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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에 '온고을소리청' 다시 문 연 김일구·김영자 명창 "우리 음악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는 공간됐으면"
전주한옥마을에 '온고을소리청' 다시 문 연 김일구·김영자 명창 "우리 음악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는 공간됐으면"
  • 김은정
  • 승인 2018.06.21 2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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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지인 권유로 전주살이
건강 등 이유 떠났다 다시 귀환
소리·아쟁·가야금 세 갈래 섭렵
어느 한 분야 놓기 어려워 고집
올해가 소리길 들어선 지 70년
소리축제때 기념무대 기획 중
참한 한옥마을 조성 기여하길
국악공연 인식 변화시키고 파
▲ 6년만에 다시 전주한옥마을로 돌아와 온고을소리청을 연 김일구(사진 왼쪽) 명창과 김영자 명창 부부가 다정히 손을 잡고 정원을 걷고 있다. 박형민 기자

2001년, 전주한옥마을에 ‘온고을소리청’이란 이름을 내건 작은 공간이 문을 열었다. 명창 부부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가끔씩은 ‘판’도 여는 곳이었다. 드러내놓고 공개된 곳은 아니었지만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담장 안에서 들려오는 판소리와 북장단, 아쟁과 가야금 소리에 마음을 앗겨 슬쩍 슬쩍 기웃거리기도 하고, 담장에 기대어 한숨 쉬어가기도 했다.

10년 남짓 시간이 더해지면서 온고을소리청은 자연스럽게 한옥마을의 명소가 되었다.

그즈음 한옥마을이 변하기 시작했다. 관광지로 이름을 알린 한옥마을에 관광객들이 물밀듯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골목길은 번잡해지고 길거리음식과 온갖 오락기구로 채워진 가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온고을소리청도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명창 부부는 담장을 넘어가 오가는 사람들을 즐겁게 했던 우리 음악이 이곳에서는 더 이상 제 빛깔을 찾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다잡기 어려웠던 부부가 한옥마을의 온고을소리청 문패를 내리고 떠난 것은 2012년이었다. 김일구 명창과 김영자 명창 부부의 이야기다.

그 뒤 햇수로 6년, 소리청이 있던 곳에 문을 열었던 카메라박물관이 떠난 자리에 예쁜 정원을 품은 한옥이 들어왔다. 다시 문을 연 온고을소리청이다.

지난 4월부터 박물관으로 변신했던 한옥의 제 모습을 다시 찾느라 고된 노동에 매달렸던 김일구 명창(78)과 김영자 명창(69) 부부를 만났다.

6년 만에 돌아온 한옥마을이 아직은 낯설지만 다시 출발하는 기대로 설렌다는 부부는 마지막 삶의 터가 될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관객들을 만나며 우리 음악의 가치를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예전의 한옥과 좀 달라진 모습입니다. 일이 많았겠습니다.

“두 달 정도 걸린 것 같아요. 우리가 이사를 하고 카메라 박물관이 들어왔잖아요. 그래서 공간이 아주 많이 변했었어요. 전시가 중심이었던 공간을 다시 원상복구하려니 일이 많았어요.

기왕에 원형을 다시 잡으면서 교육공간을 조금 넓혔는데 건축법상 문제가 있다고 하네요. 한옥의 모습을 제대로 찾아야겠다 싶어 나선 일이 너무 복잡해져서 아주 힘들었어요. 괜히 시작했다 싶기도 했고, 좋은 취지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행정도 야속했어요. 그래도 그럭저럭 정리되어가니 다행이지요.“

-다시 돌아오실 계획이 있었습니까.

“떠날 때는 이런 저런 생각을 깊게 하지 못했지만 다시는 안돌아오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나는 이사 가고 싶지 않았는데 집사람이 서둘렀던 일이거든요.”

-그럼 사모님 결정이었군요.

“이 양반은 이사하지 말자고 했었는데 제가 옮기자고 했어요. 가장 큰 이유는 이 양반이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 집 마당에서부터 오목대 올라가는 입구 밑에까지 쓸고 물청소를 합니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 두 번씩이나 했어요. 오죽했으면 우리가 이사를 가고 나니 청소하는 아저씨가 김일구 선생님이 안계시니까 너무 힘들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안 되겠다 싶더군요. 건강관리도 해야 하는 나이인데. 게다가 동네가 너무 이상하게 변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이사를 반대하셨는데 어떻게 설득하셨나요.

“기회가 좋았어요. 우리가 그런 고민을 갖고 있다고 하니 카메라를 수집해온 제자가 여기에 박물관을 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나서서 강권했지요. 소리청과는 다르지만 카메라박물관도 한옥마을에 좋은 공간이 되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2012년에 떠나셨으니 6년 만에 오신 셈인데, 그때에 비해 환경이 더 나아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더 번잡해진 경향도 있고요.

“그래서 망설이기도 했어요. 지금이 다시 돌아오기 적절한가 싶기도 했는데 이때를 놓치면 더 어려워지겠더라고요.”

-두 분 다 고향도 아닌 전주로 어떻게 오시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전남 화순, 저 사람은 대구가 고향이에요. 결혼하고 나서는 줄곧 서울에 살았습니다. 그래도 공연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는 전주는 늘 마음이 가닿는 곳이었어요. 아내는 국립창극단에 있었고, 나는 국립국악원에 있었는데 정년퇴임을 하고나니 서울을 떠나고 싶더라고요. 어디로 갈까 고민이 별로 필요 없었는데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 어려웠죠.”

-그럼에도 내려오신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까.

“친분이 깊은 전주 분들이 내려와 살라고 권하셨어요. 옛 속담에 ‘권하는 장사는 밑지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권하는 분들이 있으니 가도 밥은 굶지 않겠다 싶었죠. 그리고 더 큰 이유는 내 기술로 제자양성을 한다면 묻히지는 않을 텐데, 그런 일을 하기에 전주가 가장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번 해보자해서 이 집을 그때 산 것이죠.”

-그때만 해도 한옥마을에 빈집이 많았지만 이사를 오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을 때인데요. 선견지명이 탁월하셨던 것 같습니다.(웃음)

“그래도 그때가 참 좋았어요. 고즈넉하고 공기 좋고 사람 살기 참 좋은 동네였잖아요. 세상사가 그런 것 같아요. 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고, 한옥마을이 좋은 관광지가 되는 것은 좋은데 역사성이나 특성을 간직할 수 있는 환경을 조금이라도 회복했으면 좋겠어요.”

-화제를 좀 돌려보겠습니다. 선생님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준보유자이면서 아쟁과 가야금 연주에도 독보적인 위치를 지키고 계신데 여러 갈래 길을 걸어오신 시간이 궁금합니다.

“어느 것 하나 놓는 일이 참 어려웠어요. 때로는 한 길만 제대로 가는 것도 어려운 마당에 내가 잘하고 있는 일인가 생각도 하지만 소리나 연주나 모두 제게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거든요. 돌아보면 부질없는 욕심인데…”

-단순히 욕심으로만 치부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선생님의 분야를 명창이냐 아쟁과 가야금 명인이냐로 가른다면 정말 어려운 일일 것 같거든요. 더구나 아쟁산조 같은 경우는 ‘김일구류’란 갈래를 정립하셨지 않습니까.

“그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소리나 기악이나 모두 내 존재 자체가 스승 덕분인데 아쟁은 스승님의 반열에 머무르지 않고 ‘김일구류’를 새로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제 스승이 장월중선 선생님인데 당시 공부를 할 때 받은 산조가 10분 남짓한 길이거든요. 제가 그 뒤로 공부를 하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가락을 더해 하나의 판을 짜게 되었는데 그 분량이 36분 정도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산조의 바탕도 전혀 새로워졌는데, 돌아가신 최종민교수님은 ‘김일구가 아쟁을 하는 것은 말을 하는 것 같다’고 하셨어요. ‘김일구류 산조’를 세워놓은데 큰 힘이 되었죠.”

-어떻게 이 세 갈래 길을 함께 걷게 되셨는지요.

“소리길에 들어선 것은 아버님 덕분인데, 본격적인 소리는 공대일 선생님께 배웠어요. 그러다가 변성기를 맞으면서 아쟁을 배우게 되었지요. 목포에 계셨던 장월중선 선생님을 그래서 찾아갔는데 당시 여성국극단 활동이 아주 활발했습니다. 2-3년 아쟁을 배우다가 여성국극단 반주로 따라 다니게 되었죠. 흥행이 잘되면 돈을 주는데, 그것도 야참비 정도였어요. 그마저도 나중에는 수입이 안나니 받을 수 없게 됐어요. 그때 마침 부산공연을 갔었는데 부산에는 가야금 연주로 이름난 원옥화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좋은 음악꾼들이 있는 단체가 왔다고 하니까 저녁에 초대를 했어요. 큰 온천장에서 판을 벌였는데 그때 ‘주인 없는 공사는 없다’시며 먼저 연주를 하시는데, 내 아쟁은 감히 내놓을 수도 없는 경지였어요. ‘강태홍 류 가야금 산조’였죠. 그 길로 단체를 그만두고 부산에 남아 가야금을 배웠어요.”

-그럼 서울은 이후에 올라가셨군요.

“거기서 바로 서울로 갔어요. 70년대 초반이었죠. 그때부터 국립창극단, 국립국악원 등에서 활동했고, 독립적으로 창극 작품을 제작해 올리기도 했어요. KBS 우리가락 우리마당이라는 프로그램도 만드는데 힘을 보탰고요. 그즈음에 방송프로그램으로 창극을 내보내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도 그때가 가장 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시기였을 거예요.

-활동하신 영역을 보면 판소리에 아쟁 가야금 연주, 작창에 작곡, 연출까지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해오셨는데요. 언젠가 고수로도 무대에서 뵈었던 것 같습니다.

“맞아요. 한동안 주위의 권유로 북도 쳤어요. 돌아가신 오정숙 선생님은 제자들의 북을 여러 번 부탁하셨는데 거절 할 수 없어서 몇 번 맞췄었지요. 그런데 언젠가 항의를 받았어요. 왜 남의 밥그릇까지 뺏어 가냐고. 그때 알았어요.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하는 일이라 해도 누군가에게는 뺏기는 일이 된다는 것을…. ”

-사모님과 함께 선 무대도 많았었지요.

“국립창극단에서는 함께 주역을 많이 했어요. 시새움을 많이 받았죠. 그래서 한때 창극단에 사표 쓰고 나와서 ‘뺑파전’을 만들어 공연했어요. 일본 공연까지 갔었는데 관객들의 인기가 높았어요. 전통의 원형과 현대적 변형을 잘 구성한 작품이었죠. 처음에는 우려했던 원로 선생님들도 ‘전통은 저렇게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올해 큰 무대를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소리길에 들어선 시점으로부터 올해가 70년이 되었더라고요. 그래서 70주년 무대를 기획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서는 무대인데, 저는 판소리와 아쟁 가야금에 이번에는 거문고 연주도 해보려고 합니다. 거문고는 70년대 초반 서울에 올라갔을 때 한갑득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공부했었어요. 여러 가지 이유로 작파했었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자꾸 아쉬움이 들어요. 그래서 지금 혼자 연습하며 가락을 익히고 있습니다. 가을 소리축제에 제 70주년 무대가 구성되었는데, 서울 부산 광주에서도 공연을 합니다. 이런 공연은 마지막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도 열정이 식지 않으신 것을 보니 한옥마을 온고을소리청의 역할이 더 기대됩니다.

“개인 공간이긴 하지만 우리음악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는 통로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전주한옥마을의 환경을 참하게 만드는데도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나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을 챙겨서 국악공연에 대한 인식도 변화시키고 싶습니다. 다 도와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전주여서 할 수 있는 일들이기도 하고요.”

올해 일흔 여덟의 김일구 명창과 일흔을 바라보는 김영자 명창은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국악인으로 꼽힌다.

작은 이해타산에 마음 쓰지 않고 요란스러운 세태에도 휩쓸리지 않고 부부가 걸어온 길을 들여다보니 그만큼 쌓아진 궤적이 높고 단단하다. 전주한옥마을에 다시 문을 연 온고을소리청. 명창부부의 귀환이 그저 반갑다.



●김영자 명창은 - 김일구 명창과 판소리 대중화 열정

김영자 명창은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즐겨듣는 축음기에서 나오는 판소리가 좋아 국악의 길에 들어섰다. 아버지는 ‘소리를 하려거든 정권진 선생을 찾아가라’는 유언으로 소리길을 열어주었다. 잠시 대구에 와있던 정권진 명창 문하에서 소리를 시작했지만 곧 스승이 떠나 차승호 선생으로부터 소리를 배웠다.

국극단을 따라다니며 무대에 섰던 그는 김준섭 임준옥 강종철 정응민 등 여러 선생의 문하를 거쳤으며 김소희 성우향 정광수 명창으로부터 다섯 바탕을 익혔다. 20대 중반, 박동진 명창의 권유로 국립창극단에 들어간 이후 창극 무대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타고난 목과 탄탄한 성음으로 실력을 인정받아온 그는 30대 중반, 남원춘향제 전국명창대회 장원과 이듬해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부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명창의 반열에 섰다.

남편 김일구 명창과 함께 창극 대중화에 특별한 열정을 쏟아왔으며 전북도립창극단 단장을 맡아 7년 동안 재직했다. 송흥록-송광록-송우룡-유성준-정광수로 이어지는 ‘수궁가’ 로 중요무형문화재 준보유자가 됐다.



●김일구 명창은 - 판소리·연주·작창 능한 타고난 예인

김일구 명창은 화순이 고향이다. 여관업을 했던 아버지(김동문)는 국악단체를 인수해 운영할 정도로 예능을 좋아했는데 그 덕분에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판소리를 배웠다. 본격적인 소리 공부는 공대일 선생 밑에서 시작했지만 변성기를 지나면서 길을 바꾸어볼 요량으로 장월중선 선생을 찾아가 아쟁산조를 배웠다. 그러나 소리에 대한 일념은 변하지 않아 후에 김상룡, 장영찬, 박봉술, 정권진, 성우향 명창 문하를 거치면서 소리를 익혔고, 특히 박봉술선생으로부터는 ‘적벽가’가 한바탕을 제대로 받아 송흥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박봉술로 이어지는 적벽가 계보의 적자가 되었다.

30대에는 부산에서 활동한 가야금명인 원옥화로부터 가야금산조를 배웠으며 한갑득으로부터 짧은 기간 거문고를 배우기도 했다.

여성국극단 반주자와 여러 곳의 국악원 강사를 거쳐 국립창극단에 입단, 여러 편의 창극 무대에 서거나 작품을 각색하고 연출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펼쳤다. 마흔네 살에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 부문 장원으로 명창의 반열에 올랐으며 2년 뒤 신라문화제 기악부문 대통령상을 수상해 아쟁 명인으로도 자리를 굳혔다. 국립창극단을 거쳐 국립국악원에서 활동한 그는 판소리는 물론 아쟁과 가야금 연주에 작창과 연출까지 두루 능해 타고난 예인으로 꼽힌다. 남성 판소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호방함과 잘 다듬어진 성음의 조화가 일품인 그의 소리는 귀명창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준보유자로 아내 김영자명창과 함께 전주한옥마을에서 온고을소리청을 열고 국악교육에 열정을 쏟고 있다. 아들 경호 도연씨도 그의 뒤를 이어 판소리와 아쟁 연주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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