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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리 5층 석탑 아래서 만난 석공
왕궁리 5층 석탑 아래서 만난 석공
  • 기고
  • 승인 2018.08.3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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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김종필 동화작가
김종필 동화작가

남녘에서부터 사람들 가슴에 꽃불을 싸지르며 올라온 벚꽃이 마침내 왕궁리 5층 석탑 앞에 도착하면 나의 봄도 시작된다. 봄볕의 나른함에 등을 기대고 까무룩 선잠이 들면 석탑 쪽에서 천 년 전 석공이 다가와 ‘요즘 사는 게 어떠냐’고 물어 온다.

7월 20일. ‘익산 문화재 야행’은 출발부터 가마솥더위였다. 마지막 코스인 왕궁리 유적 전시실에서야 땀이 좀 식었다. 백제의 첨단 화장실과 왕궁 지붕의 연꽃무늬 수막새와 수부(首府)라고 찍힌 기와를 보았다. 수부는 수도라는 뜻인데 왕궁리가 백제의 수도였음을 보여주는 ‘빼박’(빼도 박도 못하는) 증좌란다. 검은 나무막대에 붙은 기생충 알에서 화장실을 유추해내는 고고학자의 혜안이 놀랍다.

사람은 사라져도 유물은 남는다. 동아시아 최대 사찰 미륵사를 세운 백제 무왕의 무소불위 권력도, 이름 모를 석공의 고된 숨소리도 이슬처럼 사라졌지만 수부(首府)가 새겨진 기와와 천 년을 버텨 온 석탑은 남아 있다.

밤에는 탑돌이 행사에 참여했다. 올해 뽑힌 서동과 선화공주를 따라 퍼포먼스를 하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조롱박으로 만든 소원 등에 촛불을 켜고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욕심과 이기심과 오만과 독선을 반성했다.

나는 이 년 전 큰 병을 앓았다. 배를 열고 간을 반쯤 잘라냈다. 병원에 누워 지낸 보름은 다시 경험하기 싫은 악몽이었다. 같은 병실을 쓰던 환우 중 어떤 이는 유언을 녹음했고, 또 어떤 이는 산속으로 가겠다며 한밤중에 허름한 봇짐을 싸기도 했다.

모두 잠에 들면 혼자 깨어 창밖을 바라보며 속절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고맙다’ ‘미안하다’ 소리를 되뇌며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남은 삶을 걱정했다. 오늘 내가 쉬는 숨은 덤이다. ‘고맙다’ ‘미안하다’ 두 낱말만 화두로 삼고 살기로 수없이 다짐했는데 그 실천이 쉽지 않다. 매양 이 모양이다.

드디어 탑돌이가 시작됐다. 조명을 받은 5층 석탑은 신비롭고 장엄했으며 이 시간 ‘우주의 중심은 나’라는 듯 당당했다. 여름 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천 년 전 석공이 늦은 밤까지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우주에서는 어떤 별빛이 출발했을 것이고 나는 시방 그 별빛을 보고 있다. 별빛 속에서 정을 든 석공을 만난다. 그가 상처투성이의 투박한 손을 내민다. 사는 게 어떠냐고 오래 묵은 친구처럼 오늘도 묻는다. 나는 그저 빙그레 웃는다. 돌을 어루만지며 평생을 살았지만 이름 석 자도 남기지 못했다며 석공이 털털하게 웃는다. 그래도 이렇게 분신이 밤마다 달빛, 별빛을 축복을 받으며 천년을 살았고 앞으로 천년도 끄떡없을 테니 이만하면 괜찮게 산 거 아니냐고 내게 묻는다.

울적하거나 좀 쉬고 싶다면 왕궁리 5층 석탑으로 가보라. 벚꽃 찬란한 봄날이든, 나락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날이든, 별빛 달빛 찬란한 깊은 밤이든. 언제나 그곳에 가면 괜찮게 한세상 살다 간 석공의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종필 동화작가는 ‘문예사조’ 동화 부문 신인상과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으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땅아 땅아 우리 땅아>, <아빠와 삼겹살을>, <앙코르 왕국에서 날아온 나비> 등이 있다. 제1회 공무원문예대전 대통령상, 참교육문학상, 환경동화상을 수상했다. 현재 전북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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