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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꿈으로 가는 기차 - 장은영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꿈으로 가는 기차 - 장은영
  • 기고
  • 승인 2018.07.20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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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플랫폼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기찻길 옆에 붉게 피어 있는 칸나가 내 마음처럼 화사하다. 오늘만큼은 잡다한 일상을 벗고 새로운 나를 찾아 떠난다. 오래 미뤄둔 숙제와 같았던 내 꿈을 키우기 위해 나는 기차를 탈 것이다. 어제 밤새도록 고민하며 쓴 원고를 떠올린다.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 오늘은 얼마나 쓴소리를 쏟아낼지 걱정 반 기대 반이다.

그림=신보름
그림=신보름

기차가 곧 도착할 거라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가슴이 뛴다. 빛나던 젊음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세월의 무게에 치인 내 마음에도 열정의 불꽃이 피어남을 느낀다. 멀리서 기찻길을 따라 기차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기적 소리가 들린다. 군데군데 섬처럼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홈으로 모여든다. 바람이 분다. 빠르게 달려오는 기차가 내 앞을 스쳐 지나자 내 몸이 바람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순간 잊고 있던 기억들이 바람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떠오른다.

 

단발머리를 하고 흰 칼라를 달던 여고 시절, 나는 기차를 타고 통학을 했다. 하루에 세 번 왕래하는 완행열차는 아직도 별빛이 총총거리는 새벽에 출발했다가, 땅거미가 어둑어둑 그림자 닻을 내리고 저녁 별이 총총 박히는 밤까지, 덜컹거리며 기찻길 위를 달리곤 했다.

시골 중학교에서 낯선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한 나는 정든 친구들을 떠나왔다는 것 때문에 늘 외로웠다.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점차 말수도 적어졌다. 이런 나를 달래주는 유일한 친구가 이 기차였다.

정읍에서 익산까지 운행되고, 주 고객이 학생인 이 기차에는,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를 전통이 하나 있었다. 익산에는 남학교가 다섯 개, 여학교가 네 개였다. 기차를 타고 다니는 학생들이 많다 보니 각 학교별로 열차 객실 한 칸씩을 차지했다. 수가 적은 여학생들은 여학생 칸에 탔는데, 등교할 때는 맨 앞 칸, 하교할 때는 맨 뒤 칸으로 정해져 있었다.

남학생 객실은 각 칸마다 통학반장이라는 게 있어 규율도 엄했다. 입시철엔 돈을 걷어 후배에게 엿을 사주고 선배의 졸업식 인사치레도 했다. 그러나 여러 학교가 모여서 함께 가는 여학생 칸에서는 통학반장을 뽑을 수가 없었다.

이 기차를 놓치면 학교에 결석하고 하루를 쉬는 수밖에 없는데도 난 언제나 늑장을 부리다가 겨우겨우 기차에 오르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늦게 집에서 나오는 바람에 맨 앞 칸인 여학생 칸에 미처 탈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이라 할 수 없이 아무 칸이나 올라탔는데 온통 새카만 남학생들의 교복과 상고머리가 보였다. 나는 눈을 어디다 둘 줄 몰라 얼굴만 빨개졌다. 가슴은 쉴 새 없이 콩닥콩닥 뛰었다. 1분 정도 정차하는 김제역이 어서 오기를 절박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드디어 기차가 김제역에 서자마자 뛰어내려 여학생 칸으로 달려 나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아이들 앞에서 얘기했지만 부끄러움 때문에 한동안 혼자서 끙끙거렸다.

사춘기 소녀 때여서 그런지 여학생 칸은 언제나 왁자하고 시끄러웠다. 빙 둘러앉아 듣는 각 학교 선생님들의 흉과 남학생에 대한 은밀한 이야기는 웃음소리와 함께 섞여 길게 이어지곤 했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날이면 흰 운동화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머리까지 빗어 내리면서 칼라를 고쳐 다느라고 부산을 떨었다.

신태인역과 김제역 사이에 있었던 감곡역. 전북일보 자료사진
신태인역과 김제역 사이에 있었던 감곡역. 전북일보 자료사진

겨울이면 나는 새벽 여섯 시 사십오 분에 출발하는 첫 기차를 타기 위해 발목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헤치고 동동걸음을 쳤다. 새벽에 감아서 미처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은 역까지 걸어오는 동안 빳빳하게 얼었다. 곱은 손을 불며 기차에 오르면 따뜻한 온기에 몸이 녹아 나른해지곤 했다.

흔들거리는 기차에 앉아 어두웠던 세상이 서서히 밝아오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시간이 손에 잡힐 듯했다. 가로수가 빼어난 들길을 배경으로 떠오르던 해돋이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온통 하얗게 덮여 있던 겨울 산과 벌판, 그 부드러움과 고요함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시린 발을 기차의 히터로 녹이던 내 십 대의 마지막 시간들이 완행열차의 기적 소리와 칙칙폭폭 기차 바퀴 소리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기차에서 내리면 도시는 온통 회색빛으로 내게 다가왔다. 을씨년스럽고 춥기만 했던 역 광장에 서면 낯선 건물들에 주눅이 들었다. 이방인 같은 내 모습에 혼자 외로웠다.

붐비는 익산역 플랫폼. 전북일보 자료사진
붐비는 익산역 플랫폼. 전북일보 자료사진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향할 때면 차창 밖으로 보이는 먼 산 위로 불그스름하게 노을이 물들었다. 주황빛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쉽게 정들 수 없는 도시와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 그리고 그 속에서 숨 쉬는 내 모습을 떠올리며 노트를 샀다. 그리고 표지에 ‘꿈으로 가는 기차’라고 썼다. 그날 이후 내 마음에 고이는 수많은 생각들이 종이 위에서 살아났다.

 

기차가 멈추자 나는 서둘러 기차에 오른다. 서서히 기차가 출발한다. 가방 속에 들어있던 원고를 꺼내 들고 작품 속 인물이 되어 사건 속에 빠져 본다. 하지만 쉽게 풀리지가 않는다. 깊은 숨을 내쉬다 창밖을 보니 풍경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찬란한 햇빛 사이로 초록이 짙은 나뭇잎이 아름답다. 찌푸렸던 내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래, 조급해하지 말자. 나는 지금 내 꿈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를 타고 있지 않은가.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언젠가 나는 멋지게 종착역에 도착할 것이다.

 

/장은영(동화작가)

* 200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장편동화 <마음을 배달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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