안도), 순천(전라도)의 5개 봉수대 기점으로 하여, 한양 목멱산(서울 남산)의 제1봉에서 제5봉의 봉수대로 집결되어 승정원을 통해 왕에게 보고되었다. 한양인 서울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지역에 1, 3, 4로의 노선은 중국과 몽고 등을 경계하고 남부지역에 2, 5로인 2개의 노선은 주로 일본의 침입을 경계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조선의 봉수망은 5개로인 직선 봉수를 보조하는 간선 봉수를 운영하며 대략 640여 개의 봉수대가 설치되었다.

▲ 부안 계화봉수대.
▲ 부안 계화봉수대.

전라북도에는 삼국시대부터 쓰인 봉수대의 흔적이 지역 곳곳에 남아있는데, 조선 시기 제5봉의 노선 직봉이 부안 계화(界火)면 계화산(244m)에 있다. 계화도의 계화산은 사방 조망이 확 트인 곳으로 서해로부터 침입하는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내륙을 다니던 선박들을 감시하기 용이하여 고려시대부터 봉수대가 설치되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안현(扶安縣) 중 계화도 봉수를 언급한 부분.
▲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안현(扶安縣) 중 계화도 봉수를 언급한 부분.

계화산 봉수는 전라우수영 소속의 해안선을 연결하는 연변봉수로 순천에서 출발한 봉수를 이어받아 충청도를 거쳐 한양 목멱산인 남산에 전달되는 중간에 위치한 거화선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부안편)에는 “계화도 봉수는 북쪽으로 만경현 길관 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점방산에 응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부안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 봉수대가 있었던 까닭에 계화산을 봉화산으로도 불러왔지만, 기능을 잃고 풍파를 겪으며 훼손되었고 암자를 짓기 위해 봉수대가 파손되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섬이었던 계화도도 1963년 대규모 간척공사로 육지와 이어졌고 훼손되었던 계화산 봉수대는 1995년 부안군에서 복원하여 부안향토문화유적 제9호로 지정했다.

▲ 진안 태평봉수대.
▲ 진안 태평봉수대.

진안에는 1977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된 태평봉수대가 성재 봉우리(830m)에 있다. 태평봉수대는 삼국시대인 백제 때 처음 축조되었다고 전해지며, 이후 조선시대 중기 1595년(선조 28년)에 태평산성과 전주감영에 신호를 보내기 위해 보완을 하여 재축조되었다. 산봉우리에서 남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룬 자연 암반 위에 잡석으로 축조하여 남쪽이 북쪽보다 약 1m 정도 높게 쌓았으며 전체 높이는 4~5m, 둘레는 대략 32m 정도이다.

태평봉수대는 동서 어느 쪽으로든 수도 방어의 길목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있어, 동남쪽에 있던 장수군 장안산 봉화를 승계하여 북서쪽의 완주군 탄현성을 연결하는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태평봉수대는 네모난 축대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한 채 남쪽과 서쪽 벽이 훼손된 상태였으나 동쪽 편의 돌계단과 함께 보수되었다.

봉수는 오랜 시간 일상의 무사함을 알리고 위급할 땐 신속히 경고해준 선조들의 연락망이었다. 하지만, 정유재란과 임진왜란 등 왜적의 침입에 제 역할을 못 하고 일부 왜적들에 의해 훼손되자 무용론이 대두되었다. 이후 전화통신제도의 도입으로 1894년(고종 31년) 봉수제도가 폐지되자 기능을 잃은 봉수대는 유구만을 남기고 돌무더기로 변한 채 대부분 방치되었다. 일부 복원된 봉수대들도 본래의 기능을 담거나 고증에 의한 모습을 재현하지 못했다. 북한지역에 있던 봉수대들도 6·25전쟁 시 폭격과 북한군의 군사시설물이 설치되면서 훼손되거나 멸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선조들이 남긴 역사의 산물인 봉수대가 그 가치에 따라 올곧이 복원되어 지역의 자산이 되고 산을 찾는 이들에게 이정표와 쉼터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과거의 핫라인인 봉수와 달리 오늘날 핫라인은 전화와 인터넷을 중심으로 즉시 정보가 전달되고 이슈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이 오고 간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나누면 배가 되고 나쁜 소식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란 말은 예나 지금에도 통하는 이치일 것이다.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일들에 우리 민족이 바라는 희소식만이 전해져 평안한 일상을 빛냈던 봉화의 불빛처럼 반짝이며 퍼져나가길 기원한다.

▲ 호남읍지(1871년 奎) 부안현.
▲ 호남읍지(1871년 奎) 부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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