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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6·25 전쟁 68주년…김의남 참전용사 집 가보니] 훈장 있으면 뭐하나…가족 없이 외로운 삶
[오늘 6·25 전쟁 68주년…김의남 참전용사 집 가보니] 훈장 있으면 뭐하나…가족 없이 외로운 삶
  • 남승현
  • 승인 2018.06.24 1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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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91세…약으로 버텨
18세때 독립운동 만주행
나이 어려 다시 한국으로
6·25전쟁 참전 기억 생생
정부 지원금 받지만 빠듯
아내 죽고 자식도 연락 뚝
▲ 지난 23일 김의남 참전용사가 국가유공자 증서와 훈장을 내보이고 있다.

6·25 전쟁 68주년을 이틀 앞둔 지난 23일 오전 부안군 부안읍 9-36번지. 6·25 참전 용사가 사는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당에 이불 하나 수건 한 장이 빨랫줄에 걸려 있었다. 집 주인 김의남 씨(91)는 마당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김 씨는 온몸이 다 아프지만, 요즘은 특히 전립선이 아프다고 했다. 잠을 자다가 실수하다 보니 이불 빨래도 자주해야 한다. 거동이 불편한 김 씨를 대신해 다행히 빨래와 음식 등 집안일은 간병인이 한다.

지난해까지 거뜬히 오가던 경로당은 몸이 쇠약해 이제는 무리다. 기자가 찾아온다는 연락에 옷을 차려입고 모자를 쓴 김 씨였지만 정작 그는 마당 밖을 나갈 수 없다.

방에는 약봉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좁고 낡고 어두운 실내 벽지에 작은 글귀들이 적혀 있다. ‘우체국 비밀번호’, ‘母 제사’, ‘이발하는 날’, ‘약 먹는 날’. 이 집에 혼자사는 김 씨가 잊으면 안 되는 것들을 적어둔 것이었다.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은 김 씨에 따르면 1927년 8월 29일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그는 상업고등학교를 다니다 일본 학생과 싸움이 붙었다. 결국 다니던 학교를 그만둬야 했던 그는 식민지의 서러움을 품고 부산에서 만주로 향하는 급행열차에 올랐다.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 김구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중국 하얼빈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생계를 유지한 김 씨는 당시 18세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 씨는 희미하긴 했지만 6·25 참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부대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2대대 7중대 소속으로 미군과 함께 압록강을 점령했다. 중공군의 맹공으로 후퇴하는 길에는 부대원이 3명만 남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왼쪽 팔뚝을 들어 보였다. 당시 전투로 상처를 입은 부위라고 했지만 시간이 오래돼 보이진 않았다. 김 씨는 국가유공자 증서와 훈장도 내왔다. 노무현 정부에서 6·25 참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유공자가 됐다고 한다.

6·25 참전 명예수당과 기초노령연금 등 정부지원금 50여만 원은 혼자 사는 김 씨에게 빠듯하다. 방세와 약값을 내기가 벅차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선 그는 생의 마지막을 외롭게 보내고 있다. 돈도 돈이지만 참전 용사에게 부족한 건 가족의 부재였다.

김 씨는 “아내는 오래전에 죽었고, 5남매도 연락이 끊겼다. 늙고 아픈 내가 거치적거리니까 다 떠났다”고 말했다.

6·25 참전 노병의 아픔과 설움은 김 씨 뿐만이 아니다.

김준석 (사)대한민국 6·25참전 국가유공자회 전라북도지부 부안군지회장은 “68주년을 맞은 6·25 전쟁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해 피땀 흘린 청년들이 모두 80~90대로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6·25 전쟁에 투입된 김 지회장의 나이도 올해 여든 아홉이다.

(사)대한민국 6·25참전 국가유공자회 전라북도지부에 따르면 도내에 생존하고 있는 총 7000여 명의 6·25참전 용사 중 20~30%는 김 씨 처럼 고독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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