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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내 그림자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내 그림자
  • 기고
  • 승인 2018.08.3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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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시인)
삽화=신보름(화가)
삽화=신보름(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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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들보다 정신연령이 한참 모자랐던 나는 지금도 못난이 축에 낀다. 남이 하는 얘기를 제대로 못 알아듣고 남들이 다 웃고 난 뒤에야 폭소를 터뜨리는 경우가 심심찮았다. 길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여러 의미를 짚어보는 데도 힘이 부친다. 나는 지금 등하굣길을 쓰려고 한다. 이 길을 오가면서 나도 뭔가를 생각했을 것이고 뭔가를 확신했을 것이며 고개를 숙인 채 걷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행위와 길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편집 의도와 다르게 글이 쓰일지라도 기억 중의 한 토막을 적어봄으로써 이제라도 내 행위를 낮게 내려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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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는 게 싫었다. 숙제하기도 싫었고 선생님께 매 맞는 것도 지겨웠다. 멍청하면 꾀라도 있어야 한다는 말부터 가난한 집 아이는 영리하다는데 너는 도대체 왜 이러냐는 말까지 무밥처럼 싫었다. 멍청한데 어떻게 꾀가 생길 수 있으며, 가난한 것하고 영리한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선생님은 말해 주지 않았다.

4학년 때부턴가 목요일엔 특별활동반이란 게 있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각자의 특기를 살리는 수업이었다. 그림그리기반 붓글씨반 베드민턴반 등등이 있었는데 그 속에 보이스카웃반도 있었다. 나는 저학년 때부터 이들을 유심히 봐왔다.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을 신었고 그 위에 반바지를 입었다. 그들만 신을 수 있는 운동화며 그들만이 입을 수 있는 감청색 유니폼은 가히 내 눈알을 잡아 뺄 듯이 유혹적이었다. 그들 옆에서 생글거리던 걸스카웃들은 또 어떤가. 치마 입은 유니폼도 예쁜데 얼굴 생김이며 몸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보이스카웃반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방학 땐 캠핑도 간다는데 거기서 걸스카웃반 지지배들과 폼 나게 놀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었다. 그 반에 들어가려면 유니폼을 살 만한 경제력을 갖춘 집 자식이어야 했고 공부도 잘 해야 했다. 공부는 좀 못하더라도 경제력은 갖춘 집 자식이어야 한다.

나는 씨름반이 되었다. 왜 내가 씨름반이냐고 선생님께 여쭐 계제가 나는 못 되었다. 선생님 뜻이 곧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공부는 그만두고 유니폼을 살 만한 돈이 없어 보이는 집 자식이기 때문에 씨름반에 들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부잣집 아들놈은 씨름반에 들 수 없나요? 이렇게 묻지도 못하고 학교 운동장 구석에 박혀 있는 씨름장에 갔다. 보이스카웃반에 든 애들은 특별한 사람들 같았고 나는 평생 샅바나 맬 수밖에 없는 사람일 것 같았다.

그때 마침 가방 손잡이가 떨어져나갔다. 잘되었다. 어머니가 논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새 가방 사내라고 떼를 썼다. 모레까지 가방을 안 사주면 학교에 안 가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하지만 대답은 이랬다. 지금은 모내기철이니 장에 갈 수 없다, 며칠만 책보에 책을 싸가지고 다녀라, 가방은 꼭 사주마, 옛날엔 모두 책보를 들고 다녔다, 뭐 이런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이런 대답을 듣고 학교에 갈 수는 없었다. 검정 고무신은 신었을망정 책보 들고 학교에 가는 학생은 전교생 중에 나 혼자일 것이었다. 그 이틀 뒤 아침 학교에 안 가겠다고, 못줄이나 잡겠다고 떼를 썼다. 보이스카웃반에 못 든 것 때문에 학교에 안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방 때문에 학교에 안 가겠다는 것으로 알고 아버지의 회초리가 사정없이 종아리에 감겼다. 그래도 버텼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작대기를 들고 오는 게 아니냐. 별수 없다. 매에는 장사가 있을지 몰라도 작대기질에는 장사가 없을 거니까. 회초리에 감겨 따끔따끔한 종아리를 끌고 손잡이 떨어진 책가방을 안고 등굣길에 나섰다.

그런데 책가방을 보퉁이처럼 안고 가야 한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학교에 가는 애들이 모두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가방 살 돈도 없냐, 이러면서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가방은 아무 짬도 모르고 어미 품에 안긴 돌배기처럼 내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몸체에서 떨어져 덜렁거리는 끈은 아이 다리 같았고 반원으로 온전한 끈은 아이 머리 같았다. 젖 달라고 보채는 이것을 팽개쳐버리지 못하고 낑낑대는데 내 속내를 짐작한다는 듯 눈에 확 띄는 것이 있었다. 땅바닥에 나뒹구는 세 발 가웃은 너끈한 새끼줄이었다. 지체 없이 새끼줄로 책가방을 통째로 묶고 끈을 내어 어깨에 걸쳤다. 가방을 땅바닥에 내던져 질질 끌고 앞을 향했다. 자, 볼 테면 봐라, 학교는 이렇게 다니는 거다. 가방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등굣길을 휘저었다.

건너물을 지나 닭똥 냄새가 지독한 내리배기를 얼른 지나 옥남 이용원, 이쁜네 술집, 꺼먹둥이 술집, 방앗간을 지나서 한참을 더 걸으면 노락쟁이가 나왔고, 공장에 다니는 형들 누나들이 자꾸 튀어나온다는 뽕밭이 나왔고, 아침밥 먹은 게 다 꺼진 학산을 지나면 팔복초등학교 후문이었다. 십 리가 넘는 자갈길, 논밭이 나를 응원한 길을 나는 가방을 질질 끌었고 학교가 파하면 그 역순으로 집에 돌아왔다. 또래들은 내 행동에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주 자랑스럽게 가방을 질질 끌면서 누구든 만나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학교를 좀 쉽게 다니자고 가방을 질질 끌었다. 또래들은 나를 똥 씹은 듯 바라봤다. 정말로 너 왜 이러냐고, 죽으려고 환장한 것 아니냐고, 사람 되기 벌써 글렀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일주일이 넘도록 이렇게 등하굣길을 휘저었다. 토요일이었다. 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아주 부드럽게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어떤 놈이 내 행동을 선생님께 꼰지른 것이다. 매품 팔러 온 흥부처럼 나는 기가 팍 죽었다. 몸으로 받아내야 할 것은 매가 아닐 것이다. 몽둥이찜질일 것이다. 선생님은 청소함 속의 몽둥이를 꺼내어 닥치는 대로 휘둘러댈 것이다. 자기 분을 못 이기고 슬리퍼를 벗어서 싸대기를 후려칠 수도 있다. 나를 들어서 창문 밖에 메다꽂을 수도 있다. 이렇게 조용히, 부드럽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부를 때는 곡(哭)소리가 나야 매타작이 끝났으니까.

그게 아니었다. 선생님은 가방을 왜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는지를 묻지 않았다. 어디 아픈 데는 없냐고 내 이마에 손을 갖다가 댔다. 이거 뭐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이 느낌이 드는 순간 선생님은 아주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철둑 너머에 있는 호성초등학교로 전학을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어차피 걸어다는 거 뭐 이 학교나 그 학교나 다를 게 없다고, 조금 더 걸을 뿐이라고, 네가 학교 다니기에는 그 학교가 여기보다 백번 나을 거라고 했다.

아아, 호성초등학교. 나는, 전학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쫓겨나고 싶지 않았다. 팔복초등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친구 한 명도 없이 어쩌란 말이냐. 무작정 무릎을 꿇고 다시는 가방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지 않겠다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요지부동이었다. 내 속이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선생님은 이젠 그럴 필요 없다고, 너는 왜 편하게 다닐 학교를 어렵게 다니려고 하냐고, 일이 다 끝난 듯 오히려 나를 달랬다.

그날 밤 종아리에 구렁이가 감긴 것처럼 아버지께 회초리를 맞았다. 어떤 놈이 또 꼰지른 것이다. 회초리가 부러지면 동생에게 다시 쪄오라고 하시면서 인정사정을 두지 않고 종아리를 불나게 했다. 회초리가 차악착 소리를 내며 종아리에 감겨도 나는 끝끝내 보이스카웃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일주일 넘도록 가방을 자갈길에 질질 끌었어도 나는 보이스카웃반에 들 수 없었고 새 가방도 생기지 않았다. 또래들은 내가 가방을 질질 끌고 다녔다는 행위만 중요했지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내가 보이스카웃을 ‘뽀이스카웃’이라고 부르는지를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나도 보이스카웃반 얘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나는 다시 호라발해져서 어떤 껀수를 잡을까, 골몰했다.

3

보이스카웃 핑계 대고 남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싶어서 가방을 질질 끌었던 길은 이제 없다. 논밭에 둘러싸여 어린 치기를 응원해주었던 꼬불꼬불한 길은 없다. 자갈길엔 아스팔트가 깔렸고 주위는 오죽잖은 공장 건물로 가득 찼다. 우두커니 서서 내 그림자를 바라본다. 욕망이 때로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버린다는 것을 알았어도 내 몸은 아직도 욕망의 집이 되어 있고, 잊을 것을 잊지 못하고 산다. 그래서 반편이 머리가 자주 무거운가 보다.

*이병초: 1998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 『밤비』, 『살구꽃 피고』, 『까치독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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