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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5. 유형원의 숙원, 부안에 깃든 마음 - 초야에 묻힌 위대한 실학자, 국가가 나아갈 길을 말하다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5. 유형원의 숙원, 부안에 깃든 마음 - 초야에 묻힌 위대한 실학자, 국가가 나아갈 길을 말하다
  • 칼럼
  • 승인 2018.06.21 20:5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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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세때 관직 뒤로하고
조상 땅 있던 부안으로
초가에 살며 서당 열어
제자양성·학문에 전념
18년간 반계수록 집필
국가체계·군사문제 등
광범위한 실천론 제시
죽은 뒤에야 인정받아
▲ 복원된 반계서당.

“매번 책을 펴서 볼 때마다 그 규모가 크고 식견과 지취가 높은 것에 대해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만나 보지 못한 한스러움을 견딜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저도 모르게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며 세상에 이런 위대한 사나이가 있었음을 비로소 믿게 되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초야에 묻혀 끝내 죽을 때까지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슬프고 한탄스럽습니다.”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집필한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접한 선비 윤증과 이현일의 심정을 담은 글이다. 살아생전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사회구조 개편이 절실한 시기 개혁의 방향과 대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정리함으로써 정약용과 이익을 비롯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실학을 집대성하는 데 모범이 되었다. 그 위대한 업적을 세운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완성하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문 부안에는 그의 발자취가 짙게 남아 있다.

▲ 유형원 고택 터.
▲ 유형원 고택 터.

유형원은 지금의 서울 정릉에서 유흠(1596~1623)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2살의 나이에 부친이 유몽인과 연루된 광해군 복위설에 휘말려 옥사하여 조부인 유성민(柳成民)과 외가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학문에 대한 식견이 높았으나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하며 벼슬할 생각이 없었던 그는 당대 정치의 폐해를 혐오하였으며 실생활에 유용한 실학을 연구하고 정치 개혁을 꿈꾸며 사색을 즐겼다. 훗날 진사시에 급제하고 진사가 된 것도 조부의 명에 의한 것이라 전해진다. 관직에 관심 없는 유형원은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때 조부상을 마치자 부안현 우반동(현재 보안면 우동리)으로 내려간다.

우반동은 조선 개국공신인 유형원의 8대조 할아버지인 유관이 공을 인정받아 나라로부터 받은 토지가 있는 곳이다. 유형원의 나이 15세 되던 해에 조부가 땅 일부를 팔 때 쓴 토지매매 문서(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보물 900호)에 “이 전답은 나의 6대조이신 우의정 문간공께서 태조조에 개국공신으로 책봉되어 왕으로부터 받은 사패지이다 (중략) 내(川)를 기준으로 그 서쪽은 그대로 두어 나의 농장으로 삼고, 내의 동쪽에 있는 집과 전답은 모두 김홍원에게 방매한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유형원은 선대의 얼이 깃든 우반동을 아껴 그곳을 반계(磻溪)라 칭하고 자호로 삼고 초가에 기거하며 민초들의 삶을 보살피고 산 중턱에 반계서당을 열어 제자 양성과 학문에 전념하였다. 제자 김서경은 스승 유형원을 위해 지은 행장에서 “대나무 숲 가운데 초가집을 짓고 수백 권의 책을 모아 놓았다. 네모난 모자에 가죽 혁대를 차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마음에 새기고 깊이 생각하면서 정미한 내용을 연구하였다”라고 그의 삶을 기록했으며 유형원도 “골짜기마다 깊숙이 오솔길 비스듬하고 / 반계에는 굽이굽이 복사꽃 떠 온다 / 산에 사는 사람은 스스로 만족한 생애라 여기니 / 긴 대나무 숲이 구름에 잠겨 있다”는 시구로 그의 마음을 그렸다.

▲ 반계서당 산책로 입구 실사구시 표지석.
▲ 반계서당 산책로 입구 실사구시 표지석.

유형원은 우반동의 삶을 만족해하며 자호인 ‘반계(磻溪)’에 완성하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대로 수시로 기록한다’는 뜻의 겸손한 표현으로 ‘수록(隧錄)’이라 하고 『반계수록』을 완성한다.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통해 알리고자 했던 것은 당대의 불합리한 상황과 이를 개혁하기 위한 실천적 방법이었다. 농업을 중요시한 실학자 이다 보니 『반계수록』의 많은 부분이 토지 문제와 그에 대한 해결 방안을 다루고 있다. “토지는 천하의 근본이다. 이 근본이 바로잡히면 모든 제도가 다 바로잡히는 것이요. 이 근본이 문란하면 모든 제도도 따라서 다 문란해지는 것이다”라 하며 토지제도를 바로잡아 백성의 생활을 안정되게 하고 정치와 교육을 바로세울 것을 강조했다.

유형원은 이어서 교육제도와 과거제도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과거제도가 출세의 도구가 됨을 비판하고 과거 위주의 공부보다 나라와 백성에게 도움이 될 실질적인 연구와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관직 임명도 관료의 임기제를 철저하게 지켜 행정의 실효성을 꾀하고, 왕실을 위해 설치한 많은 관청을 대폭 축소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했다. 『반계수록』 본문 뒤에 이어지는 속편에서는 당시 노비제도의 문제점을 언급하며, 노비세습 제도의 폐지를 위한 전 단계로서 종모법(從母法)을 실시해 노비의 숫자를 줄여나가자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 유형원이 집필한 『반계수록(磻溪隨錄)』 표지(왼쪽)와 내용.
▲ 유형원이 집필한 『반계수록(磻溪隨錄)』 표지(왼쪽)와 내용.

이와 같은 유형원의 뜻은 그의 생활에서도 여실히 반영되어 농업에 대한 연구를 하였고, 지주로서 많은 곡식을 축적하여 적극적으로 빈민들의 구제에 활용하였다. 유형원은 또한 군대를 강화하여 침략자들을 격퇴하고자 하는 군사학에도 관심을 두어 축적한 재산으로 큰 배 4~5척과 말과 조총, 활 등 무기를 장만하여 자신의 노비들 및 동네 사람들과 함께 사적으로 훈련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총 26권 13책인 『반계수록』은 토지제도를 다룬 전제와 교육과 선발에 대한 방법을 다룬 임관, 관리의 녹봉 체계를 다룬 녹제, 국가 체계를 다룬 직관, 군사제도를 다룬 병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속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형원은 짧고도 길었던 52세 일생 여러 분야 각 방면 실학 연구에 몰두하면서 방대한 양의 연구를 했지만, 많은 저서가 멸실되었고 그에 대한 평가는 미흡하기만 하다. 그의 숙원이 오롯이 담겨있는 『반계수록』이 당대 현실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이에 대한 해법을 내놓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사후에 인정을 받았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을 1652년 쓰기 시작해 유형원이 49세 되던 해인 1670년(현종 11년) 완성하였으나 사본으로만 남아 있다가 완성으로부터 100년 후인 1770년(영조 46년) 이 책을 보고 크게 감탄한 영조의 왕명에 의해 공식적으로 간행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정조는 “마치 100년 전에 살면서 오늘날의 일을 환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중략) 그 사람이 품은 생각은 실로 대단하였다”라 하였다. 이렇듯 유형원은 영조와 정조의 극찬 속에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지침이 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유형원의 유허지(전라북도 기념물 22호)엔 그의 정신을 대변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새겨진 글을 따라 산기슭에 난 산책길을 오르면 그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우물터와 복원된 반계서당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옛 지명인 우반동(愚磻洞)은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일제에 의해 우동(牛東)으로 개명되었고, 유형원의 고택도 터만 남아있으며 세상을 떠나 묻혔던 묘 역시 후손들이 용인으로 이장을 해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더욱이 그의 미래인 지금의 상황에도 지침이 될 위대한 실학자 유형원의 업적과 가치는 아직도 저평가된 상태이다. 그에 대한 학술적 재조명을 꾸준히 이어가고 더불어 관련된 유산들 역시 올곧이 복원되고 훼손된 지역의 이름도 되돌려 지역의 자산과 정신으로 이어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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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an 2018-06-22 15:50:57
훌륭하시네요! 다산 정약용 선생 이상으로 널리 인정받아야 할 분인데 아쉽네요

강상구 2018-06-22 10:42:04
부안이 낳은 좋은 역사적 스토리가 있는데도 이를 전혀 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전남 강진군이나 산소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의 경우 다산기념관에 연관된 관광지로 조성하여 1년이면 수 만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이번에 전라북도 도지사와 부안군수로 당선되신 분은 전북 부안을 유형원의 역사적 관광지로 추진하는게 어떨까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