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18-09-22 16:50 (토)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흙으로 만든 최고 명품, 고려 상감청자 만들어낸 전북 - 왕·귀족들 사용한 명품…자기 본고장 송나라에 역수출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흙으로 만든 최고 명품, 고려 상감청자 만들어낸 전북 - 왕·귀족들 사용한 명품…자기 본고장 송나라에 역수출
  • 기고
  • 승인 2018.07.26 20: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안 유천리·진서리 도요지 고려청자 대표 산지로 명성
좋은 흙과 운반할 바닷길에 소나무 연료 많은 천혜지역
일제시대 가마터 도굴 시작 퇴적층 파괴·일본으로 반출
1967년 본격 발굴작업 돌입 국보·보물급 수십점 찾아내

△인간이 만든 최초 발명품, 토기

▲ 진안 갈머리 빗살무늬토기.
▲ 진안 갈머리 빗살무늬토기.

인간이 만든 첫 발명품 토기는 1만3000여년 전 기온이 따뜻해져 현재와 같은 해안선과 육지의 모습이 만들어졌을 때 새롭게 발명된 도구이다. 인간이 진흙을 불로 구우면 단단해진다는 화학적 변화를 깨닫고 이를 활용해 토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 남원두락리 도기그릇받침.
▲ 남원두락리 도기그릇받침.

그런데 토기는 왜 만들었을까? 교과서적인 답은 저장이다. 안타깝게도 이 답은 중근동 토기의 유래이지 동북아 토기의 유래는 아니다. 최근 고고학적 성과에 따르면 동북아지역은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토기를 만든 지역으로, 불로 음식을 끓이고 삶아 먹을 수 있는 새로운 도구인 토기가 탄생한 곳이다. 즉, 동아시아 지역의 토기는 도토리를 물에 담가 떫은 맛이나 독성을 없애거나 조개류 익혀먹기, 물고기 익히기와 국물, 기름추출 등을 위한 조리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또 음식 저장도구로도 사용되었다. 이 같이 토기는 인간에게 불을 가열해 음식을 조리하거나 곡식이나 가루 등의 식재료 저장 도구로 사용되었다.

△토기, 도기, 자기는 어떻게 다를까

토기를 처음 만들 때는 야외에서 장작불에 구웠다. 이같이 노천에서 토기를 구우면 붉은 색이나 갈색계통의 토기가 만들어진다. 이는 흙속의 철분이 산소와 결합에 나타난 현상이다. 굽는 온도는 600~800℃로 토기는 성긴 조직을 갖게 되어 깨지기 쉽고 물을 담으면 물이 배어나오게 된다. 이 같은 토기는 이후 청동기시대까지 큰 변화 없이 제작되게 된다.

이후 철기가 만들어지면서 1000℃ 이상의 온도를 올릴 수 있게 되었고 폐쇄된 가마에서 토기를 굽게 되면서 토기와는 다른 회색빛을 띠고 표면이 훨씬 치밀해져 물이 새나가지 않는 ‘도기’가 나타나게 되었다. 도기의 색이 황갈색, 회흑색이 되는 것은 밀폐된 가마에서 고온으로 장시간 굽는 과정에서 산소를 모두 태우고 환원화된 상태에서 재가 섞이고 흙속의 광물인 장석 등이 녹아 조직이 치밀해져 나타난 현상이다. 삼국시대인 백제의 토기들이 사실은 이 같은 고온에서 구원낸 도기류들로 회색의 치밀한 도기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삼국시기에 중국으로부터 전혀 새로운 자기가 수입되었다. 자기란 1300~1500℃ 온도에서 구운 것으로 순도 높은 백색 고령토로 모양을 만들어 가마에서 초벌구이를 한 다음 거기에 장석이 섞인 식물성 잿물 등의 유약을 입혀 다시 가마에서 1250℃ 이상으로 두 번째로 구우면 유리질 표면을 갖는 새로운 자기가 탄생한다. 이 기술은 중국만이 보유한 기술로 수백년 동안 다른 나라에는 전해지지 않은 특급 비밀이었다. 이 자기 기술은 중국에서 개발된 이후 세계에서 두번째로 10세기경 전라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푸른 하늘색(비색)의 청자, 전라도에서 만들어지다

▲ 진안 도통리 중평 청자가마터 출토 초기 청자.
▲ 진안 도통리 중평 청자가마터 출토 초기 청자.

고려 청자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자기문화의 시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즉, 시작시기와 기술개발의 주체 등에 대해 장보고세력에 의한 월주요기술이전, 후백제 견훤에 의한 기술수용설 또는 고려초기 중국의 오월국 붕괴 이후 기술자 이주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중요한 것은 중국 자기 기술이 현재의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수용되어 그 거점이 대표적으로 초기 순청자의 경우 전남 강진과 후기 상감청자의 경우 전북 부안으로 나뉘어 발전하였다는 인식이다.

▲ 진안 도통리 중평 청자가마터.
▲ 진안 도통리 중평 청자가마터.

그런데 최근 전북의 진안 도통리에서 초기 청자가마가 호남 최대규모로 확인되어 주목된다. 특히, 이곳에서 발견된 초기 벽돌가마는 호남 최초의 벽돌가마이자 초기 청자가 국내에서 생산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조성된 것으로 판단되며 한 기의 가마가 벽돌가마에서 진흙가마로 변화된 사례는 우리나라 청자가마에서 확인된 최초로 청자가마의 변천과정과 구조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가마 주변에 있는 폐기장에서는 한국식 해무리굽완, 잔, 잔받침, 주전자 등 다양한 초기 청자와 다량의 벽돌 등 요도구들이 출토되었다. 이는 후백제 시기와도 연결되어 초기 청자수용에 대한 후백제 기원설로 파악될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연구를 통해 확인된다면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최고의 고려 상감청자, 부안에서 제작

▲ 부안 유천리 일대-해동지도.
▲ 부안 유천리 일대-해동지도.

우리나라 도자기 제작기술 중 가장 독창적이면서 뛰어난 것은 청자의 마지막 단계인 고려 상감청자이다. 상감청자는 바탕에 무늬를 새기고 다른 종류의 흙을 메워 넣는 방법으로 나전칠기나 금속공예의 입사기법에서 이전부터 볼 수 있었던 것인데, 이를 고려시대에 도자기에 적용한 것이다.

특히, 고려 상감청자가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곳은 전라북도 부안의 유천리, 진서리이다. 이곳의 도요지는 1963년에 사적 69호, 70호로 지정되었다. 유천리 일대가 고려청자의 대표적 산지였던 것은 좋은 흙과 완성품을 운반하기 좋은 바다길, 그리고 풍부한 연료인 소나무가 많은 천혜의 지역이었다.

▲ 부안유천리출토 상감청자편.
▲ 부안유천리출토 상감청자편.

부안은 고려청자의 2대 생산지로서 12세기 중엽에서 말엽까지의 최전성기에는 80여개의 가마가 있었을 만큼 대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되기 시작한 이 곳 가마터는 우수한 파편을 지닌 요지의 퇴적층은 거의 파괴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나온 수백 점의 고려자기는 대부분 일본으로 빼돌려졌다. 유천 가마터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67년 국립박물관 조사반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이 때 보물 제346호로 지정받은 청자상감진사모란문매병 등 국보, 보물급 문화재 가치를 지닌 청자가 수십 점 발굴되었다.

부안의 가마터에 대한 연구는 지난 이화여대 및 원광대 박물관에 의해 조사 및 가마 유구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부안 유천 도요지에서 생산된 고려 상감청자들은 여타의 도요지에서 생산된 것들 보다 명품들로서 왕이나 귀족들이 사용하거나 대외 선물용으로 사용됐던 최상품이었고 특히, 자기의 본고장 송나라 등 중국에 역수출된 최상품이었다.

이같이 전라북도는 우리나라의 흙그릇이 토기에서 도기로 그리고 자기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가장 최정점인 청자와 상감청자를 만들어낸 지역이다. 이 같은 새로운 기술의 도입에 가장 앞서고 또 이를 발전시켜 종주국을 능가하는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낸 역량을 새로운 지역의 미래세대에게 전해 혁신과 창조역량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