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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리 일대 유적의 실체
왕궁리 일대 유적의 실체
  • 김은정
  • 승인 2018.07.19 1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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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일본에서 흥미로운 문헌이 발견됐다. 중국 육조시대에 쓰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였다. 관세음이 경험한 신비한 사례들을 모은 이 문헌의 원본은 전하지 않으나 일본에 있던 다른 판본이 발견되면서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우리에게도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무광왕(백제 무왕)이 ‘지모밀지(枳慕蜜地)’라는 곳에 천도해 새로운 건축물들을 많이 지었는데 제석사에 벼락이 떨어져 석탑이 무너졌다. 초석부분은 남아 사리함를 열어보니 그 안 유리병에 있던 사리가 없어졌다. 무왕은 발정이라는 스님에게 일러 참회법회를 보게 했는데 이후에 보니 사리가 다시 놓여있었다. 이에 감격한 무왕은 사찰을 건립해 그곳에 사리함을 모셨다> 백제와 관련한 이 대목에 우리나라 역사학계가 특별히 주목한 이유가 있었다. 지난 1965년, 왕궁리 오층석탑 해체 수리 때 발견된 푸른 유리병을 담고 있는 사리함과 금강반야경에 견주어 그 내용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무왕이 건립했다는 제석사에서 왕궁리 오층석탑이 있는 유적까지의 거리는 불과 1.3Km. 이 기록은 2003년부터 시작된 부여문화재연구소의 정밀조사로 고대 왕궁의 실체가 드러난 왕궁리 유적의 비밀을 밝혀주는 또 하나의 단서였다. 무왕의 천도설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던 것도 이 기록 덕분인데 ‘천도’의 진실은 가능성으로만 추론될 뿐 아직껏 역사적 실체는 규명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 왕궁리 일대의 유적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더해주는 근거가 새롭게 더해졌다. 익산 쌍릉 중 대왕릉 인골 주인이 백제 무왕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내년에 진행될 소왕릉 발굴조사로 무덤 주인이 명쾌하게 밝혀진다면 무덤주인을 둘러싸고 지속되어온 논쟁도 끝이 나게 된다.

둘러보면 왕궁리 유적 인근에는 삼국시대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 터와 무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쌍릉, 현존하는 백제 석불 중 가장 큰 석불을 갖고 있는 석불사가 있다. 무왕이 건립했다는 제석사도 가까운 거리다. 이 유적들이 놓인 공간의 배치를 눈여겨보면 익산 왕궁리 일대의 역사적 의미가 더 새로워진다.

기록과 유물이 없는 역사는 야사로 묻히거나 설화로 남지만 기록과 유적으로 존재하는 역사는 정사가 된다. 지금, 자칫 야사로 남을 뻔 했던 왕궁리 일대 유적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백제사의 실체를 제대로 규명해내야 할 과제가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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