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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고려의 위기 도운 전라도와 훈요십조의 역설 - 왕 피난하고 왕비 다수 얻은 곳…과연 차별 받았을까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고려의 위기 도운 전라도와 훈요십조의 역설 - 왕 피난하고 왕비 다수 얻은 곳…과연 차별 받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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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6.14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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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침입때 현종 전주 머물러…호남지역, 왕실 조력자로 소임
기록 복원 과정 훈요십조 등장…조선 후기엔 당파 도구로 활용
실체 떠나 역사적 실상과 달라…신라계 경주최씨 조작 가능성
나주·공주에선 역사사실 부각…삼례·앵곡역은 잊혀진채 방치
▲ 대동여지전도에 나타난 차현(차령)산맥과 금강(공주강)물줄기.

△후백제 왕위 갈등, 고려서도 재현

2018년 올해는 고려가 건국된지 1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즉, 918년 6월 15일 왕건은 태봉왕 궁예를 축출하고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여 나라이름을 태봉에서 고려로 고치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였다. 이때 견훤왕은 10년 연하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며 사절을 보내는 등 우호적 공존관계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후 양국은 경쟁을 통해 후삼국 통일의 쟁패를 벌이며 927년 공산성 전투에서 후백제의 우위가 확립되었으나 930년 고창(현재의 안동)전투에서 후백제가 패한 이후 역사 흐름의 축은 고려로 이어졌다. 결국 936년 아들 신검의 반란으로 축출된 견훤은 왕건에 귀부하여 스스로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붕괴시키고 9월 8일 황산(논산)의 한 절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 같은 역사전개과정에서 견훤과 왕건은 마치 중국의 천하 최고 명장으로 지칭되었던 항우와 사려 깊은 유방과 대비되는 존재였다. 결국 천하는 포용력의 왕건이 장악하였고 새로운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강력한 후백제와의 경쟁을 위해 수많은 세력과 연합해 많은 세력과 혼인하여 29명에 이르는 부인들로부터 25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를 얻었다. 이는 곧 후백제 견훤이 겪은 후계갈등을 똑같이 겪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케 되었고 이를 대비한 유훈을 남기게 되었다.

△고려 태조 훈요십조의 실체

▲ 나주 완사천의 ‘왕건과 장화왕후’를 상징한 조형물.
▲ 나주 완사천의 ‘왕건과 장화왕후’를 상징한 조형물.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는 익히 알려졌듯이 불교숭상과 풍수지리 중시와 함께 적장자우선 왕위 계승원칙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사실 가장 많은 논란이 된 부분은 제 8조에 나타난 지역차별적 내용이다. 즉, ‘차현이남 공주강외 지역인재를 등용하지 말라’는 내용은 한국사회의 지역 차별인식의 뿌리로 회자되어 많은 논란이 있었다. 특히 이 내용은 조선시대 확대되어 충남 및 전라도 지역에 대한 지역 차별인식으로 활용되었다. 그런데 이같은 인식에 대해 조작설이 제기된 이래 이 문제에 대한 조작 찬성과 반대 입장이 학계에서 다양하게 전개되며 이 사안의 실체에 대한 논란이 학계 및 일반인과 언론에까지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조작설이 나오게 된 역사적 사건을 보면 고려의 위기 상황속에서 충청, 전라인들이 적극 고려를 도왔다는 점에서 이같은 역설적 내용이 과연 역사적 실상일까에 대해 의문이 남게된다.

즉, 왕건의 풍수지리 인식의 사표인 도선국사와 태사인 최지몽, 동진대사 경보는 영암 출신이며 왕건의 2번째 왕후이며 2대 혜종의 모후인 장화왕후 오씨가 나주인이며 왕건의 말년에 함께 산 동산원부인과 문성왕후는 승주(순천 박씨) 태생 박영규의 딸이며 견훤의 외손녀들이다. 또한 고려의 창업 과정에서 왕건을 대신해서 죽은 개국공신 신숭겸은 곡성출신이며 훈요십조를 받은 박술희는 후백제지역인 당진 사람이다. 이 점만 보아도 왕건의 호남인에 대한 기피는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위기의 고려, 충청-전라 도움으로 살아나

▲ 여지도서에 나타난 삼례역 모습. 관아건물과 함께 마신당이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 여지도서에 나타난 삼례역 모습. 관아건물과 함께 마신당이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는 8대 현종시기에 국가 존망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즉, 7대왕 목종의 모친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사통해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당시 거의 유일한 태조 왕건의 친손자인 순(8대 현종)을 강제로 절로 보내 승려로 만들고 뒤이어 암살까지 획책했다. 그러나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순(현종)은 뜻하지 않게 고려 8대 왕에 즉위하였다. 그런데 즉위직후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은 거란이 대규모로 침략해 수도 개경까지 함락 당해 급히 나주로 피난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였다.

▲ ‘비변사인 방안지도’에 나타난 삼례역과 앵곡역(장곡역).
▲ ‘비변사인 방안지도’에 나타난 삼례역과 앵곡역(장곡역).
▲ 해동지도에 나타난 ‘앵곡역’의 모습.
▲ 해동지도에 나타난 ‘앵곡역’의 모습.

현종은 태조의 2비의 고향인 나주로 피난하기 위해 공주를 거쳐 삼례역(완주군 삼례)에 도착하였는 데 당시 수행이 전주가 후백제 도읍이었으니 지나쳐 가자하여 전주를 피해 장곡역(완주군 앵곡마을)에 이르러 유숙하고 노령을 넘어 나주에 들어갔다. 이후 왕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개경으로 환도할 때 처음에는 꺼려서 피했던 전주에서 1주일을 머물렀고, 전주사람 박온기의 딸을 궁인(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공주에서는 공주 절도사 김은부의 세 딸을 왕비로 삼았다. 이같이 나주는 피난처였고 전주와 공주에서 각각 1주일여를 머물며 4명의 부인을 얻어 후백제지역 여인들이 왕실의 중심이 되었다. 이같이 전라도지역은 고려 왕실의 수호와 보호역할을 한 지역이었다.

△정파갈등에서 나온 지역 차별인식, 역사 실체로 극복하자

▲ 공주 공산성에 소개된 고려 현종 이야기.
▲ 공주 공산성에 소개된 고려 현종 이야기.

현종이 복귀한 개경은 거란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왕실의 역사기록도 모두 사라진 상황이었다. 이에 현종은 역사편찬관을 임명해 사라진 태조이래 7대왕들의 실록을 편찬케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갑자기 ‘훈요십조’가 등장한다. 즉, ‘고려사’최제안전에 의하면, “(태조의) 훈요는 병란에 분실되었는데, 최제안이 이미 죽은 최항의 집에서 얻어 바침으로써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훈요십조는 현종이 환도이후 고려 7대왕들의 역사를 새로 정리하면서 갑자기 나타난 기록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독 다른 일반적인 유훈과 달리 특정지역을 차별한 8조항의 내용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내용이었다.

즉, 태조대에 후백제 출신들이 많이 등용된 것을 근거로 이것이 현종대 7대실록을 새로 만들 때 신라계 경주 최씨 집안에서 조작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특히, 현종대에 후백제지역 출신의 왕비가 많아진 것에 대한 대응이 아닐 까라는 추측까지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에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과 이중환의 ‘택리지’등에서 강조되어 세상에 유포된 점이 더 큰 문제였다. 특히, 조선후기 노론계에게 피해를 본 남인계가 노론계의 근거인 충청 중남부 및 전북지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이 기록과 연결지어 부각시켰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따라서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는 실제 고려시기에는 그 실체와 의미가 거의 인식되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조선후기 당파적 도구로 활용되어 지역적 갈등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훈요십조의 실체와 조작 여부를 떠나 그 영향은 고려시대와는 관계없는 최근세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부각된 지극히 짧은 시기의 왜곡된 인식이었다.

호남지역은 고려 건국이후 고려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왕의 피난처이자 다수의 왕비를 배출하여 고려왕실을 든든히 만든 고려의 조력자로서 역사적 소임을 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왕건의 훈요십조는 실체를 떠나 역사적 실상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일 뿐이다.

다만 이같은 고려현종의 나주 피난과정에서 그 의미가 중요한 전라북도 지역의 삼례역과 앵곡역은 그 자취마저 잊혀진 채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이 방치된 모습이 매우 안타깝다. 나주에서는 왕건을 기리고 공주에서는 현종의 공주 방문을 부각하고 행사까지 진행하는 상황에서 후백제 역사이후 고려시기 전라북도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파악하는 노력이 요청된다.

▲ 조선 전라감영터(구 전북도청)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전주목(全州牧) 명문기와.
▲ 조선 전라감영터(구 전북도청)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전주목(全州牧) 명문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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